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시작입니다 (3)
꼼빠니의 멋진 패스로 환상적인 골이 나왔다.
유니온 시티 관중들이 목청껏 외치는 응원 구호가 얼마나 커다랗게 울리는지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관중석에서 넘쳐 나온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 그라운드로 흘러들어서 선수들을 적셨다.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중년 남자,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 젊은 커플, 나이가 지긋한 노부부.
모든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수들을 향해 그들이 줄 수 있는 모든 열정을 손짓과 몸짓, 그리고 구호를 통해 뿜어 댔다.
관중들이 만들어 낸 열기와 함성은 소름 끼치는 환희로 선수들에게 전달되어 불같은 투지를 끌어낸다.
삐익!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포츠머스가 공을 돌리기 무섭게 유니온 시티의 선수들이 성난 사자들처럼 달려들고 있었다.
주장 데이빗은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꼼빠니에게 패스 위주로 게임을 풀어 가자고 부탁하긴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저렇게 헌신적인 패스를 보내 줄 줄은 정말이지 상상하지 못했다.
이번 시즌, 유니온 시티가 승격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도 승격에 필요한 승점이 고작 4점 남았다는 것은 현재 24개 팀이 뛰는 챔피언십에서 선두를 유지한다는 의미다.
그동안 정말 잘 뛰었다.
멋진 경기도 많았다.
그러나 이번 39라운드 포츠머스전처럼 완벽하게 돌아가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치고 달리는 것이 특징인 포츠머스의 11번 게리가 짜증 섞인 얼굴로 동료들에게 앞쪽을 가리켰다.
공을 좀 더 정확하게 제대로 뿌려 달라는 뜻이다.
저건 다른 뜻도 있다.
게임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발재간이 좋은 7번 아담을 클레이가 꽁꽁 묶었고, 스트라이커 9번 매튜는 스웰던이 아예 졸졸 따라다니는 형국이었다.
클레이야 미니게임에서 레믹을 막아 내며 놀라움을 선사했었지만, 도대체 스웰던은 누가 지시해서 저렇게 상대 스트라이커를 일대일로 졸졸 따라다니고 있을까?
데이빗은 정지우가 말했던 대로 라파엘의 앞쪽에서 자리를 지켰다.
‘중거리 슛만 막아 줘.’
정지우의 부탁이었다.
“와아- 아!”
그때 또다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클레이가 두 번째로 포츠머스의 7번 아담에게서 공을 뺏어 낸 거였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레믹을 바보로 만들더니, 불과 며칠 사이에 포츠머스의 아담을 멍청이로 보이게 한다.
공은 카알이 받았다.
완벽한 역습 찬스였다.
‘지금이다!’
데이빗은 있는 힘껏 앞으로 뛰어나갔다.
카알과는 제법 통하는 사이다.
투욱!
그의 기대대로 카알이 달리는 앞쪽으로 공을 넘겨주었다.
라인을 바싹 올린 포츠머스 선수들이 죽으라고 달려들고 있었다.
투우욱!
데이빗은 바로 옆에서 달려드는 포츠머스 선수들 사이로 공을 길게 찼다.
“우와- 아!”
레믹이 수비수 사이에서 뛰어나와 공을 쫓았다.
골키퍼 정면, 페널티 에어리어 바로 바깥이다.
수비수 하나, 골키퍼가 전부였다.
저 상태라면 무조건 한 명을 제치고……?
레믹이 몸을 좌우로 흔드는가 싶은 직후였다.
퍼엉!
그런데 레믹은 공을 받자마자 또다시 골에 환장한 놈처럼 수비수를 앞에 두고 슛을 날렸다.
물수제비를 뜬 것처럼, 돌이 물 위를 튀어 가는 것처럼, 공은 잔디 위를 튕기며 쭈우욱 뻗어 갔다.
포츠머스의 골키퍼 폴이 급하게 몸을 날렸지만,
철렁!
공은 그의 손 위를 스치고 지나가 골망을 흔들었다.
“이예에에에에!”
“우와- 아!”
