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3화 (23/262)

제9장. 시작입니다 (1)

피크닉 가방에 샌드위치와 맛있는 포도주를 담아 공원에 나가기 좋을 만큼 화사한 날씨였다.

레드 블레이트에는 경기 시작 2시간 전부터 구름관중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늘의 가장 흔한 응원 세리머니는 번리전에서 레믹이 선보였던 뽀빠이 흉내였다.

관중들은 홈팀인 것을 확인하고 나면 당연한 것처럼 ‘미스터 어메이징!’이라고 외치며, 알통을 자랑하는 것처럼 양팔을 들어 보였다.

둥. 둥. 둥. 둥. 둥.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매표소 앞에서 응원단 한 명이 북을 두드렸고, 그에 맞춰 주변에 있던 이들이 구호를 외쳤다.

비록 5 대 3의 스코어로 지기는 했지만, 화끈한 경기를 선보인 유니온 시티 선수들에 대한 기대감, 홈경기에서도 멋진 골을 터트려 승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광경이었다.

정지우는 라커룸에 앉아서 골키퍼 장갑을 만지작거렸다.

음악을 듣는 놈, 다리를 길게 펴고 앉아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놈, 기도하는 놈들 속에서 박용근을 떠올렸다.

‘감독님, 시작입니다.’

정지우가 기도처럼 혼잣말을 떠올렸을 때였다.

“설마 미스터 어메이징이 긴장한 건 아니지?”

라커룸의 분위기를 밝게 하려는 의도인 것처럼 주장 데이빗이 농담을 던져 왔다.

정지우는 웃음으로 답을 했다.

“기분은 어때?”

“좋아.”

“예상은 아직 바뀌지 않았고?”

“그렇지.”

대화를 알아들은 레믹과 카알, 라파엘, 클레이가 정지우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띵동! 띵동! 띵동!

그때 게임을 알리는 신호가 들려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커룸을 나가면 통로가 있고, 그곳에서 상대 선수들과 함께 선다.

아는 얼굴끼리는 악수나 간단한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는데, 몇몇은 실제로도 인사를 나누었다.

정지우는 장갑을 낀 손을 마주치며 긴장을 털어 냈다.

하여간 그놈의 두 게임이 준 임팩트가 크긴 컸던 모양인지 포츠머스 선수들마저 정지우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에스코트를 할 아이들이 들어서서 선수들 옆에 섰다.

이런 작은 이벤트가 이 아이들에게는 평생 축구를 함께할 이유가 되기도 할 거다.

정지우는 옆에 선 아이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북소리, 발 구르는 소리, 요란한 함성이 들려오는 가운데 선수들이 통로를 걸어 나갔다.

“우와- 아!”

다 같이 중앙 관중석을 향해 섰고, 간단한 행사를 마친 다음 선공을 정했다.

데이빗은 평소처럼 코인의 앞면을 선택했는데, 오늘은 운이 좋았는지 우선 선택의 기회를 가졌다.

데이빗의 시선을 받은 정지우는 해가 등 뒤에 있는 골대를 가리켰다.

전반전과 하프 타임이 끝나는 한 시간 뒤면 어느 쪽이든 햇볕의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지금은 해를 등지는 것이 좋았다.

홈팀인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움직여 포츠머스 선수들과 악수를 나눴다.

“Good luck!”

이럴 때면 대개 행운을 빌어 준다.

물론 소속 팀이 승리하길 바라는 마음이니까 이건 정말 인사치레에 불과한 거다.

악수를 마친 정지우는 빠르게 골대를 향해 움직였다.

선수들끼리 둥글게 서서 다짐을 주고받을 때도 있는데, 국가대항전이나 혹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경기가 아닌 다음에야 통상적인 리그 경기에서 그런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정지우는 골대의 왼쪽 기둥에서 오른쪽 기둥까지 천천히 움직였다.

시작이다.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홈 관중들의 응원이 커다랗게 울리는 가운데 시작하는 경기.

