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 (3)
“다시 시작하기로 한 거냐?”
“예,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해 보려고요.”
“잘했다. 아직도 유정호랑 같이 움직이는 거고?”
“예.”
주성호는 끝내 박용근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이런 모습 때문에 기자인데도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
박용근과 정지우의 일을 유일하게 제대로 기사로 올려 주었고, 협회와 구단의 잘못된 관행을 지적해 주었으며, 그러면서도 정지우의 부탁대로 어머니 때문이라는 기사는 올리지 않았던 기자였다.
일본에서 세 번, 영국에서 한 번 본 게 마지막이었다.
정지우의 아파트에 들어선 주성호가 방과 거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라면 있는데 드실래요?”
“최근 들었던 말 중 가장 반가운 소리다.”
주성호가 얼마나 좋아하던지 정지우는 라면을 한 개 더 꺼내 봉지를 뜯었다.
물이 끓는 동안, 반찬 몇 가지를 꺼내 놓았다.
“이건 산 게 아닌 거 같은데?”
정지우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이 양반에게 어디까지 얘기하는 게 좋을까?
라면과 스프를 넣자 특유의 냄새가 코를 간질였고, 깻잎과 김치가 자꾸만 마른침을 삼키게 했다.
즉석밥 3개를 전자레인지에 넣는 것으로 식사 준비가 모두 끝났다.
“드시죠.”
“고맙다. 여기서 이런 음식을 맛볼 줄은 몰랐다.”
주성호가 정말 기쁜 얼굴로 달려들었다.
라면은 온전히 주성호의 몫이다. 정지우는 즉석밥 2개만 먹었는데, 그사이 주성호는 라면에 즉석밥 한 개를 넣어서 행복한 얼굴로 식사를 마쳤다.
“어! 살 것 같다.”
배를 문지르며 주성호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같이해.”
그는 정지우가 빈 그릇을 옮기는 것을 보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좁아요. 둘이 할 일도 아니구요.”
“그래도 같이해.”
결국, 주성호가 달려들어서 둘이서 대강 치우고 커피 물을 올렸다.
“믹스 커피, 블랙커피, 어느 거 드실래요?”
“어? 믹스 커피도 있어?”
주성호는 라면을 보았을 때만큼이나 반가운 얼굴로 달려들었다.
둘이서 믹스 커피와 인스턴트커피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냥 갈까 하다가 워낙 오랜만이라 저녁이나 먹자고 불렀었어. 그냥 갔었다면 엄청 후회할 뻔했다.”
“잘하셨어요.”
마흔이 넘은 주성호는 이제 제법 관록이 묻어나 보였다.
“어떻게 된 거냐? 아! 이건 기자로서가 아니라 그냥 아는 형으로 하는 질문이다.”
“그냥요. 던캐스트와 계약이 두 달 남았는데 이대로 끝내는 건 아니다 싶었었거든요.”
주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 감독님 근황은 알고 있어?”
“정호 형한테 대충 들었어요.”
“후유! 아직도 정신들 못 차린 거다. 그 바람에 월드컵 예선에서 떨어지게 생겼는데도 아직도 핑계거리나 찾고 있고.”
정지우는 잠자코 커피를 마셨다.
그런 건 아예 관심도 없었다.
“연락 온 데는 있냐? 계약이 그 정도 남았으면 이적료도 없는 데다, 이번 활약이 워낙 강렬해서 탐내는 팀이 좀 있을 것 같은데?”
“어쩌면 유니온 시티와 계약을 할지도 모르겠어요. 정호 형이 뛰고 있으니까 결과를 기다려 봐야죠.”
“그렇구나.”
믹스 커피를 마신 주성호가 진지한 얼굴로 정지우를 보았다.
“이제는 네 이야기 제대로 한 번 써 보는 거 어떠냐? 지금 당장 말고 유니온 시티와 계약되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가와구치 이후에 동양인으로는 두 번째 프리미어리그 골키퍼가 되는 건데, 거기에 너는 선발로 나올 수도 있잖아. 아마 동양인 최초 기록일 거 같다.”
정지우는 피식 웃고는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하긴, 나라도 그러고 싶지 않을 것 같기는 하다.”
주성호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번호는 알지?”
“예.”
“그냥 혹시 답답한 일 생기면 연락해라. 그리고 오늘 경기는 단신으로 내보낼지 모르니까 그렇게 알고.”
“그게 편해요.”
주성호가 ‘너는 어째 변한 게 없냐?’라고 하며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었다.
