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5화 (25/262)

제9장. 시작입니다 (4)

포츠머스는 골대를 직접 노리지 않았다.

골대 앞에 선수들이 뒤엉켜 자리싸움을 하는 사이, 공은 왼편에서 기다리던 8번 마이클에게 넘어갔다.

코너킥보다 유리한 위치다.

카알이 달려드는 것을 본 포츠머스의 8번 마이클은 발바닥을 이용해 공을 앞으로 굴렸다.

데이빗이 달려드는 포츠머스 선수들을 몸으로 밀어내며 위치를 지켰고, 클레이와 스웰던이 각자 맡은 스트라이커를 껴안다시피 달라붙었다.

선수들이 뱉어 내는 거친 숨소리, 고함, 땀 냄새, 관중의 함성이 뒤섞인 상황에서 정지우는 앞을 막고 서 있는 포츠머스의 15번 바튼의 등을 밀쳐 냈다.

시야가 가리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바튼이 등으로 밀고 들어오면 몸을 움직일 공간이 없어진다.

퍼엉!

포츠머스의 8번 마이클이 높다랗게 공을 띄웠다.

다른 리그에서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거친 몸싸움이 벌어졌다.

팔과 팔을 끼운 채로 어깨를 누르고, 서로의 상의를 잡아당기며, 서너 걸음을 달려와 런닝점프를 하는데 수비수와의 충돌을 서슴지 않는다.

달려 나가기 애매한 거리였다.

정지우는 자세를 낮추고 공을 노려보았다.

포츠머스의 선수들과 데이빗이 공을 향해 몸을 띄웠다.

틱!

공은 데이빗의 머리를 스치며 날아갔다.

정지우는 바로 몸을 돌려 날아올 공에 대비했다.

서너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공이 묘한 각도로 틀어지는 바람에 모두 헛발질을 한 꼴이 되었다.

“우와- 아!”

뒤로 날아간 공을 잡은 건 포츠머스의 9번 매튜였다.

헤딩 경합을 하느라 몸을 띄운 스웰던이 그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에 선수들이 바글바글했다.

퍼엉!

매튜는 작정한 것처럼 슛을 날렸다.

그러나 공은 라파엘이 걷어 냈다.

외곽으로 날아간 공을 포츠머스의 3번 스티븐이 잡아서 곧바로 골대 앞으로 띄웠다.

휘익! 터엉!

11번 게리가 높게 올라 헤딩을 날렸지만, 위력은 없었다.

정지우는 가볍게 몸을 날려 공을 잡아냈다.

“우!”

한 골이라도 만회하기를 기대했던 포츠머스 응원단이 아쉬운 탄성을 쏟아 낼 때, 레믹이 정지우를 향해 바람 불어 넣는 광고 인형처럼 팔을 휘저었다.

‘대가리에 욕심만 가득 찬 멍청이!’

기회인 건 맞다.

공격에 매달린 포츠머스 선수들 너머에 있으니, 지금 길게 차 주면 분명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지우는 공을 가슴에 꽉 끌어안은 채로 레믹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거리가 제법 돼도 이 정도는 분명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해트트릭 욕심이 나는 거냐?

너 때문에 중앙이 비었고, 그 바람에 다른 팀원들이 수비를 하느라 이 난리를 친 바로 뒤에서?

드리블이 안 통해서 빌빌거리다가 느닷없이 골 맛을 보고 나니까 또 혼자서 다 해낸 듯한 착각에 빠진 모양인데,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데이빗도 보았고, 카알도 보았으며, 클레이, 라파엘, 스웰던, 꼼빠니, 심지어 포츠머스 선수들도 정지우가 레믹을 노려보는 것을 모두 보았다.

정지우는 천천히 골키퍼 에어리어 끝으로 걸어가 라파엘에게 공을 굴려 주었다.

레믹이 불만 가득한 얼굴로 천천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스타플레이어?

정말 좋다.

그런데 그놈이 팀을 하나로 뭉치게 하지 못하면 오히려 상대 공격수만큼이나 독으로 다가온다.

막말로 감독들이 멍청해서 비싼 값에 사 온 공격수를 벤치에 던져두는 게 아닌 거다.

선수 한 명이 평균 11킬로미터 이상을 뛰어야 하는 현대 축구에서, 한 놈이 8킬로미터쯤 뛰며 어슬렁거리면 골키퍼를 제외한 남은 9명이 모두 3킬로미터씩을 더 뛰어야 그걸 만회하게 된다.