레믹이 허공으로 뛰어올라 오른 주먹을 위로 치켜드는 동안, 포츠머스의 골키퍼 폴이 그라운드를 내리치며 수비수들에게 악을 써 댔다.
카메라가 벤치를 비출 때, 마틴은 두세 걸음을 달려가서 허공에 대고 주먹을 쭉 뻗었다.
스크립터가 달려 나왔고, 코치와 스태프들이 얼싸안았으며, 그 뒤로 관중들이 미친 사람들처럼 펄쩍거리며 흥분하고 있었다.
전반 25분 만에 벌써 두 골이다.
이제껏 39게임을 하면서 이런 경우는 종종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완벽하게 상대 팀을 실력으로 압도한 적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다.
마틴은 다시 양팔을 들어 웅변하는 사람처럼 밀어냈다.
그러면서 시선을 골대 쪽으로 돌렸다.
이게 모두 정지우란 동양인 선수가 만든 일이다.
솔직히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시합 전에 부탁했었던 세 가지.
꼼빠니, 스웰던, 그리고 수비 라인의 조절.
지금까지 결과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누가 봐도 감독인 마틴이 팀을 좀 더 발전시킨 모양새여서 다른 말을 하기도 어려웠다.
경기를 재개하기 위해 양 팀 선수들이 중앙선으로 움직이는 동안, 레믹이 첫 골을 넣었을 때처럼 관중석을 향해 뽀빠이 흉내를 내며 양팔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미스터 어메이징!”
홈팀 관중들이 일제히 레믹을 따라 양팔을 치켜들고 ‘미스터 어메이징!’이라는 함성을 질러 댔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에는 두 사람이 살지!”
이어서 유니온 시티의 최고 응원가가 터져 나왔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레드와 블레이트가 사이좋게 지냈지!”
흥분해서, 미칠 듯한 감동을 주체할 길이 없어 터져 나오는 응원가.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레드가 시합에 나가면 블레이트는 항상 이렇게 말했어!”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쿵쿵거리는 장단과 ‘Go, Go’라는 함성에 맞춰 두 손을 앞으로 뻗어 대는 관중들이 마지막에 또다시 ‘우와- 아!’ 하는 함성을 질러 댔다.
토미와 샌디, 빌은 다 함께 구호에 맞춰 두 팔을 연신 뻗었다.
“우와- 아!”
함성이 울려 나오는 순간에 토미는 정지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골이 터질 때마다 그는 양손 검지를 치켜들고 하늘을 바라본다.
‘고마워, 고마워, Ji!’
이런 행복이라니!
쇠를 갈아 내는 공장에 나가고 있으니 무리하면 한두 경기쯤 입장료 살 여유야 있다. 하지만 매주 경기장에 나올 수는 없어서 애초에 그라운드에 나오는 것은 포기하고 살았다.
이 주체할 수 없는 흥분, 삶을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를 털어 내는 듯한 이 후련함.
멋진 플레이, 통쾌한 골을 보았을 때의 희열!
그리고 무엇보다 행복해하는 아내 샌디와 열정을 피워 내는 아들 빌을 바라보는 행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동양인 선수였다.
가까운 곳에 살며 아들 빌과 친하게 지낼 때는 영어라도 배울 욕심인가 싶었다.
브리스톨 시티전에서 정지우의 플레이를 직접 보고 났을 때의 전율을 토미는 절대 잊지 못할 거다.
흔적도 찾기 어려웠던 가슴속 열정에 불을 지피는 플레이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었으니까.
전은주는 또다시 얼굴을 가렸던 손을 입 앞에 모으고 물개 박수를 쳤다.
“여보! 우리 지우!”
이제 골이 들어가면 카메라는 당연하게 정지우를 비춘다.
‘무슨 생각을 하니? 지우야.’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저 보이세요?’ 하는 것처럼, 정지우는 검지를 높이 치켜들고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보, 우리 지우 대단하지?”
“아직 공도 제대로 못 잡았다.”
“이이는! 수비가 단단하니까 그걸 믿고 공격수들이 저렇게 뛸 수 있는 거지.”
박용근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웃고 말았다.
