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2화 (22/262)

제8장. 거래하겠나? (3)

“여보! 여기!”

“비켜.”

박용근은 전은주가 손질을 마친 화환을 밖에 서 있는 1톤 트럭으로 들고 갔다.

둘이서 함께 출근하고, 함께 도시락 먹고, 저녁에 함께 퇴근한다.

행복하냐고?

누가 그렇게 물으면 전은주는 바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일 거다.

남편이 실직한 꼴인데?

그것도 감독직에서 쫓겨나면서?

자꾸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들에게 확 꽃꽂이 가위라도 들이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은주는 아무리 부릅떠도 선하게만 보이는 눈으로 손을 털며 들어서는 박용근을 보았다.

“힘들지?”

“이 사람이, 사람을 뭐로 보고.”

박용근이 빗자루를 들었다.

“왜 그래? 그거 내 일이야.”

“그런 게 어딨어? 당신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 줄 몰랐다.”

바닥에 널린 꽃잎들을 쓸어 대며 박용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감독직을 빼앗긴 것과는 별개로 오늘 그는 행복해 보였다.

입가에 걸린 작은 웃음이 알려 주는 것처럼.

실직했는데 뭐가……?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다.

유정호가 찾아와 전해 준 말을 들은 뒤부터 두 사람이 느끼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할 말 없는 거다.

6년이다, 6년!

검은 머리 짐승이 어쩌니, 이용당했다느니, 뒤통수 맞았다느니 하는 소릴 들으며 산 기간이.

그래도 박용근과 전은주만은 정지우가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 믿으며 살았다. 어쩔 수 없는 형편도 알고 있었고.

간혹 머리통 위로 뿔이 뾰족뾰족 난 악마가 삼지창을 들고 귀에 붙어서 ‘사실은 지우가 좀 원망스러운 짓을 하긴 한 거잖아?’라고 꼬드길라치면 거칠게 고개를 젓곤 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지우가 박용근과 전은주를 잊지 않았다는 것을 전해 들었을 때의 고마움이라니!

TV로 본 그 활약을 해 놓고, 그것도 6년 만에, 그런 정지우가 사죄가 먼저라며 계약도 포기한 채 고집을 피운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전은주는 결국 눈물을 훔쳤다.

<지우야.>

정지우에게 편지를 쓸 때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됐다.

이제 더 뭘 바랄 게 있겠냐?

피 섞이지 않았지만, 아들이라고 생각하며 함께 지냈던 정지우가 다시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해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당신 왜 그래? 밖에 뭐 있어?”

멍하니 있는 전은주를 박용근이 불렀다.

까맣게 탄 얼굴, 쭉 찢어진 눈.

작은 눈에 빠지면 커다랗고 쌍꺼풀 짙은 눈은 징그럽게 보인다는 거 혹시 알까 모르겠다.

“여보? 우리 저녁에 삼삼이네 들러서 소주 한잔할까?”

“싫다.”

“왜?”

박용근은 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밖으로 나섰다.

“왜? 왜 싫은 건데?”

인간이 치사하게 그거 한 번 업어 준 거 가지고.

유정호가 본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다른 사람도 아닌 마누라 업어 준 건데.

전은주는 물을 데우기 위해 포트의 코드를 벽에 꽂았다.

점심 먹을 시간이었다.

***

목요일은 우중충한 날씨였다.

총 24팀이 홈 앤드 어웨이로 팀당 46경기를 하는 챔피언십 일정이 8게임 남은 날.

토요일에 포츠머스 FC와 리그 홈경기, 이어서 화요일에 FA컵 16강전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일정이 빡빡했다.

훈련이 끝난 뒤에 포츠머스 FC전의 선발 명단을 본 정지우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지우가 골키퍼 선발이었다.

이렇다는 건 유정호가 쥬피터 회장과 모종의 계약을 체결했다는 말도 된다. 물론 정지우의 사인이 남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요식적인 행위니까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다.

“헤이!”

아무것도 모르는 레믹이 날리는 되지도 않는 윙크를 보며 정지우가 웃어 주었을 때였다.

“Ji, 나 기회를 잡았어.”

클레이가 들뜬 얼굴로 다가왔다.

“제대로 해 볼게.”

이런 놈들은 어딘가 귀엽다.

칭찬받으면 좋아하는 단순하고 우직한 영국 남자.

“침착하게만 해. 넌 재능 있다.”

“고마워, Ji.”

서브로 뛰다가 선발이 되었다는 것은 일종의 기회와 같다.

멋진 활약을 통해 지닌 능력을 입증할 기회 말이다.

“저녁 식사 어때?”

클레이의 질문을 어떻게 할까 할 때 라파엘과 레믹, 그리고 카알이 다가왔다.

“Ji! 오늘도 약속 있어?”

그러고는 역시나 저녁을 함께 먹자는 제안을 건넸다.

“어디로 갈 건데?”

“어? 시간이 되는 모양이지? 우리 공평하게 이탈리아 음식 어때?”

