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 (2)
고작 세 게임 만에 승리의 응원가에 정지우가 등장한 거다.
카메라가 양손을 앞으로 뻗으며 ‘Ji’를 외치는 홈 관중들을 보여 준 다음에, 곧바로 정지우의 얼굴을 비춰 주었다.
왜 그런지 울컥해서 전은주는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로 눈시울을 붉게 물들였다.
삐이익!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어셋으로 휘슬 소리를 듣는 순간에 전은주는 그만 눈물이 왈칵 솟아나고 말았다.
정지우가 공을 쳐낼 때의 악착같던 눈빛이 자꾸만 전은주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당연하게 라파엘을 중심으로 한 수비 라인이 올라갔다.
중앙선 부근에서 다시 격렬한 공방이 이루어졌는데, 레믹은 사죄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공을 따라 열심히 뛰어다녔다.
선수들이 비 오듯 땀을 흘렸다.
이런 거칠고 격렬한 경기는 또한 관중들을 흥분시킨다.
쉬지 않고 이리저리 공이 옮겨 다니던 중간이었다.
툭! 투욱!
터치라인에서 꼼빠니가 차 준 공을 받은 카알이 그대로 방향만 바꾸었다.
“우와아아아!”
수비수를 지나친 공의 앞으로 귀신처럼 레믹이 불쑥 튀어나왔다.
포츠머스의 골키퍼 폴이 달려 나오는 것을 본 레믹이 공을 툭 띄워 올렸다.
툭. 투욱!
“이예에에에에에에!”
4골이다!
혼자서 4골을 넣은 레믹이 양손 주먹을 번갈아 위로 들어 가며 겅중겅중 코너 플래그 앞으로 뛰어갔다.
포츠머스의 골키퍼 폴이 골망을 향해 공을 세차게 차며 분통을 터트렸지만, 이미 들어간 골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정지우는 하늘을 향해 검지를 치켜들고 시선을 들었다.
‘저 정말 잘하죠?’
보고 싶다.
지금은 고통 없을 어머니, 한국에 있을 감독님과 사모님이.
그리고 보여 주고 싶다.
이런 경기를 할 수 있도록 키워 준 세 사람에게 지금 같은 경기를!
레믹이 또 알통을 만들었는지 시선을 내릴 때 관중들이 외친 ‘미스터 어메이징!’이라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틴은 허공을 향해 연속해서 오른 주먹을 뻗어 냈다.
이런 희열 때문에 축구를 시작했고, 감독이 되었다.
4 대 0이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상대 팀을 실력으로 누르고 관중들이 열광하는 경기를 선보이며 얻은 점수가.
4골쯤 되면 세레머니를 좀 조심할 필요가 있었는데, 지금은 경우가 다른 거다.
마틴은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꼼빠니가 건네준 패스를 카알이 멋지게 방향만 틀어 주었고, 그 공을 레믹이 달려들어 골로 만든 건,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상위 팀에서나 볼 수 있는 멋진 장면이었다.
선수들이 달아오르며 자신이 가진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
골을 욕심내기보다 팀이 승리하기를 바란다.
마틴은 감동을 누르기 위해 숨을 내쉬며 다시 벤치에 앉았다.
뺀질이 레믹을 고작 30분 만에 팀에 헌신하는 챔피언십 최고의 골게터로 만들어 버렸다.
두 게임에 벌써 7골?
저놈은 틀림없이 이적을 하겠지만, 상관없었다.
마틴은 정지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Go, Go, Go my Ji! Go, Go, Go my Ji!’라는 관중들의 응원가를 중얼거렸다.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유니온은 공을 천천히 돌렸다.
상대 팀은 분할 일이지만, 승부가 걸린 시합에서 이런 건 당연한 거다.
짜증이 있는 대로 오른 포츠머스의 11번 게리가 꼬리에 불붙은 개처럼 뛰어다니고, 7번 아담과 9번 매튜가 좌측과 우측에서 나서 보았지만, 이미 포츠머스 선수들은 사기가 꺾여 버린 상태였다.
시간은 천천히, 그러나 꾸준하게 흘러갔다.
정지우가 쓰러졌던 시간을 계산했는지 추가 시간이 5분 주어졌는데, 포츠머스는 특별한 기회를 잡지 못했다.
포츠머스의 수비수가 길게 차 준 공을 향해 11번 게리가 열심히 뛰었지만, 공은 그대로 아웃되고 말았다.
패스가 너무 길었고, 게리도 지쳤는지 속도가 많이 줄었다.
선수 교체가 있어서 잠시 경기가 중단되었다. 마틴은 레믹을 대신해 수비형 미드필더를 집어넣었다.
짝짝짝짝짝짝짝짝!
레믹이 왼쪽 머리에 대고 박수를 치며 천천히 그라운드를 빠져나갈 때, 홈팀 관중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쳐 주었다.