그놈이 한 골 넣는 동안, 팀은 세 골이나 네 골의 위험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지우를 믿어서 그런 거라고?

아무리 정지우가 팔 8개 달린 괴물처럼 골대를 지켜도 남은 9명의 맥이 풀리면 더는 이길 수 없는 팀이 돼 버린다.

데이빗과 카알이 라파엘과 공을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바꿔 나가고 있었다.

점유율을 높이는 건 단순히 기록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공을 돌리는 동안, 선수들은 각자 포지션을 지키고 팀을 정비할 여유를 갖게 된다.

툭! 툭! 투욱!

포츠머스가 라인을 올리고 적극적으로 달려들자, 라파엘이 정지우를 향해 공을 차 주었다.

11번 게리가 속도를 믿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투욱!

정지우는 빠르게 스웰던을 향해 공을 돌려주었다.

스웰던은 다시 라파엘에게 패스했고, 공은 또다시 카알에게 넘어갔다.

미드필더를 통해 공격을 개시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중앙으로 선수들이 모였다.

유니온 시티 선수들은 분명하게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정지우가 레믹을 노려본 이후로 서늘하게 가라앉아 버린 분위기는 쉽게 끓어오르지 않았다.

5분쯤 중앙선 부근에서 공방이 있었다.

관중들의 열띤 구호가 운동장을 뜨겁게 달궜지만, 그 후로 소득 없는 공격과 골대를 벗어난 슈팅만 서너 개 나왔을 뿐, 더는 득점도 없었다.

삑! 삑! 삐이익!

심판의 휘슬, 관중들의 함성과 박수.

그렇게 전반전이 2 대 0의 스코어로 끝났다.

통로로 들어서는 입구에서 홈 관중들이 유니온 시티 선수들에게 박수를 쳐 주었다.

특히나 레믹이 통로 앞으로 왔을 때는 가벼운 환호가 터져 나오기까지 했다.

정지우는 말없이 통로로 들어서서 라커룸을 향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5분 정도는 선수끼리 있게 해 준다.

물도 마시고, 젖은 유니폼을 갈아입을 시간인 거다.

정지우가 라커룸으로 들어가 이름이 적힌 라커 앞에 앉았을 때였다.

“Ji!”

레믹이 거친 음성으로 부르며 다가왔다.

정지우는 천천히 일어나 몸을 돌렸다.

서양 놈들은 불만스러운 점이 있다면 거친 대화를 통해서라도 푸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제로 주먹이나 몸싸움이 오가기 전에는 어지간해서 말리지 않는다.

라커룸의 선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정지우는 레믹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내게 불만 있어?”

눈을 치켜뜬 상태에서 레믹이 으르렁거렸다.

“아까 공을 안 줬다고 이러는 거냐?”

“당연하잖아! 그건 분명한 기회였어!”

“그걸 누가 판단하는데?”

“뭐?”

레믹이 다 들으란 듯이 ‘What!’이라고 소리 지른 뒤에 거친 숨을 씩씩거렸다.

“네가 10골을 넣든, 100골을 처넣든, 그건 나하고 상관없어! 나는 내가 한 골을 안 먹는 게 더 중요하니까!”

말을 마친 정지우는 이마가 닿을 정도로 레믹의 얼굴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너에게 공을 급하게 줬다가 골이 안 터지면 그게 곧바로 내게 날아와! 네가 그 앞에서 서성거리는 동안! 알아!”

이걸 확!

몰라서 못하는 놈은 몰라도, 빤히 알면서 제 몫만 찾으려는 놈을 보면 이상하게 참기 어려울 정도로 분통이 터진다.

다들 멍한 얼굴이었지만, 특히나 주전 골키퍼 얀센은 아예 넋이 나간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게 더는 요구하지 마! 네놈이 골을 넣는 건 네놈 능력이고! 내가 골을 막는 건 내 능력이니까! 그리고!”

정지우는 자꾸만 끓어오르는 분통을 누르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말을 잠시 끊었다.

“공을 보내 줄 때마다 모조리 처넣을 자신이 없다면 앞으로 절대로! 다시는! 골대 앞쪽에서 빈둥거리다가 공을 달라고 나를 바라보지 마. 나는 네놈이 공격에 실패할 때마다 골문을 무조건 막아야 하니까. 알았어?”

