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7화 (7/262)

제3장. 최선을 다하고 돌아간다. (1)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마틴은 완벽하게 지친 얼굴이었다.

“자리에 앉겠나?”

정지우는 마틴의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리그 게임이 10게임 남았다.”

“알고 있습니다.”

팀당 46게임을 하는 챔피언십에서 오늘 게임까지 유니온 시티는 36게임을 마쳤다.

“다음 경기가 브리스톨 시티다.”

마틴이 책상 앞에 놓인 서류를 힐끔 본 후에 시선을 들었다.

“솔직하게 말해 주지, Ji. 유니온 데일리와 쥬피터 회장은 내가 너를 기용했으면 싶어 한다.”

말과는 달리 마틴은 정지우를 기용하고 싶지 않다는 눈빛이었다.

정지우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프리미어리그 승격을 앞두고 모험을 하기는 어렵다. 저들이 뭐라 하건 이 팀의 감독은 나고, 스쿼드를 꾸리는 건 내 책임이며, 결과도 당연하게 내 몫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이런 빤한 말을 하자고 불렀을 리는 없고?

“브리스톨 시티가 우리와 라이벌 관계인 건 잘 알겠고.”

정지우의 표정을 살핀 마틴이 서류로 시선을 떨구고는 엄지와 검지를 비벼 댔다.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고개를 든 마틴이 다시 입을 열었다.

“브리스톨 시티전을 맡기면 엊그제 말한 대로 최선을 다해 줄 수 있겠나?”

뭐라는 거야?

앞에서 내내 엉뚱한 소릴 지껄이다가 느닷없이 왜 선발로 내보내겠다는 거지?

무언가 있는데……?

느낌은 그랬다. 그러나 감독이 선수를 기용하면서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을 필요는 없는 거다.

“클레이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후우! 너를 기용하라는 압력이 있다고 해서, 그 외의 선발까지 입김을 넣으려고 해서는 곤란해. 파벌을 만드는 선수를 환영하는 팀이나 감독은 없다는 것도 명심할 필요가 있고.”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냐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최선을 다할 겁니다.”

“좋아!”

마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 봐도 됩니까?”

“물론이지.”

자리에서 일어난 정지우는 곧바로 마틴의 사무실을 나섰다.

달칵.

사무실 문이 닫히자 마틴은 검지로 머리를 긁으며 책상 위에 놓인 서류로 시선을 가져갔다.

브리스톨 시티는 유니온 시티와 앙숙을 넘어 원한 관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팀이다.

전에 유니온 시티로 오게 될 자동차 공장을 브리스톨 시티가 가로채다시피 가져간 뒤로, 그것이 삶의 질을 가르게 되면서부터 두 도시는 돌이킬 수 없는 앙숙이 되었다.

‘하필이면 아스널전 바로 다음에……!’

정지우를 기용하라고 악악거리는 유니온 데일리와 은근한 압력을 넣는 구단주.

그들이 보는 앞에서 엉망인 경기 끝에 판트에 4 대 0으로 졌다.

‘이러면 할 말이 없겠지?’

선수들에게 주는 무언의 경고, 거기에 게임에서 이기면 유니온 데일리와 구단주의 뜻을 들어준 거고, 반대로 게임에서 지면 정지우가 하루 반짝했던 것임을 증명하는 경기가 된다.

10게임 중, 한 게임을 버린다.

나머지 9게임에서 3할대 승리만 거두어도 유니온 시티는 승격할 수 있는 거다.

계산을 마쳤음에도 마틴은 다시 머리를 긁었다.

정지우가 정말 승리를 이뤄 낼 만큼 또다시 능력을 발휘해 줄까?

판트와 졸전 끝에 4 대 0으로 진 바로 뒤에 다시 브리스톨 시티에 대패하면 팀 분위기가 엉망이 된다.

거기에 마지막에 우르르 몰려 있는 강등권 팀과의 경기도 계산에 넣어야 했다.

유니온 시티는 승격을 노리지만, 저들은 챔피언십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눈이 뒤집힌 팀들이다.

미친 들개처럼 이빨을 들이대며 달려들 팀.

절대로 쉽지 않을 그 게임들을 맞이하기 전에 반드시 승격에 필요한 7점을 거둬 두어야 하는 거다.

‘빌어먹을!’

모든 게 저 코리안 때문이다.

