제2장. 하늘을 이렇게 날아서. (1)
남은 음식을 급하게 입에 넣은 클레이가 ‘실례할게.’라는 말을 남기고 선발 명단을 확인하기 위해 움직였다.
얼마나 조바심이 나면 저럴까?
정지우가 안쓰러운 웃음을 삼켰는데, 함께 있던 주장부터 레믹까지 공감한다는 듯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시선을 내린 정지우가 감자 으깬 것을 포크로 떴을 때였다.
“Ji! 식사 뒤에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
레믹이 조용하게 말을 건넸다.
놈이 전과 다르게 분명 조심하는 표정이어서 정지우는 ‘그러자.’ 하고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Ji! 나 선발이야. 골키퍼는 얀센이고!”
“잘됐다.”
식탁 저 너머에서 클레이가 가슴 앞으로 주먹을 들었다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걸어 나갔다.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군.”
“아스널전 이후로 부쩍 자신이 생긴 것 같던데? 미니 게임에서 레믹을 꽁꽁 묶었고, 포츠머스와의 경기에선 아담도 잡았잖아. 지금 클레이 앞에 호날두를 데려다 놔도 겁 없이 달려들걸?”
데이빗의 말에 라파엘이 웃으며 덧붙였다.
그사이, 식사가 대충 끝났다.
다들 일어나려는 순간에 스크립터가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Ji!”
그는 다른 말없이 고개로 문밖을 가리켰다. 마틴 감독이 찾는다는 의미였다.
정지우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뒤에 레믹에게 시선을 주었다.
“기다리고 있지, 뭐.”
“그래.”
이놈이 뭔 말을 하려고 이러지?
궁금하긴 한데 지금은 마틴을 먼저 만나야 할 때였다.
정지우는 식판을 반납하고 물을 마신 후에 마틴 감독에게 향했다.
똑똑똑.
“들어와.”
정지우가 들어가자 마틴이 책상에서 일어나 앞의 자리를 가리켰다.
“홍차? 커피?”
“좀 전에 마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마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의자에 앉았다.
“내일 경기에는 얀센을 선발로 넣었다.”
“클레이에게 들었습니다.”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고?
마틴이 의아한 얼굴로 정지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쥬피터 회장은 자네를 선발로 내세웠으면 하더군. 아마 지금쯤 분통을 터트리고 있을 거다.”
정지우는 잠자코 마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의 욕심을 다 채워 줄 생각은 없어. 어쩌면 이번 선발 문제로 틈이 벌어질 수도 있을 테고. 그래서 말인데…….”
힐끔 문 쪽을 바라본 마틴이 빠르게 시선을 가져왔다.
“프리미어리그 중위권 팀에서 내게 오퍼를 보냈다. 다음 시즌부터 팀을 맡아 달라는 조건인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감독이 이적하는데 선수의 의견을 묻는다고?
정지우는 혹시 영어를 잘못 이해한 건가 싶었다.
“만약 자네만 동의한다면 그 팀으로 함께 옮기고 싶다. 그 정도는 충분히 협상 테이블에 올릴 수 있는 조건이니까.”
“제가 쥬피터 회장과 계약된 것을 아시잖습니까?”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중간에 자네가 이적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명시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실점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적하는 건 쥬피터 회장도 개입하지 못하게 해 놓았다.”
정지우는 나직하게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유정호는 계약에 이런 허점이 있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무실점 조항에 끌려가지 말자고. 자넨 이미 유니온 시티에 제시한 금액 이상을 받을 선수로 관심을 받고 있으니까. 게다가 막바지에 가면 쥬피터 회장은 분명 실점을 하게 하려고 수를 쓸 게 분명하다.”
정지우가 침묵하고 있는 것이 걸리는지 마틴은 상체를 책상에 얹어 가면서 말을 이었다.
“한국에 축구 교실 여는 것은 이번 이적에서 얻는 계약금으로 충분히 가능할 정도로 받아 주겠다. 그리고 연봉이 또 있잖나? 그거면 자네가 원하는 축구 교실 3년 유지비는 충분히 지원하고 남을 거다.”
마틴은 어쩐지 간절해 보이는 눈빛으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
“이전에 문제가 되었던 제 이적에 관한 보도를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마틴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했다.
“그 일로 돈 때문에 배신한 선수가 되었는데 이곳에서 또 그런 모양새가 나오면 아무리 축구 교실을 열어도 박 감독님만 추하게 만듭니다.”
마틴은 정지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한국은 좁습니다. 그래서 평판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돈에 팔려서 의리를 지키지 않은 선수가 만든 축구 교실에는 학생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자네 인생에 대한 고민은 안 하나?”
정지우는 멋쩍게 웃고 말았다.