어지간하면 교체할 만도 한데 포츠머스는 게임을 포기했는지 선수를 교체하지 않았다.
리그의 막바지여서 차라리 다음 게임에 집중하는 것이 더 좋다는 판단을 했는지도 모른다.
선수 교체가 끝나고 정지우는 공을 향해 섰다.
콕콕.
오른발로 바닥을 찍은 다음, 천천히 움직여 라파엘에게 공을 차 주었다.
패스, 패스, 패스.
공은 유니온 시티 진영을 천천히, 그리고 여유 있게 돌았다.
삑! 삑! 삐이익!
심판이 경기 종료 휘슬을 불 때까지.
“이예에에에에!”
4 대 0의 스코어, 프리미어리그 승격까지 승점 1점을 남긴 포츠머스 시티와의 경기가 끝났다.
수건을 뒤집어쓴 레믹이 경기장으로 나와 선수들과 손을 마주치거나 가볍게 끌어안았다.
정지우는 손을 높게 들어서 박수를 치며 중앙으로 걸었다.
앞에서 레믹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Ji! 고마워.”
“오늘 잘했어.”
정지우는 놈의 뒤통수를 툭 때린 다음, 웃어 주었다.
경기가 끝나고 5분이 넘도록 유니온 시티 선수들은 그라운드를 벗어나지 못했다. 열광하는 관중들에게, 최고의 응원을 보여 준 홈팀 관중들에게 보내는 선수들의 답례였다.
유니온 시티에는 등 번호 12번 선수가 없을 만큼 응원단에 무한한 존중을 표한다. 그들이 곧 12번 선수라는 의미였다.
그러니 선수들 역시 충분한 답례를 했다고 여길 때까지 그라운드를 떠나지 않는다.
솔직히 선수들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었다.
이제는 버릇이 된 것처럼 전은주는 입 앞에서 물개 박수를 쳤다.
“잘했어, 지우야.”
그런데 그 순간에 모니터가 ‘어딜 공짜로 계속 보려고?’ 하는 것처럼 화면을 확 바꿔 버렸다.
“여보, 커피 마실래?”
“그럴까?”
자리에서 일어난 전은주가 앉아 있는 박용근을 살며시 안아 주었다. 붉게 물든 눈, 그리고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서 달아오른 얼굴을 한 박용근이 안쓰럽고, 고마워서였다.
천상 축구인이고, 평생을 축구와 살아온 그가 모니터 화면을 바라볼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
두 사람은 잠시 그렇게 있었다.
“여보, 우리 지우 보러 갈까?”
몸을 뗀 전은주가 앉아 있는 박용근을 보았다.
“그냥 커피 먹자.”
전은주가 먼저 웃었고, 박용근이 따라 웃었다.
오늘 믹스트존의 주인공은 당연하게 레믹이었다.
그 외에 정지우를 향해서 ‘응원가를 들었는데 기분이 어땠느냐?’라는 질문과 함께 ‘벌써 리그에서 두 게임, FA컵에서 한 게임, 세 게임이나 클린 시트를 기록했다. 앞으로도 자신 있느냐?’ 따위의 질문이 날아왔다.
정지우는 대개 모범적인 답을 했고, 마지막으로 ‘응원해 준 홈 관중들 덕분에 팀이 승리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승리한 경기를 보여 줄 수 있어서 더욱 기쁘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정지우가 믹스트존을 벗어나 통로로 들어섰을 때였다.
“미스터 어메이징!”
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관중들이 정지우를 향해 박수를 치거나 손을 뻗었다.
정지우는 손을 들어 그들의 손을 짧게나마 잡아 주었다.
통로의 끝에서는 곰처럼 커다란 아빠가 아들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서 정지우 앞으로 내밀었다.
정지우는 그의 조그마한 아들,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처럼 덩치가 커다랗게 변할 그 아이와 악수를 나누고, 다시 손을 세워서 잡는 것처럼 돌린 다음, 마지막에 주먹을 툭 부딪쳐 주었다.
“고마워! Ji!”
아버지가 감격한 것처럼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프로 선수로 이 정도는 당연히 보여야 할 성의였다.
정지우가 손을 내렸을 때였다.
“정지우!”
한국말로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렸을 때 기자 한 명이 웃고 있었다.
“어? 형?”
“오늘 멋지더라! 저녁 먹을 수 있어?”
정지우의 표정을 본 주성호가 넉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처럼 오프 더 레코드!”
“알았어요. 씻고 나올게요.”
“그래. 게이트 앞에 있을게.”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여 준 다음, 마지막으로 홈팀 관중들을 향해 손을 높이 들고 박수를 치며 통로로 들어섰다.
마틴은 감독이 된 이후에 가장 많은 질문을 소화하고 있었다.