한 시간쯤 둘이서 ‘만나는 사람은 있냐?’, ‘컨디션은 어떠냐?’, 그리고 전국대회에서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박 감독님이 대단하신 거야. 그때 가르쳤던 애들 중에서 지금 국가대표가 4명이나 나왔으니까. 한동안 박용근 키즈라는 말이 떠돌았는데 지금은 뭐…….”
입맛을 다신 주성호가 바닥에 묻은 것처럼 남은 믹스 커피를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소는요?”
“근처에 호텔 잡아 놨어. 네 경기 보고 싶어서 회사 경비 좀 썼다.”
“주무시고 가세요.”
“나 이래도 누가 옆에 있으면 잘 못 잔다. 나름 섬세하거든.”
주성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지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해. 응원할게.”
“고맙습니다.”
주성호를 배웅하고 방으로 돌아온 정지우는 늘 하던 대로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7게임 남았다.
회복 훈련을 지켜본 마틴은 레드 블레이트를 벗어나 유니온 시티의 중심가를 향해 움직였다.
쥬피터가 보내 준 차를 타고, 쥬피터의 사무실로 쥬피터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어쩐지 심술쟁이 마법사나, 파란 아이들을 잡아먹고 싶어 하는 코가 뾰족한 욕심쟁이 늙은이를 만나러 가는 느낌이었다.
건물로 들어선 마틴은 곧바로 11층에 있는 쥬피터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어서 오게.”
쥬피터는 과장된 몸짓으로 마틴을 맞았다.
오크 톤으로 꾸며진 그의 공간은 사진과 트로피를 올려놓은 탁자와 조명을 위한 스탠드로 빈 곳을 메웠고, 각종 인증서로 벽을 장식해 두었다.
“앉지.”
전기 벽난로 앞 의자를 가리킨 쥬피터가 진열장으로 움직였다.
“한잔할 텐가?”
“홍차가 있다면 그걸 마시겠습니다.”
“우유는?”
“좋지요.”
쥬피터는 홍차에 우유를 붓고, 진열장에서 브랜디를 꺼내 유리잔의 바닥을 적실 만큼 따랐다.
홍차와 브랜디 냄새가 그의 사무실을 단숨에 가득 메웠다.
“하아! 멋진 경기였어. 경기가 끝나고 전화가 참 많이도 오더군.”
홍차 잔을 작은 탁자에 놓아준 쥬피터가 말과는 달리 반갑지 않다는 얼굴로 마틴의 맞은편에 앉았다.
“당장 레믹을 노리는 곳이 두어 곳 생기는 모양이야. 그 외에도 자네를 탐내는 곳이 생기기도 했고 말일세. 차를 좀 들지?”
유리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쥬피터가 마틴을 힐끔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가 나올 거다.
“화요일에 있을 FA 게임 말일세. Ji를 선발로 세우면 어떨까 싶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마틴은 홍차 잔을 내려놓으며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FA 경기는 얀센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 리그 승격을 확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흠.”
쥬피터가 고개를 갸웃했다.
“레믹의 골 감각이나 팀의 컨디션으로 보았을 때 FA 컵도 욕심낼 만한 것 같은데? 더구나 다음 상대가 리그 원 소속인 라우쓰 FC라면 더 그렇지 않나?”
말을 마친 쥬피터가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마틴의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고민하겠습니다.”
“고맙군.”
전혀 다른 의미의 대꾸와 대꾸가 이어진 다음이었다.
“그리고 말일세. 자네와의 계약을 연장할 생각인데 어떤가?”
쥬피터가 넌지시 또 다른 제안을 꺼내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마틴은 지극히 형식적인 답으로 감정을 대신 표현했다.
“지금의 자네에게서는 명장의 품위마저 느껴지는군. 유니온 시티 축구팀이 생겨나고 처음으로 웸블리 스타디움(FA 결승전이 열리는 축구장)에 가는 일이 생긴다면, 나와 우리 관계자, 그리고 관중들은 영원히 자네를 잊지 못할 거야.”
“그럴 수 있었으면 싶군요.”
“다음 경기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참 오랜만이군.”
쥬피터의 말에 마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욕심쟁이가 더는 할 말이 없음을 알아서였다.
***
한승관은 인상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복도를 걸었다.
하여간 기자라는 것들이 별것도 아닌 기사를 부풀려서는 일을 만든다.
‘인성이 부족한 선수의 활약’이라던가, ‘영국인도 홀린 정지우의 이중성’ 이런 기사 제목은 좀 낫다.
‘레드 블레이트에 울려 퍼진 정지우의 응원가’나 ‘미스터 어메이징, 매직 숫자 1을 남기다.’라는 기사는 축구 팬들에게 공연한 기대만 심어 주는 꼴이었다.