“내가 지금 다른 팀으로 간다면, 혹은 쥬피터 회장이 날 경질이라도 한다면, 자네는 절대 남은 7게임을 무실점으로 막을 수 없어.”
마틴의 답답한 심정이 그의 얼굴과 말투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쥬피터 회장은 수비수에게 자살골을 넣으라고 매수라도 할 사람이라고. 그가 3년 동안이나 자네를 묶어 놓을 기회를 그냥 지켜보기만 할 거라고?”
마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잠시 정지우를 들여다보았다.
“게다가 자네가 내건 조건이 워낙 솔깃하거든. 한국에 유니온 시티 이름으로 축구 교실을 만들기로 한 조건을 다시 보게. 8게임 무실점이야. 그렇지 못하더라도 이미 세 게임의 임팩트로도 홍보 효과는 물론이고, 기업체 후원까지 기대할 만하지.”
“한국 기업의 후원은 어려울 겁니다.”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계산기를 두드려 봐서 이익이 가능하다면 누구라도 나설 수 있는 게 이쪽 생리니까.”
엉뚱한 곳에서 대화가 끊겼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고민해 보겠습니다.”
“비밀을 지켜 주겠나? 자네 매니지먼트를 포함해서?”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틴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이면 충분하겠지?”
“예.”
마틴이 입술 양쪽을 늘리며 웃는 표정을 지어냈다. 이제 그만 나가 봐도 좋다는 의미였다.
휴게실로 들어섰을 때 레믹은 발을 덜덜 떨면서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끝났어?”
“무슨 일이야?”
“밖에서.”
도대체 왜 이렇게 편안한 휴게실 놔두고 굳이 밖으로 나가자고 하는 거지?
이놈이 설마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는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정지우는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레믹을 따라 걸었다.
선수들이 이용하는 터널을 지나 그라운드로 나설 때면 느닷없이 신의 은총이 쏟아지는 것처럼 빛이 달려든다.
레믹은 통로를 빠져나가 그라운드의 바깥으로 걸었다.
그놈 참!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봄의 햇살, 물을 뿌려 촉촉해진 잔디 냄새, 텅 빈 관중석이 주는 여운이 나쁘지는 않았다.
박용근과 이런 경기장에서 함께 서 있다면…….
“Ji, 나 오퍼 받았다.”
레믹이 엉뚱한 말로 정지우의 감상을 뚝 자르고 들어왔다.
리그가 끝날 때가 되어서인지 감독도, 선수도 오퍼를 받는 모양이었다.
“축하한다.”
“괜찮다면 함께 움직이는 거 어때?”
레믹이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힐끔 시선을 주었다.
“복잡할 거라는 건 알아. 필요하다면 내 쪽 매니지먼트에서 Ji의 소속 회사로 연락하게 할 수도 있어.”
정지우는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었다.
하루에 두 번이나 이적 소식을 들었는데, 두 사람 모두 함께 이적하자는 제안을 던진다.
“제안은 고맙다. 고민해 볼게.”
레믹은 고개를 끄덕이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퍼라는 것이 말이 쉽지, 팀마다 요구하는 선수의 수준과 포지션, 지출할 수 있는 경계선이 워낙 분명해서 소개한다고 진행되는 게 아니란 것을 레믹과 정지우 모두 알고 있었다.
마틴의 경우는 감독이라 그나마 낫다. 하지만 레믹은 아직 정지우를 조건으로 이적할 만큼은 전혀 아니었다. 설사 레믹이 세계적인 선수가 되었더라도 그렇다. ‘원 플러스 원’도 아니고, 어떤 팀이 ‘끼워 사기’를 해 가면서까지 선수를 영입하겠나.
그런데 이놈은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지?
정지우는 진심으로 레믹의 정체성이 궁금해서 고개를 돌렸다.
“팀을 위해 뛰라고 충고받은 거, 축구 시작하고 두 번째였거든. 그 외에도 Ji와 경기하면 어쩐지 내가 가진 걸 다 꺼낼 수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이놈이 사람 속을 읽는 재주가 있나?
정지우가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레믹은 절묘한 타이밍에 궁금했던 내용을 털어놓고 있었다.
“이적이 욕심나긴 하는데 다른 곳에 갔다가 골을 못 터트리면 어쩌나 싶기도 해서.”
정지우는 기가 막힌 웃음을 웃고 말았다.
클레이의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했던 건, 이놈이 욕심이 있는 것도 있지만, 이렇게 단순한 마인드를 지녔기 때문이었구나 싶어서였다.
“지난 게임처럼만 해. 그럼 넌 잘해 낼 거다.”