‘팀의 색깔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 점에 대해 설명을 부탁한다.’라거나, ‘두 게임 연속 레믹의 활약이 대단했다. 그를 이렇게 바꾼 비결이 있나?’, 그 외에 ‘오늘 경기로 프리미어리그 진출의 9부 능선을 넘었다. 다음 시즌 프리미어리그 성적을 어느 정도나 기대하나?’ 따위의 설익은 질문을 연달아 받아 들었다.
답을 하면서 마틴은 기가 막힌 심정이었다.
구색을 갖추기 위해 임대로 데려온 동양인 골키퍼가 단 세 게임 만에 팀을 이렇게 만든 거라고 답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마틴은 일단 감독이 할 법한 모범적인 답을 꺼내 들었다.
라커룸의 분위기는 최고였다.
정지우가 들어서자 클레이가 가장 먼저 다가왔다.
손을 세워 잡은 다음 당기면 상체가 그대로 부딪친다. 어깨를 부딪치는 순간에 상대의 등을 두드려 주는 것이 대개의 영국 선수들이 하는 동료에 대한 존중이었다.
“오늘 멋졌다.”
클레이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이놈은 그늘이 없어서 좋았다. 좋아서 축구를 했고, 지금 선발로 뛰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한 얼굴.
이어서 경기를 함께 뛴 선수들, 그리고 서브로 있던 선수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라운드에서도 나누었던 인사였지만, 지금은 온전히 선수들끼리만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조금은 다르다.
샤워를 마친 정지우가 게이트로 나왔을 때, 아직 많은 홈팀 관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Ji! Ji!”
그리고 바리게이트에 매달린 빌이 간절하게 정지우를 불러 댔다. 주변 사람들에게 친분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눈치가 역력해서 정지우는 가장 먼저 빌에게 다가갔다.
“위험해.”
게이트 밖으로 나선 정지우는 가장 먼저 자세를 낮추고 빌과 주먹을 마주친 인사를 나눴다.
애늙은이 같던 빌도 이럴 때는 그냥 어린아이다. 정지우가 수많은 사인지를 뒤로한 채, 누구보다 먼저 자신과 인사를 나눠 주는 것에 감동한 낯빛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
“Ji, 오늘 굉장했어.”
몸을 일으킨 정지우는 빌의 아버지 토미와 손을 맞잡고 어깨를 부딪쳤고, 이어서 빌의 엄마인 샌디와 가볍게 허그를 나누었다.
“오늘은 저녁 약속이 있어서 함께 가기 어렵겠어요.”
“이런 환상적인 경기를 선물로 받았는데 더 욕심을 부릴 수야 있나?”
토미가 고개를 끄덕인 직후였다.
“미스터 어메이징, 사진 찍을 수 있어요?”
동그란 안경을 낀 조그마한 아이가 정지우에게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물론이지.”
정지우는 아이의 뒤로 움직여 자세를 낮췄다.
전화기를 꺼내서 사진을 찍어 주는 아버지는 분명 빌의 아버지와 비슷한 노동자로 보였다.
그는 오늘 이 아들을 위해 입장료를 지불했을 거고, 또 사진 찍고 싶어 하는 아들을 위해 긴 시간을 게이트에서 기다렸을 거다.
혹시 정지우가 외면하면 어떡하지? 아들이 사진은커녕, 사인도 못 받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을 안고 말이다.
“이름이 뭐니?”
아이가 아빠를 힐끔 본 다음 ‘알렉이요. 알렉 샌더슨.’이라고 답을 했다.
“알렉, 응원해 줘서 정말 고마워. 알렉 덕분에 오늘 경기 멋지게 할 수 있었어.”
자세를 낮춘 상태에서 눈을 빤히 바라보고 한 인사였다.
어린아이의 눈에 담긴 자부심과 기쁨을 누군가에게 보여 줄 수 있었으면 싶었다.
몸을 일으킨 정지우에게 알렉의 아버지가 다가왔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Ji.”
“천만에요. 알렉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정지우의 손을 꽉 잡아 준 남자가 흥분된 얼굴로, 역시나 아직 흥분을 감추지 못한 아들을 안아 들었다.
이어서 사인과 사진을 찍어 주느라 30분쯤을 더 보냈다.
나직하게 숨을 돌리고 돌아선 정지우는 멀찍이서 기다리고 있던 주성호를 향해 움직였다.
“보기 좋다.”
정지우는 그냥 웃어 주기만 했다.
“저녁은 어디로 갈까? 차는?”
“차는 없구요. 사실 아는 식당도 별로 없어요. 거의 집과 훈련장만 오가서요.”
“그래? 그럼 어쩐다?”
주성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형, 그러지 말고 그냥 우리 집에 가서 식사하죠. 즉석밥에 마른반찬 몇 가지 있는데 그게 낫지 않겠어요?”
“그래?”
주성호가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로 정지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 관중들이 버스정류장에 잔뜩 있어서 정지우는 주성호와 함께 택시를 타고 집으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