늘 훈련하던 익숙한 경기장인데도 오늘처럼 관중이 가득 들어차는 날이면 잔디 하나까지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 같다.

중앙선에 선수들이 모인 것을 보며 정지우는 그라운드 위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8게임 중 첫 게임.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관중들이 발로 내는 소리에 맞춰 심장이 쿵쿵대는 느낌이었다.

“후우!”

숨을 털어 낸 정지우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라파엘과 시선을 교환했고, 클레이를 살폈으며, 스웰던의 위치를 확인했다.

삑! 삑! 삐익!

“우와- 아!”

경기가 시작되었다.

선공을 한 포츠머스는 곧바로 공을 뒤로 돌렸다.

천천히, 여유 있게.

서로가 잘 아는 팀이다.

그러니 시작과 동시에 펼치는 기습 따위 잘 안 먹히는 팀이기도 했다.

마틴은 벤치에 앉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라운드를 살폈다.

정신 나간 계약을 알게 되면서, 어처구니없게도 그 한쪽에 발을 깊숙이 담그고 말았다.

포츠머스가 앞으로 나서려다가 다시 뒤로 공을 돌릴 때 마틴은 힐끔 정지우를 살폈다.

아스널전에서 데이빗과 카알을 앞으로 내보낸 장본인, 브리스톨전의 악착같은 승리의 주역.

투우욱!

그때 포츠머스가 왼쪽으로 공을 길게 넘겼다.

포츠머스의 11번 게리가 빠르게 유니온 시티의 왼편을 파고들었다.

아직 숨이 뚫리지 않았을 시간인데 놀라운 속도였다.

그러나 유니온 시티의 수비 역시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틴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뺀질이 레믹이 중앙선 너머까지 달려와 수비에 가담하고 있었다.

‘또 무슨 마법을 쓴 거냐?’

마틴은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어차피 프리미어리그에 올라가도 서너 게임 성적이 안 좋으면 쥬피터는 바로 감독을 교체할 사람이다.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레믹을 보며 마틴은 자신이 그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지우란 마법사에 걸려 버린 인생이라는 것이 말이다.

유니온 시티의 등번호 5번의 센터백 라파엘은 클레이와 스웰던을 양끝에 세운 채 수비 라인을 조절했다. 이렇게 하면 포츠머스는 일단 센터링이 가장 좋은 공격이 된다.

그러나 뜻밖에도 클레이가 포츠머스의 아담에게 바짝 붙어서 센터링을 못하게 잘 막아 주었고, 뒤편에서는 스웰던이 공을 가지고 있지 않은 매튜를 악착같이 따라다니고 있어서 센터링도 쉽지 않았다.

클레이야 정지우에게 헬렐레 하는 놈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스웰던이 그의 지시에 따르는 건 좀 이상했다.

브리스톨 시티전에서 퇴장당했던 것이 미안해서?

아니면 주장 데이빗이 언질을?

하여간 모처럼 손발이, 아니 발이 척척 맞는 경기를 펼치다 보니 라파엘은 작은 흥분마저 느꼈다.

포츠머스는 왼쪽에 몰려서 쉽사리 공격 루트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터치라인을 나간 공을 잡은 포츠머스 선수가 바로 앞에 있는 7번 아담에게 던져 주었다.

투욱.

아담이 다시 드로인한 선수에게 패스했고, 공은 11번 게리에게 넘어갔다가 마지막에 또다시 7번 아담에게 넘어왔다.

그때였다.

아담이 공을 흘리며 돌아서는 순간,

“우와-!”

클레이가 기가 막히게 공을 빼냈다.

“Hey!”

앞에 있던 유니온 시티의 6번 꼼빠니가 공을 받아서 카알에게 길게 넘겨주었다.

“와- 아!”

레믹이 미친놈처럼 앞으로 달려가는 참이다.

카알이 그의 앞으로 공을 차 주는 순간,

퍼어엉!

