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9화 (19/262)

제7장. 우리 미친 짓 한번 할래? (3)

토요일 오후 3시.

번리와의 경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난타전이었다.

후반 10분을 남겨 놓은 시점에서 스코어는 3 대 3.

번리가 선제골을 넣어서 0 대 1, 유니온 시티의 레믹이 두 골을 내리 넣은 덕분에 스코어는 2 대 1이 되었고, 다시 번리가 두 골을 넣어 2 대 3, 그때 마지막으로 레믹이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동점 골을 넣었다.

마지막에 레믹이 넣은 골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사이드라인을 따라 달리던 레믹이 공을 받자마자 바로 치고 달렸다.

당연하게 번리의 수비수가 달려들었는데 레믹은 평소와 전혀 다르게 카알에게 공을 넘겨주었다.

여기서 이미 한 번 패스를 한 상태다.

툭.

카알이 공을 받자마자 레믹에게 패스해 준 순간, 모두가 그의 드리블을 기대했다.

심지어 중거리 슛을 갈겨도 괜찮을 자리였다.

그때였다.

투욱.

레믹은 또다시 카알에게 공을 패스했다.

“뭐야!”

마틴이 벌떡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카알이 두 번째로 레믹의 앞으로 공을 흘려주었다.

수비진은 물론이고, 관중들과 심지어 마틴의 넋을 홀릴 만큼 멋진 장면이었다.

퍼엉!

공을 받은 레믹은 그대로 골대 왼편 구석으로 꽂아 넣었다.

“이예에에에!”

동점골, 그것도 해트트릭이다.

허공으로 뛰어올라 하늘을 향해 오른 주먹을 치켜들었던 레믹이 거짓말처럼 벤치로 달려왔다.

“Hey! Mr. AmaJing!”

그러고는 정지우를 향해 뽀빠이처럼 양팔을 쳐들었다.

양손 엄지와 검지, 중지를 펴서 해트트릭을 표시하면서 말이다.

피식!

정지우가 웃는 모습이 화면에 고스란히 잡혔다.

뒤늦게 달려온 동료들이 레믹을 에워싸고 머리를 두들기거나 이마를 가져다 댔다.

웃긴다.

주장 데이빗이 정지우를 검지로 가리키면서 몸을 돌렸고, 라파엘과 도움을 기록한 카알이 또한 엄지를 치켜세우고 돌아서는 것이.

정지우는 그때마다 비슷하게 웃었다.

다시 경기가 시작되고, 두 팀은 여전히 팽팽했다.

필요한 승점은 4점이고, 경기는 10분 남았다.

최악의 순간에는 승점 1점이 부족해 프리미어리그로 못 갈 수도 있는 거다. 그러니 동점 상황인 번리와의 경기에서 1점을 지키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브리스톨 시티가 고만고만한 승점으로 따라오고, 그 뒤를 네 팀이 악착같이 밀고 올라오는 상황이었다.

유니온 시티는 우선 비기는 것을 전제로 게임을 진행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마틴은 뒤통수로 눈이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정지우를 내보내면 승점 1점은 무조건 확보할 것만 같았다.

그가 철벽같이 골문을 지켜 주는 상황에서 펄펄 날고 있는 레믹이 한 번 더 활약해 준다면?

단박에 승점 3점을 확보하게 되고, 남은 승점은 1점이 된다.

그것도 8경기나 남은 상황에서.

내보내고 싶다. 진심으로.

“우와- 아!”

그때 마틴의 간절한 바람을 모르는 것처럼 번리의 공격수가 유니온 시티의 페널티 에어리어를 파고들었다.

벌떡!

마틴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퍼엉!

번리의 공격수가 날린 슛을 얀센이 멋지게 막아 냈다.

“우!”

그러나,

툭!

굴러 나온 공을 번리의 공격수가 재차 밀어 넣어 버렸다.

“우와- 아!”

번리의 홈구장인 터프 무어다.

이 경기를 이긴 것으로 번리 역시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엿볼 기회를 얻는 터라, 홈 관중들이 미친 사람들처럼 열광하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3분이었다.

양 팀 선수들이 다시 중앙선에 섰고, 데이빗이 공을 건드리며 경기가 시작되었다.