그래서인지 독자들의 반응도 ‘월드컵 예선전 보다가 암 걸리겠다. 정지우를 한 번이라도 써라.’라는 댓글에 무더기로 추천하는 모양을 보였다.
한승관은 고개를 흔들어 표정을 바꾸고, 옷매무새를 만진 후, 전무이사 겸 부회장의 방으로 들어섰다.
“안에 계시지?”
“잠시만요.”
담당 비서가 얼른 일어나 부회장 조동익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승관이 자신도 이런 방에서 이렇게 비서를 두고 한국 축구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들어가세요.”
자리로 돌아온 비서가 조동익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렸다.
한승관은 바로 조동익의 방으로 들어갔다.
“부회장님.”
“어서 와. 이리 앉지.”
희끗희끗한 머리를 엄격하게 손질한 조동익이 소파의 주인 자리에 앉으며 손을 뻗었다.
한승관은 조동익의 앞에 두 줄로 놓인 소파의 오른편에 앉았다.
정치인이 발전을 기원한다며 붓으로 글을 써 준 도자기, 딱딱한 커버의 책이 가득 든 책장,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고급 모니터가 거의 전부인 방이었다.
“점심은?”
“먹었습니다.”
되지도 않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비서가 녹차 티백이 담긴 잔을 가져다주고 사무실을 나섰다.
“왜 불렀는지는 알지?”
“혹시 정지우 때문 아니십니까?”
조동익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이 저러다가 유니온 팀과 계약이라도 하면 우리 입장이 아주 난처해져. 거기에 주성호 같은 기자 놈들도 있고. 자네 생각은 어때? 유니온 시티인가 하는 팀이 정지우와 계약을 할 것 같아?”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원 계약이 얼마 안 남은 상태여서 놈이 어떡해서든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는 것 같기는 한데, 결과는 좀 더 지켜봐야 알 것 같습니다.”
“흠.”
조동익은 계속해서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
“일단 기자들을 좀 만나 봐. 그래서 당분간 그놈 기사를 좀 자제해 달라고 하고, 기사 클릭 수가 서운하지 않을 다른 기사들 좀 협조해 줘. 그리고 그놈 기사 좀 내리라고도 하고.”
“예.”
“쯧! 악마의 재능도 아니고, 어째서 이름까지 다 사그라들었던 놈이 불쑥 튀어나와서는!”
못마땅한 심사를 그대로 드러내던 조동익이 표정을 바꿨다.
“골키퍼 좀 알아봤어?”
“아직은 마땅한 선수가 없습니다.”
“언제까지 그럴 참이야? 지금 전술 분석관 바꾸라고 난리인 거 몰라? 정 안 되면 변두리 출신이라도 몇 명 추려서 훈련에 참가시켜 봐. 그랬다가 후보로 앉혀 두면 되잖아.”
“예. 감독에게 추천해 보겠습니다.”
“그래. 아쉬운 게 있으면 바로바로 알려 주고.”
“감사합니다.”
한승관은 고개를 숙이며 답을 했다.
“박용근은?”
“부인이 하는 꽃집에 나간다고 들었습니다.”
“으이그! 모자란 인간! 하여간 그래서 축구를 해도 명문에서 해야 돼.”
조동익은 탄식을 쏟아 내면서도 묘하게 만족한 눈빛이었다.
***
월요일 훈련을 마친 뒤에 서브 선수들 사이에 묘한 흥분이 감돌았다. 다음 날인 화요일에 있을 FA컵 16강전 선발 명단 때문이었다.
프로 선수들이다. 약팀과의 경기에서 멋진 활약을 보여 주전으로 발돋움하거나 오퍼를 받고 싶은 선수들의 욕망을 탓할 건 아닌 거다.
미니 게임이 있었다면 대략 눈치라도 채겠는데 화요일 경기에 대비해서인지 훈련도 무척이나 짧았다.
훈련을 마친 정지우가 식당으로 움직일 때까지 선발 명단은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FA컵은 관심도 없었던 터라, 정지우는 편안한 마음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적당하게 음식을 담아 자리에 앉았을 때 클레이를 시작으로 주장 데이빗, 카알, 라파엘, 스웰던, 꼼빠니, 그리고 레믹까지 우르르 정지우의 식탁으로 몰려왔다.
“앉아도 되지?”
“물론.”
점심을 알아서 해결하던 선수들이 거의 모두 식당에 있었다.
“선발 명단이 왜 이렇게 안 나오지?”
클레이가 욕심나는 것처럼 말을 건넸는데, 함께 앉았던 이들은 오히려 정지우의 선발이 더 궁금한 얼굴이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스크립터가 들어와 휴게실 한쪽에 선발 명단이 적힌 A4 용지를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