레믹은 골을 넣고 싶어 환장한 놈처럼 곧바로 슛을 날렸다.

“우!”

공은 멋지게 날아갔다.

응원석을 향해.

관중들이 아쉬움의 탄성을 쏟아 냈고, 레믹은 머리를 감싸며 인상을 찌푸렸다.

좀 더 달려가지!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만큼 급하게 날린 슈팅이었다.

박용근과 전은주는 역시나 이어셋을 귀에 걸고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지? 유니온이 뭐가 달라진 거지?”

“왜? 왜, 여보?”

“그게 아니라 팀 색깔이 지난번하고 조금 달라진 거 같아서.”

그래도 국가 대표까지 지냈던 박용근이다.

감독 생활도 나름 했고, 청소년 대표 팀 감독 발령까지 받았던 인물인 거다.

“팀이 더 단단해졌는데?”

“그래?”

대꾸를 한 전은주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15분이 훌쩍 지나갔다.

그동안 레믹이 날린 슛이 유니온 시티의 유일한 슛이었고, 포츠머스는 아직 기회를 얻지 못했다.

삐익!

오프사이드 반칙에 걸린 포츠머스의 7번 아담이 선심에게 억울하다는 투로 양팔을 들어 손바닥을 벌려 보였다.

팽팽하고 박진감 넘치는 경기였다.

중앙선 부근에서 누구든 공만 잡으면 선수 서넛이 단박에 달려들고 있어서 골이 나오지 않았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홈팀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이 펼쳐지는 레드 블레이트.

전반 15분 동안 정지우는 아직 한 번도 공을 제대로 잡아 보지 못했다.

그만큼 양 팀의 공격이 제대로 풀리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중앙선 부근에서 공을 두 번이나 뺏기고 다시 빼앗은 후였다.

툭, 툭, 투욱!

미드필드 중간에서 카알이 터치라인 쪽으로 공을 흘려주었다.

“우와- 아!”

레믹이다.

그가 공을 쫓아 빠르게 달려가자 관중석에서 커다랗게 함성이 터져 나왔다.

투욱!

레믹은 카알에게 공을 패스하고 골대를 향해 뛰어들었다.

투욱!

그런데 카알은 반대편에서 달려드는 꼼빠니를 향해 공을 밀어 주었다.

“슛을 해! 슛!”

마틴과 관중들이 똑같은 고함을 지를 만큼 완벽한 찬스!

투욱!

그런데 달려들던 꼼빠니가 공을 흘렸다.

골대 앞까지 달려온 레믹의 앞으로!

“뭐야?”

마틴이 벌떡 일어선 순간에,

퍼엉!

레믹이 멋지게 슛을 날렸다.

철렁!

“이예에에에!”

워낙 가까운 거리였고, 제비가 나는 것처럼 낮게 날아갔기 때문에 포츠머스의 골키퍼 폴이 발만 겨우 뻗을 정도였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나온 선제골이었다.

레믹은 방송 카메라가 몰려 있는 코너로 달려가 관중석을 향해 뽀빠이처럼 두 팔을 들어 보였다.

“굉장하네.”

박용근은 감탄사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전 게임에서 혼자 공을 몰고 설치던 레믹이 패스를 주고받으며 전혀 다른 선수로 성장한 거다.

거기에 마치 잘게 잘라 들어가는 것처럼 연결된 패스는 또 어떻고?

어떻게 팀이 이렇게까지 빠르게 변할 수 있을까?

골키퍼를 응원한다는 것이 그렇다.

상대 팀이 공격을 안 하면 도통 얼굴 볼 기회가 없다.

그런데 레믹을 끌어안고 축하해 주는 선수들을 비추던 카메라가 느닷없이 정지우를 잡았다.

멋지다!

양손 검지를 치켜세운 채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정지우의 모습이!

“여보! 지우야! 우리 지우!”

전은주는 골이 터졌을 때보다 훨씬 더 기쁜 얼굴로 입 앞에서 물개 박수를 쳐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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