“좋아.”

정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는데 누구보다 클레이가 가장 환하고 밝게 웃었다.

저녁 식사는 유쾌했다.

정지우의 과거에 대해 궁금한 눈치였지만, 그런 걸 대놓고 질문하는 놈도 없었고 정지우도 떠들어 대지 않았다.

적당히 먹은 뒤에 다들 맥주나 와인을 앞에 두었을 때였다.

“자! Ji의 선발을 위해!”

데이빗이 맥주잔을 내밀어서 다 같이 잔을 부딪쳤고, 주량껏 마셨다.

격식을 차리는 식당이 아니어서 조금은 소란스러웠는데, 그런 속에서 흔하디흔한 잡담을 주고받았다.

한국에 대해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을 묻던 주장 데이빗이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정지우를 보았다.

“포츠머스와의 예상 스코어는?”

“5 대 0.”

테이블에 앉았던 선수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농담한 거지?”

“진담이야. 내기할까?”

“오! 오호호호!”

서양 놈 특유의 과장된 몸짓과 웃음을 보인 데이빗이 테이블 주변을 둘러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수비진을 올려. 라파엘이 5번(센터백, 중앙 수비수)이니까 내 신호에 따라 오프사이드 라인만 조절해 줘. 클레이가 저쪽 7번 아담, 스웰던이 9번 매튜를 맡아 주고, 수비 시에는 주장이 라파엘과 함께 중앙을 지켜 주면 돼.”

“수비야 그렇다 치고, 다섯 골은?”

데이빗이 진지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주변의 소음이 좀 더 크게 들려왔는데, 모두 정지우의 다음 말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라인을 올린 상태에서 카알이 꼼빠니와 함께 번리 때처럼 레믹에게 공만 넘겨주면 돼.”

선수들의 시선이 레믹에게 쏠렸다가 돌아왔다.

“대신 레믹과 카알, 꼼빠니, 세 사람은 무조건 미드필더에서 압박에 가담해 줘야지.”

데이빗이 숨을 토해 내며 상체를 들었다.

“Ji! 나는 번리전 때처럼 하면 되냐?”

그때 레믹의 질문이 날아왔다. 골을 많이 넣고 싶다는 욕심을 감추지 못한 얼굴이었다.

“레믹! 저쪽 골키퍼 폴은 공중볼에 약하다. 게임 시작과 동시에 기회가 닿았다 싶으면 조금 멀더라도 무조건 슛을 갈겨. 그러다 수비수가 달려 나온다 싶을 때 카알과 원투패스로 저쪽 오프사이드를 뚫어. 그러면…….”

레믹이 다음 말을 기대하며 마른침을 삼킨 직후였다.

“넌 분명 다섯 골 이상 넣는다.”

“우-!”

선수들 사이에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거냐?”

데이빗이 확인하고 싶은 것처럼 다시 물었다.

“난 두 게임밖에 못 뛰었으니까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걱정하지 마. 너는 미스터 어메이징이잖아!”

레믹이 다섯 골에 혼을 팔린 표정으로 빠르게 정지우를 받치고 나섰다.

피식.

정지우는 레믹을 향해 웃어 주고 다시 입을 열었다.

“라인을 올리면 올린 만큼 우리에게 승산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

“그렇긴 하지.”

“그 상태에서 세 골을 먼저 넣으면?”

“그거야…….”

저쪽 팀이 무너질 거라는 건 누구나 예상이 가능한 일이다.

“그때 라인을 내려. 그러면 포츠머스가 라인을 올린 사이로 레믹이 두 골 이상 더 넣을 수 있어.”

레믹만 만족한 얼굴이고, 다들 고개를 저어 댔다.

“라인을 올렸다가 골을 먼저 먹으면……. 물론 너를 무시하려는 건 아니다.”

정지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내기에서 지는 거지.”

이게 뭔 소리야?

다들 의아한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거칠다는 챔피언십에서 뛰고 있는 프로 선수다.

솔직히 두 게임에서 보여 준 임팩트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그나마 어느 정도 말이 먹힌 거지, 어설프게 이런 말을 했다면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았을 내용이었다.

이후로 30분쯤 더 질문과 답이 오가고 자리가 끝났다.

헤어질 때 다들 ‘너는 정체가 뭐냐?’ 하는 얼굴이었다.

아! 레믹은 아니다. 놈만큼은 ‘제발 네 말대로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표정이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유정호는 계약서 봉투를 식탁에 올려 둔 채 심각한 얼굴로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저녁은?”

“돼지 불고기 다 떨어졌다.”

그 와중에 무지하게 먹었다는 말을 저렇게 돌려서 할 줄은 몰랐다.

“계약했다.”

“선발된 거 보고 알았어. 그래서 동료들하고 저녁 먹고 오는 길이야.”

유정호가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너 정말 잘해야 한다.”

“형.”

유정호는 시선만 주었다.

“최선을 다할게. 혹시 내가 골을 먹더라도 내가 최선을 다했을 거라는 것만은 의심하지 마.”