“그러고 싶어. 그런데 이상하게 공을 잡으면 공이 꼬드기는 느낌이거든. 몰고 가, 레믹! 넌 해낼 수 있어! 이렇게.”
정지우가 웃는 것을 본 레믹이 어색한 표정으로 따라 웃었다.
“이적 잘됐으면 좋겠다.”
“결과는 몰라. 하지만 저쪽 팀에서 유니온 시티가 솔깃할 이적료를 제시할 모양이야.”
정지우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텅 빈 그라운드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레드 블레이트를 나선 정지우는 성 마테오 병원으로 향했다.
5층에서 세 번째 병실에 릴리가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정지우가 왼쪽 세 번째에 있는 릴리의 병실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팔짱을 낀 오른손으로 입을 가린 메기가 심각한 표정으로 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똑똑.
메기가 시선을 들었다가 정지우를 보고는 얼른 걸음을 옮겼다.
“Ji!”
“무슨 일이에요?”
“릴리가…….”
울컥 눈물을 쏟아 내는 메기를 다독인 정지우가 시선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들어가도 괜찮아.”
코를 훌쩍인 메기가 눈물을 닦고서 건넨 말이었다.
정지우는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Hi, Ji.”
힘겨운 음성으로 인사를 건넨 릴리가 아파 보이는 미소를 그려 냈다.
하얀 낯빛, 유독 파랗게 보이는 눈동자, 코에 끼워 넣은 두 줄의 호스, 가냘픈 손에 꽂힌 링거 바늘이 릴리를 더욱 애처롭게 만들었다.
“오늘은 어때?”
“좋아.”
둘이서 비슷하게 웃었다.
“Ji, 포츠머스전 정말 멋졌어. 그 경기도 날 위해서 그렇게 한 거야?”
“물론이지.”
정지우가 과장된 동작으로 양팔을 쭉 펼쳐 보였다.
“Ji가 그렇게 할 때면 새처럼 보여. 그래서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아.”
“몰랐어? 나 하늘을 날아.”
“정말?”
“정말! 그래서 날아오는 슛을 다 막는 거잖아. 하늘을 이렇게 날아서!”
다시 팔을 쭉 펼쳐 보이는 정지우를 보며 릴리가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팔을 모은 정지우는 커다란 손을 움직여 릴리의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릴리, 네가 힘을 잃으면 난 골을 못 막아.”
“왜?”
“그건 그만큼 릴리가 내게 중요하기 때문이지.”
정지우가 답을 했을 때 눈물을 수습한 메기가 강한 얼굴로 들어섰다. 심지어 그녀는 밝아 보이는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Mommy.”
원래는 밝은 목소리여야 했는데 릴리의 지금 음성에는 기운이 거의 없었다.
“내가 힘을 잃으면 Ji는 골을 못 막는대요.”
“그랬어? 왜 그럴까?”
“내가 그만큼 중요해서래요.”
“그래… 우리 릴리… 는 그럴 자격이 있지.”
감정을 억지로 삼켜 가며 메기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와 표정을 지어내며 답했다.
항암 치료를 받는 걸 거다.
정지우는 릴리의 숨결에서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에게서 풍기던 독한 약 냄새가 나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어머니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릴리는 면역력이 떨어지는 것 때문에 수시로 각종 질병이 발생했는데, 폐렴 정도는 아예 감기처럼 찾아왔다.
원인을 알아야 치료라도 하는데. 암세포가 생기면 끝인데…….
더 번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수술을 해 보겠다는 병원의 제안을 받았고, 그 길에서 어머니를 잃었다.
이번 항암 치료가 실패하면, 릴리가 이걸 이겨 내지 못하면, 이 작은 여자아이도 고통 없는 세상으로 가게 될 거다.
“Ji, 슬퍼?”
“아니야.”
정지우의 눈가가 붉어진 것을 보았던 모양이다.
“가 보고 싶어. Ji가 태어난 나라, Ji가 하늘을 날아서 슛을 막는 경기장.”
“얼른 기운 내. 그래서 내가 나선 경기에 와 주고, 나랑 한국에도 가고 하자.”
“응.”
릴리가 힘겹게 웃고는 눈꺼풀을 무겁게 껌벅였다.
“자. 좋은 꿈 꾸고 일어나면 한결 좋아질 거야.”
“고마워, Ji.”
커다란 눈이 창백한 눈꺼풀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정지우는 잠시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고마워.”
말을 겨우 꺼낸 메기가 입을 삐죽이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이겨 낼 거예요. 릴리는 강한 아이니까요.”
“고마워. 정말 고마워.”
정지우는 우는 메기를 안고 등을 다독여 주었다.
어머니를 잃을 때의 아픔이 생살을 파고드는 칼날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