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2화 (12/262)

제5장. 절대 용기 잃지 마 (1)

“우와- 아!”

힘겨운 경기를 마친 선수들에게 관중들의 환호보다 더한 보상은 없다.

경기가 끝나는 순간, 에쉬튼 게이트가 떠나갈 것처럼 커다란 함성이 유니온 시티 선수들을 향해 쏟아졌다.

정지우가 골대를 벗어나 관중석으로 향할 때,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료들이 다가왔다.

가벼운 포옹을 하는 놈, 이마를 마주 대는 놈, 하이파이브를 건네는 놈까지 방식은 다양했다.

솔직히 전에는 전혀 친하지 않던 놈들인데, 오늘 게임이 끝나고서는 진심으로 정지우를 동료로 받아들이는 느낌이었다.

정지우는 머리 위로 박수를 치며 관중석으로 걸어갔다.

“Ji! Ji!”

빌이 그의 아버지 토미와 어머니 샌디 사이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어린아이다.

지난 아스널전과 오늘 게임이 평생의 추억으로 남을 그런 아이.

정지우는 관중석으로 다가가 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보안 요원들이 손을 뻗는 관중들을 막아서서 더 다가가기는 어려웠다.

“우와- 아!”

“You are so great! Ji!”

함성과 함께 ‘너 정말 대단했어!’ 하는 말들이 정지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승리했다.

저렇게 열광하는 유니온 시티 팬들에게 승리를 선물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한 날이었다.

주장 데이빗과 선수들이 정지우 곁으로 다가와 두 손을 높이 들고 박수를 치며 역시 감사함을 표했다.

원정 경기다.

덩치가 커다란 중년 남자, 체구가 작은 청년, 금발의 아가씨, 아이들 모두 먼 길을 달려와 함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

아직 빌라에 사는 이들이 깨어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전은주는 소리가 나지 않게 얼굴 바로 앞에서 물개 박수를 쳐 댔다.

간간이 레믹과 다른 선수들을 비춰 준 것을 제외하면 화면은 계속 정지우를 따라다닌다.

저렇게 잘 커 준 것이 전은주는 고마웠다.

힘겨웠던 아이, 엄마를 지키는 것이 그 무엇보다 앞섰던 아이, 그리고 늘 제 몫을 해내던 아이였다.

정지우의 얼굴이 화면 가득 잡히는 순간이었다.

잘린 것처럼 화면이 뚝 끊겼다.

하긴 불법 도박 사이트에서 하이라이트까지 방송할 이유는 없는 거다.

전은주는 최면에서 깨어난 것처럼 박용근을 보았다.

“자기도 그렇고…….”

시선을 마주한 박용근이 말끝에 입맛을 다셨다.

“커피 한 잔 마실래?”

“그럴까?”

새벽 6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라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전은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가는 동안, 박용근이 컴퓨터를 껐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지우야.”

주전자에 물을 올리면서 전은주는 주문처럼 같은 말을 계속 중얼거렸다.

행복해야 할 아이였다.

그럴 권리와 자격이 있는 아이였다.

그 어린것이 얼마나 마음이 쓰였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지난 6년, 편히 지내지 못했을 아이다.

그래서 부진하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마음이 쓰였는데 이제는 한시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박용근이 방을 나올 때는 물이 끓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잔도 꺼내 놓지 않았다.

전은주는 얼른 잔을 꺼내서 믹스 커피를 한 봉씩 부었다.

물을 붓자 달달한 커피 냄새가 작은 빌라에 가득했다.

식탁에 앉은 박용근의 앞에 잔을 놓아 준 전은주가 그의 앞에 마주 앉았다.

“후후.”

전은주는 바람을 불어 가며 커피를 마시는 박용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연하게 눈이 마주쳤는데 박용근은 짐짓 모른 척하는 얼굴이었다.

“당신, 지우 용서한 거 맞지?”

“그 얘길 뭐하러 또 꺼내냐? 왜? 아닌 거 같아?”

“아니야. 그냥 당신이 고맙고 자랑스러워서.”

“사람 참!”

박용근이 ‘별걸 다’ 하는 표정으로 다시 커피를 마셨다.

“나 이제 마음이 놓여.”

“가게에 나가려면 피곤해서 어쩌냐?”

“난 틈 봐서 조금씩 쉬면 돼. 당신이 걱정이지.”

박용근이 픽 하고 웃었다.

아직 아침이 제대로 내리지 않은 부천의 작은 빌라에 믹스 커피의 달달한 향이 가득했다.

***

구단에서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레드 블레이트에 도착한 정지우는 곧바로 구단 지정 병원으로 향했다.

간단한 검사를 끝낸 의사는 정지우의 이마를 꿰매 주었고, 주사를 놓아 주었다.

치료가 끝난 다음이었다.

“자다가도 어지럽거나 구토 증세가 있으면 바로 연락해. 아니라면 가까운 병원에 가서 먼저 치료해도 되고. 비용은 모두 구단에서 부담할 테니까.”

“알았습니다.”

병원을 나서며 팀 닥터는 몇 번이나 다짐을 받고서야 몸을 돌렸다.

해가 기울어진 저녁 시간이었다.

시선을 돌리거나, 혹은 표정을 바꿀 때마다 이마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이런 시간에 오래된 건물에서 나오는 불빛은 어쩐지 따듯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불빛이 나오는 저 안에서는 풍성하게 차려 놓은 식탁에 둘러앉은 행복한 가족이 있을 것만 같다.