하마터면 마지막에 정말 주먹을 날려 버릴 뻔했다.

지금까지 설렁설렁 살아서 성격마저 다 없어져 버린 줄 알았는데, 그게 없어진 게 아니라 그냥 눌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20초쯤 노려보던 정지우는 나직하게 숨을 내쉰 후에 라커를 향해 돌아앉았다.

별 병신 같은 게!

사람이 항상 좋은 건 아닌 건데!

라커룸의 분위기는 엉망이었다.

이러면 후반전은 장담하기 어렵다.

정지우는 피식 웃으며 골키퍼 장갑을 만지작거렸다.

언제라고 도와주는 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결국, 또 혼자 싸우면 되는 거다.

마음을 굳힌 정지우가 물을 마시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났을 때, 마틴과 스태프들이 들어섰다.

이미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하는 얼굴이었다.

“전반에 정말 잘해 줬다. 후반에도 계속 잘해 주길 부탁한다. 그리고 수비 라인은 계속 Ji의 지시를 따라 주고.”

그런데도 마틴은 짐짓 모른 척 엉뚱한 소리를 지껄였다.

데이빗과 카알, 스웰던, 얀센처럼 팀에 오래 있었던 선수들이 ‘저 양반이 왜 저러지?’ 하는 눈빛으로 마틴을 보았는데,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아무튼, 숙연한 분위기에서 하프 타임을 보냈다.

띵동! 띵동! 띵동!

후반전을 알리는 벨이 울려서 정지우는 수건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처음부터 너무 잘 풀린다 싶었다.

“라파엘, 클레이, 스웰던. 부탁이 있어.”

통로로 움직이려던 세 사람이 시선을 돌려 정지우를 보았다.

“라인을 있는 대로 내려 줘. 후반에는 아예 공격은 없다고 생각해.”

라파엘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처럼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지우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에 후반전을 앞둔 팀 분위기는 글자 그대로 엉망진창으로 변해 버렸다.

그래도 두 가지쯤 위로가 되는 것도 있었다.

하나는 수비 라인에 대한 마틴 감독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선수들이 대개 레믹의 이기적인 플레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8게임 무실점을 위해서는 한 번쯤 넘어야 할 산이었다.

그리고 이왕 넘어야 할 산이라면 포츠머스처럼 쉬운 상대를 만났을 때 넘는 게 현명한 거였다.

통로에 나섰을 때 레믹이 정지우를 힐끔거렸다.

조용하던 서브 선수, 함께 식사하면서 다섯 골을 넣을 거라고 해 주던 정지우를 생각했다가 조금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통로를 걸어 운동장으로 나서자 관중들이 ‘우와- 아!’ 하며 커다랗게 함성을 질렀다.

정지우는 장갑을 낀 손을 마주치며 골대 앞으로 움직였다.

최선을 다한다.

경기를 응원 나온 유니온 시티의 관중들, 박용근, 유정호, 그리고 나를 위해서!

선수들이 중앙선으로 모이는 것을 보며 정지우는 하늘을 보았다.

- ‘혹시 싸웠니?’

아니요. 그냥 답답한 게 있어서 뭐라고 좀 했어요.

- ‘좀 더 좋은 말로 하지 그랬어?’

그럴 시간이 부족했었어요.

참 오랜만이다.

골대를 지키겠다고 화내고, 소리 지르는 게.

삐이익!

후반전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정지우의 생각을 저 멀리 쫓아냈다.

피식.

정지우는 앞을 노려보며 웃었다.

레믹은 아예 잔디밭에 산책 나온 놈처럼 설렁거리며 걷고 있었다.

정지우의 말이 거슬렸을 거다.

미드필더 진은 눈치를 살피고, 수비수들은 사기가 꺾였다.

후반전에 반은 결정 난다.

이 후반전을 이겨 내지 못하면 8게임 무실점은 아예 없는 거고, 이 후반전을 이겨 내면 8게임 고비의 반쯤 넘는 거다.

“우와- 아!”

함성과 함께 포츠머스의 11번 게리가 공을 달고 달려오고 있었다.

공간이 설렁설렁 비다시피 했다.

여기까지 오는 데 꼬박 6년 걸렸다. 다시 일어서겠다고 마음먹는 데까지 말이다.

‘와! 와 봐! 난 이거 무조건 막아야 할 이유가 있거든.’

정지우는 자세를 낮춘 채로 공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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