감독 마누라 10년이면 축구공 위에서 무채를 썬다더니.
경기가 다시 시작되어서 박용근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팀을 본 기억이 있었다.
느닷없이 하나로 똘똘 뭉쳐서 갑자기 변한 것처럼 느껴지던 팀.
‘네가 정말 다시 만들어 낸 거냐?’
전국대회에서 정지우가 이끌던 팀의 냄새가 솔솔 풍기는 것 같아서 박용근은 모니터를 노려보는 것처럼 선수들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답답했다. 아쉬웠다.
이런 경기를, 지금 그라운드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을 정지우를, 박용근은 진심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여전히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날뛰고 있어서 포츠머스 선수들은 쉽게 공격을 전개하지 못했다.
가끔 뻥축구처럼 길게 차 주는 패스가 나오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클레이와 스웰던이 공을 받을 두 선수를 집요하게 막아섰고, 그 외에는 라파엘이 완벽하게 차단했다.
삐익.
왼쪽 터치라인으로 공이 굴러 나가자 주심이 손을 들어 포츠머스의 공격임을 알렸다.
중앙선과 코너킥 자리의 딱 중간쯤 되는 곳이었다.
“라파엘!”
정지우는 고함을 지른 뒤, 라인을 좀 더 올리라고 손짓했다.
‘저런 멍청이!’
그동안 수비를 잘 거들던 레믹은 골을 더 넣겠다는 욕심에서인지 중앙선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며 내려오지 않았다.
빈다. 확실히 공간이 비어 있었다.
수비 때는 반드시 내려와야 하는데 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어서 수비 라인을 올렸음에도 중간 자리가 비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휘익!
공은 포츠머스의 7번 아담에게 떨어졌다.
클레이가 바싹 다가선 다음이었다.
쿡!
아담이 팔꿈치로 클레이의 얼굴을 치며 돌아섰다.
“우!”
관중들의 함성이 터졌는데 주심은 휘슬을 불지 않았다.
정지우는 바로 자세를 낮췄다.
승리? 승점?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한 골이라도 먹으면 이 경기는 물론이고 남은 경기 전부 의미가 없어진다.
클레이의 뒤를 파고든 아담이 골대를 향해 공을 낮게 찼다.
선수들이 뒤엉켜서 밀고 밀리는 앞.
정지우는 좀 더 자세를 낮췄다.
보인다! 보이면 막는다!
스웰던에게 막힌 포츠머스의 9번 매튜가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휘익!
포츠머스의 11번 게리가 수비수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후욱! 후욱!
모든 것이 사라진 것처럼 정지우의 시선에는 게리의 하체만 보였다.
콰아악!
그가 오른발로 바닥을 디디는 것, 정지우의 오른쪽 포스트를 향해 선 것까지 모두.
무조건 왼발 슛이다!
왼발 안쪽으로 차면 왼쪽, 왼발 등으로 차면 정면, 재수 없게 바깥쪽에 비켜 맞으면 오른쪽으로 날아온다.
휘이익! 투우욱!
게리가 왼발 안쪽으로 굴러오는 공의 방향을 틀었다.
왼쪽으로 몸을 틀던 정지우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공이 너무 세게 날아와서 게리의 발에 맞는 순간 위로 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회전까지 먹어서 오른쪽으로 휘고 있었다.
막는다! 막을 거다!
이렇게 보이는 건 무조건 막는다!
“끄응!”
정지우는 이를 악물며 기울어지던 몸을 비틀었다.
타악!
걸렸다! 공은 분명하게 정지우의 손에 맞았다.
“우와- 아!”
함성이 들리는 순간, 세상이 제 속도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높게 떠오른 공이 크로스바를 넘어 튀어 나가자, 포츠머스의 게리가 뒤통수를 감싸며 아쉬워했다.
“Good job!”
라파엘과 데이빗이 다가와 손을 마주쳤다.
코너킥이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빨리 잡아야 하는데!
“클레이! 헤이! 헤이!”
정지우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클레이를 커다랗게 부른 다음, 손짓으로 포츠머스의 7번 아담을 가리켰다.
삐익!
코너킥을 차라는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