어쩐지 창에 다가가 ‘성냥 사세요!’라고 해야 할 것만 같은 저녁, 정지우는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을 향해 움직였다.

잠시 기다렸다가 버스에 오르자 피곤이 몰려왔다.

네 정거장이다.

지금은 빌이 옆에 없어서 잠이 들면 원치 않는 여행도 해야 했다.

그립다.

두 사람이,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한 끼의 저녁이.

정지우는 고개를 들어 어두워진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우야, 더 먹어.”

“많이 먹었습니다.”

솔직히 더 먹고 싶었었다.

그렇지만 염치라는 것이, 양심이라는 것이 걸려서 더 달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 드실 거 가져갈 수 있게 따로 싸 놨어. 그러니까 얼른 더 먹어.”

전은주가 수북하게 쌓아 준 매콤한 돼지 불고기.

[지우니?]

전화를 걸었지만 어쩐 일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었다.

[지우야, 감독님이랑 나는 괜찮아. 몸조심하고…….]

전은주는 말끝을 흐렸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잘될 거야. 다 잘될 거니까, 그러니까 절대 용기 잃지 마, 지우야.]

그런 분들을 어째서 지난 6년간 찾아뵙지 않았을까?

눈에 익은 건물을 보지 못했다면 졸지 않았는데도 정류장을 지나칠 뻔했다.

끼이익.

버스에서 내린 정지우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쉬어야 할 시간이었다.

***

경기가 있는 날은 경질이 아니고서는 감독에게 다른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도 구단주인 쥬피터 회장은 마틴에게 저녁 식사를 제의했다.

마틴이 약속된 장소에 들어선 것은 저녁 7시였다.

“어서 오게.”

먼저 도착해 있던 쥬피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틴에게 손을 내밀었다.

점잖은 사람인 척하는 욕심쟁이 정도?

하긴 구단주인 사람이 욕심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긴 하다.

편안해 보이는 정장 차림의 쥬피터가 마틴에게 자리를 권했다.

“오늘 경기는 멋졌어. 최고였지.”

62살의 쥬피터는 모처럼 진심으로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자! 저녁을 먹기 전에 간단하게 한잔하지.”

그는 웨이터를 눈짓으로 불렀고, 평소처럼 마티니를 주문했다.

“나도 같은 거로 주게.”

웨이터가 돌아가고 난 다음이었다.

“그 코리안 골키퍼 말일세.”

쥬피터가 나직하게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던캐스트와 계약이 두 달 남았지. 우리가 영입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사회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완벽한 찬성이지.”

쥬피터가 손날로 허공을 가르는 동작을 펼쳐 보였다.

나쁘지는 않은데…….

마틴이 잠시 정지우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웨이터가 마티니를 가져와 두 사람 앞에 놓아 주었다.

“자! 우선 오늘 승리를 축하하자고.”

쥬피터가 잔을 들었고, 마틴이 마주 들었다.

한 모금을 마신 마틴이 잔을 내려놓았을 때, 쥬피터는 답을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Ji가 앞으로도 그런 경기를 보일 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이전 에버리지가 별로 좋지 않구요.”

“골키퍼가 어떻게 매번 크린 시트를 기록하겠나? 하지만 아스널전과 오늘 경기에서 보여 준 능력이라면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어느 정도는 통할 것 같은데?”

쥬피터는 이미 프리미어리그 진출을 확보한 구단주처럼 말을 하고 있었다.

마틴은 잠시 식탁에 올려진 마티니를 바라보았다.

프리미어리그에 올라가면 변화가 불가피하다. 당연하게 새로운 선수들을 영입하게 되는데 감독이라고 다를 바 없다.

어쩌면 저 잔에 들어 있는 올리브처럼 마티니를 다 마시고 나면 버려지는 신세쯤 되려나?

“뭘 그렇게 고민해? Ji에게 다른 문제라도 있나?”

“그런 건 없습니다. 이사회에서 완벽하게 찬성한 일이고, 어차피 우리는 골키퍼가 두 명밖에 없어서 반대할 이유도 없습니다.”

마틴은 하고 싶었던 질문을 삼켰다.

그렇더라도 쥬피터 회장은 알아들었을 거다.

이미 결정 난 것과 다름없는 이야기를 도대체 왜 이런 자리에까지 불러서 말하는 건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도 경기가 끝난 당일에.

“남은 경기가 9게임이지.”

마틴은 고개를 끄덕이며 쥬피터에게 집중했다.

“Ji와 계약이 완료될 때까지 그를 경기에 내보내지 않았으면 하네.”

이거였구나.

마틴은 복잡해진 감정을 감추기 위해 마티니 잔을 들었다.

정지우의 몸값이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에게 더 이상 기회를 주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래 놓고 승격이 안 되면 모든 책임은 또 감독인 마틴의 몫이 된다.

“프리미어리그로 승격이 확정되어도 나와 이사회는 자네에게 계속 팀을 맡길 생각이네.”

마틴의 속을 읽은 것처럼 쥬피터가 달콤한 제안을 건네 왔다.

이상한 일이다.

피식 나오는 웃음을 삼킨 마틴의 머리에 가장 먼저 정지우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프리미어리그에서 팀을 이끄는 데 필요한 선수를 생각했는데, 왜 단 두 게임밖에 뛰지 않은 정지우가 가장 먼저 떠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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