“데이빗! 헤이!”

마틴은 손바닥을 세워 번리 진영으로 밀어 댔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시간은 밀어붙이는 것 말고는 없다.

수비를 최대한 끌어 올려 미드필드에서부터 강한 압박을 펼치고, 그걸 통해 한 골을 잡아낸다.

확실히 유니온 시티 선수들은 전과 달랐다.

마지막까지 버티는 힘이 강해진 거다.

쉴 새 없이 중앙선 부근에서 뺏고 뺏기는 접전이 벌어졌다.

이 기회를 한 번만 살린다면!

“우와- 아!”

그러나 현실은 바람과 달랐다.

번리의 중앙 미드필더가 유니온 수비수 사이로 기다랗게 차 준 공을 번리의 공격수가 멋지게 받아서 달렸다.

수비를 있는 대로 끌어 올린 상황이었다.

얀센이 뛰어나오는 것을 본 번리의 공격수가 공을 툭 띄워 올렸다.

몸을 던진 얀센이 허공으로 팔을 휘저었지만, 공은 훨씬 더 위를 지나 골대를 향해 굴러갔다.

“우와- 아!”

단박에 스코어는 5 대 3이 되었고,

삐익! 삐이익! 삑!

경기는 그렇게 끝났다.

레드 블레이트의 사무실로 돌아온 마틴은 지친 몸을 책상 앞의 의자에 걸쳤다.

미칠 노릇이다.

1점의 승점이라도 확보했어야 하는 경기를 이렇게 날려 버린 것은.

내일 신문에 교체 타이밍이 늦었다느니, 번리의 전술에 밀렸다느니 하는 비난 기사가 일제히 올라올 게 분명했다.

‘Ji를 투입했어야 했어.’

어차피 유니온 시티가 가지기엔 너무 큰 선수다.

이럴 바엔 프리미어리그 승격이라도 얻을 수 있도록 남은 경기에 써먹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마틴은 ‘털썩’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오늘 경기를 떠올렸다.

레믹은 또 언제 저렇게 변한 걸까?

브리스톨 시티와의 경기에서는 카알이 창의적인 패스를 선보여서 놀라게 하더니, 오늘은 레믹이 원투패스로 사람의 혼을 빼놓았다.

그것도 그렇지만, 해트트릭을 달성한 그 뺀질이가 도대체 왜 정지우에게 달려와 뽀빠이 흉내를 내 가며 설친 거지?

어쩐지 마틴도 모르게 팀이 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모든 게 고작 두 게임 선발로 나선 정지우 때문인 거다.

마틴은 입맛을 다시며 상체를 일으켰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푹 자고 일어나면 좀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게 분명했다.

똑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마틴이 문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들어선 이는 뜻밖에도 쥬피터 회장이었다.

“갑자기 방문해서 미안하네.”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마틴은 책상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정지우가 앉아서 상담하던 바로 그 의자.

“차를 드릴까요?”

“홍차가 있나? 우유를 넣어 주면 더 좋고.”

“티백입니다.”

“그렇다면 그냥 홍차만 주게.”

마틴은 한쪽으로 움직여 뜨거운 물에 홍차 티백을 담아 쥬피터의 앞에 놓아 주었다.

단정하게 넘긴 머리, 고급 슈트에 비싼 넥타이를 한 쥬피터가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것처럼 티백 홍차를 살짝 맛본 다음 잔을 내려놓았다.

“오늘 경기는 참 많이 아쉬웠어.”

“그렇습니다.”

“그렇더라도 자네의 능력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경기였지.”

비꼬는 건가?

쥬피터의 표정이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마틴을 바라본 쥬피터가 옅은 웃음을 담은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레믹 말일세. 어떻게 그를 그렇게 바꿔 놓을 수가 있었지?”

쥬피터는 이유가 뭐냐는 듯한 표정으로 마틴을 바라보았다. 그래 봐야 궁금한 건 마틴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경기력에 Ji까지 가세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선수 영입 없이도 프리미어리그에서 좋은 성과를 이룰 거란 확신이 들더군.”

“Ji가 함께한다면 그럴 겁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다름이었다.