“그걸 내가 왜 의심해?”

유정호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난 내일 런던으로 간다.”

“그래.”

식탁에 앉은 정지우를 유정호가 빤히 바라보았다.

“왜?”

“넌 겁 안 나냐?”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전국대회 우승이 확정된 직후에 감격해하던 박용근의 모습이 떠올랐다.

“형이 최선을 다해 만들어 준 기회니까 절대 쉽게 놓치지 않을게.”

“차아식, 고맙다.”

별 이야기 아닌데도 유정호는 위안이 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네가 정말 재능 있는 선수긴 한가 보다? 달랑 두 게임 만에 마틴 감독까지 저렇게 나선 걸 보면.”

“글쎄?”

“부럽다. 내게 그런 재능이 있었다면…….”

유정호가 말끝을 흐렸다.

돈 없고, 연줄 없는 선수에게 어설픈 재능은 저주가 될 수 있음을 유정호도, 정지우도 잘 알고 있어서였다.

금요일 오전에 유정호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집을 떠났고, 오후에 자칭 친구인 빌이 오랜만에 방문했다.

빌은 거실에 밴 반찬 냄새가 궁금한 얼굴이었다.

정지우는 모처럼 직접 냉장고를 열어서 우유를 따라 주었다.

공연히 빌이 김치 냄새에 유난 떠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한국 음식이야?”

“응.”

“이런 냄새가 계속 나?”

우유를 받은 빌이 냉장고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비슷하지. 왜?”

“Ji의 나라 음식이 어떤 건지 궁금했었거든.”

하여간 이 녀석은 이상하게 애늙은이 같은 느낌이다.

“잠시만.”

정지우는 안쪽으로 들어가 운동 가방 옆에 꽂아 두었던 봉투를 들고 나왔다.

두 손으로 잔을 든 빌이 또다시 궁금한 얼굴로 정지우를 보았다.

“빌, 우리 남은 8경기 초대권 모두 넣었어.”

빌이 멈칫하면서 봉투와 정지우를 번갈아 보았다.

“석 장씩 넣었으니까 시간 되면 언제고 와. 혹시 못 오게 되면…….”

“갈 수 있어! 아빠도 엄마도 모두 다!”

우유 잔을 내려놓은 빌이 건네받은 봉투를 열어 안에 있는 초대권을 꺼내 들었다.

“Ji! 이런 선물을……. 난 Ji에게 줄 게 없는데.”

“빌은 내 친구니까.”

정지우가 내민 주먹을 빌이 멍하니 보았다.

“우리 친구 아니었어?”

정지우가 주먹을 좀 더 앞으로 내민 다음이었다.

툭!

빌이 감동한 얼굴로 제 주먹을 뻗어 정지우의 주먹에 가져다 댔다.

빌이 돌아가고 정지우는 모처럼 한적하게 탁자에 앉았다.

깔끔하게 정리한 아파트에는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유정호의 빈자리가 짙게 깔려 있었다.

지난 6년 동안 향수병과 외로움을 상대했던 경험이 그나마 정지우에게 위로가 되는 금요일 밤.

노트를 펼친 정지우는 포츠머스 FC 선수들을 천천히 살폈다.

다 아는 이야기겠지만, 선수들의 등 번호는 골대에서 시작한 1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거라고 보면 대강 맞는다.

당연하게 주전 골키퍼가 1번을 차지하고, 2번과 3번은 수비수, 이런 식으로 올라간다.

유니온 시티만 해도 얀센이 등 번호 1번, 서브 골키퍼인 정지우는 13번이다.

포츠머스의 골키퍼는 등번호 1번 폴.

그 외에 정지우가 눈여겨봐야 할 선수는 역시 포츠머스의 스트라이커인 등번호 7번의 아담과 9번 매튜, 그리고 미드필더 11번 게리였다.

전통적으로 힘의 축구를 구사하는 포츠머스는 7번 아담과 9번 매튜가 주득점원이었는데, 두 놈 모두 강력한 중거리 슛을 무기로 뛴다.

한 시간쯤 정리해 놓았던 노트를 들여다보며 포츠머스 선수들의 슛 동작을 떠올리던 정지우가 상체를 세우고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늘 이방인이었던 영국, 이곳에서 새로운 걸음을 내디디려는 순간이다.

유정호에게는 표시 내지 않았다.

그러나 정지우도 덤덤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본능적인 움직임이라는 게 원한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안 나온다고 해서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닌 거다.

최선을 다한다.

정지우를 도와주고 감싸주었다는 죄로 축구를 빼앗긴 박용근과 일본 이적을 성사시켰다는 이유로 미움을 산 유정호를 위해서,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축구 인생을 위해서.

정지우는 전은주를 떠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많이 변했을까?

잠시 그리운 사람을 떠올렸던 정지우는 평소처럼 경기를 떠올렸다.

무실점을 목표로 한 포츠머스 FC와의 경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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