“흠, Ji의 매니저와 함께 경기를 관람했었네.”

쥬피터가 꺼낸 말이 마틴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현재 프리미어리그 팀에서 오퍼가 있었다고 하고, 던캐스트가 이적료를 챙길 수 있도록 우선 계약을 고려하고 있다고 하더군.”

마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수 매니지먼트가 당연히 할 만한 말이었다.

“그러면서 내게 조건을 제시했어. 계약 기간 3년, 계약금 70만 파운드(한화 약 12억 원).”

마틴이 놀라며 의아한 눈으로 쥬피터를 보았다.

요구하는 금액이 너무 큰 탓이었다.

“이면 조건이 두 개 있지. 한국에 유망주 발굴을 위한 유니온 시티 축구 학교 설립, 그리고 3년간 운영비 지원.”

이건 아예 웃음까지 나왔다.

아직은 그 정도까지 이름 있는 선수가 아니다.

“비용이 계산도 안 되는군요.”

아무리 가능성이 있어도 요구하는 금액이나 조건들이 평가에 비해 터무니없을 만큼 무리한 것이었다. 비록 놀라운 재능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오랜 슬럼프에 빠져 있던 선수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란다.

“매니저가 희한한 이야길 하더군.”

어쩐지 말을 퍼트리고 다니는 뜨개질 할머니 같은 모습으로 쥬피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국에 만드는 축구 교실의 총괄 감독을 박용근? 그 사람에게 맡겨 달라고.”

마틴은 기가 막혀서 대꾸조차 나오지 않았다.

원래 욕심이 많았던 건가?

조건을 듣고 나자 정지우에게 실망감마저 들 정도였다.

“조건을 수락하면 어떨까? 우리는 한국에 축구 교실을 열어서 구단 홍보와 후원사를 모집하고, 자네는 프리미어리그 승격 팀의 감독이 되는 거야. Ji가 있다면 승격은 문제없지 않겠나?”

그런데 뜻밖에도 쥬피터는 조건을 수락할 것 같은 태도였다.

자선사업과도 같은 이런 계약을 하겠다고?

“또 있지. 한국이 지금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탈락 위기야. Ji가 국가 대표가 되어서 활약하고, 만에 하나 남은 리그 경기에서 눈부신 선방을 펼쳐 낸다면?”

마틴은 쥬피터의 눈빛이 무섭게 빛나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우린 그를 매우 비싼 값에 팔 수 있지. 이래도 저래도 우리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인 것 같은데?”

뭐지?

뭐가 숨어 있기에 이 늙은 너구리가 이렇게까지 터무니없는 계약을 성사시키려 나선 거지?

“그렇더라도 Ji가 예전처럼 다시 슬럼프에 빠지면 우린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 점에 대해 나도 같은 질문을 던졌었지.”

역시 이 너구리가 저런 계약을 끌려가며 할 사람은 아니었다.

“남은 리그 8경기에서 Ji가 한 골이라도 실점을 한다면 세금을 제외한 계약금 전액을 반환하고, 어느 팀으로 보내든 이적에 무조건 동의하는 조건일세.”

뭐를 반환하고, 뭐에 동의해?

마틴의 고개가 앞으로 쭉 빠져나간 뒤였다.

“이적이 이루어질 때, 이적료야 원래 우리가 받는 것이니까 그대로 우리 수입이 되겠고…….”

아직도 남은 게 있다고?

마틴의 시선을 본 쥬피터가 야비한 웃음을 입 끝에 걸었다.

“Ji가 이적이 되든 안 되든, 해당 팀에서 받게 되는 앞으로 3년간의 주급 역시 우리 몫이 되는 걸세. 어차피 유니온 시티 축구 교실은 우리가 승격되는 조건으로 설립할 예정이니까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은가?”

미쳤다.

미친 제안이고, 미친 계약이다.

마틴은 계속해서 같은 생각만 떠올랐다.

“어떤가? 승격이 확정된 뒤라면 자네가 봐서 적당히 한 골쯤 허락하게 해 줄 수도 있지 않나? 그렇다면 우린 손해 보는 것 하나 없이 모든 걸 손에 쥐지.”

쥬피터가 작은 눈짓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마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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