전혀 쓸데없는 FA컵에서 아스널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는 바람에 선수들과 관중, 구단주, 심지어 지역 신문까지 벙벙하게 바람이 들어가 버렸다.

인상을 찌푸린 마틴은 서류를 넘겼다.

동양인들은 대개 고분고분하다는데……?

“흠.”

마틴은 자신이 지독하게 선수 운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아파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정지우는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사는 거 참 웃긴다.

6년 만이다.

아스널과의 경기에서 피가 끓었고, 다시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리그 선발 경기가 잡혔다.

놓으려고 하는 게 싫어서 그런가?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 어딘가에서 어머니가 보고 있을 것 같은데…….

빌과 릴리.

어쩌면 그 꼬맹이들 때문이기도 했다.

두 달 남은 시점에서 그 녀석들이 잊고 있었던 열정의 끄트머리를 당겼고,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꿈도 떠오르게 했다.

브리스톨과의 경기는 쉽지 않다.

고만고만한 승률도 그렇고, 앙심 품은 관중들이 갖는 그 승리에 대한 집착만큼이나 선수들의 투지도 대단하다.

버스에서 내려 아파트로 걸어간 정지우는 현관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말았다.

“Ji, 오늘은 슬퍼.”

“판트에 져서?”

계단 앞에 앉아 있던 빌이 세상을 다 잃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에게 축구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유니온 시티가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한다고 해도, 제 손에 1유로도 떨어지는 것 없고, 어쩌면 입장료만 비싸질지 모르는데.

“다음은 브리스톨 시티야.”

빌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올라갈래?”

“응.”

녀석이 당연한 것처럼 현관 앞에 섰다.

열쇠로 현관을 열고 우편함을 살핀 정지우를 따라 빌이 303호로 들어왔다.

“냉장고에 우유 있다. 난 옷 좀 갈아입을게.”

방으로 들어간 정지우가 재킷을 벗었을 때, 냉장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Ji! 우유?”

“난 됐어. 고마워!”

여기가 누구네 집인가 싶다.

서양 놈들은 남의 집에서 저러기 쉽지 않은데, 고작 4개월 만에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녀석이 좀 특이하긴 한 거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정지우는 탁자 위에 놓았던 바나나의 비닐 랩을 벗겼다.

“아버지도 많이 실망하셨겠네?”

“응. 엄마도.”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브리스톨 시티와의 경기만큼은 Ji가 선발로 나와야 하는데.”

주둥이 위쪽에 우유를 묻힌 빌이 의아한 눈으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Ji, 혹시……?”

“아직 몰라. 그런데 어쩌면 선발이 될지도 모르겠다.”

경기가 아직 일주일이나 남아서 정지우는 일단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 알려 주었다.

“Ji가 무조건 선발이 될 거야! 우리 아버지랑 동네 사람들 모두 Ji가 선발이 되어야 한다고 했거든! 그걸 감독이나 구단주가 모를 리가 없지!”

애늙은이 같은 말이어서 정지우는 픽 하고 웃고 말았다.

“저녁 먹고 가도 되지?”

“물론이야. Ji의 초대를 어떻게 거절하겠어?”

또 웃음이 나왔다.

4개월 남짓 지낸 유니온 시티에 정이 드는 건 분명 저 9살짜리 어린아이의 넉살 덕분일 거다.

심심하지 않아서 좋다.

그리고 축구에 열정을 가진 녀석이어서 더 좋다.

정지우가 냉장고를 열어 팬케이크 가루와 닭 가슴살, 샐러드 재료들을 꺼내고 있을 때였다.

“Ji, 브리스톨 시티가 절대로 한 골도 넣지 못하게 막아 줘.”

아이의 목소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간절한 음성이 정지우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유니온 시티 어떤 선수도 지고 싶은 선수는 없어.”

“오늘 경기는 아니었어. 그래서 모두 Ji를 기대하고 있어. Ji가 지난번 아스널전처럼 골대를 지켜 준다면…….”

“빌.”

프라이팬을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정지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골을 허용한다고 해서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거니?”

빌은 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경기도 마찬가지야. 우리 팀 선수 모두 최선을 다했지만 판트가 좀 더 운이 좋았고, 더 많이 뛰었던 것뿐이야. 우리는 사흘 전에 아스널과의 경기가 있었잖아.”

“응.”

“내가 선발로 나서게 되면 최선을 다할게. 그렇지만 결과를 가지고 비난하지 않았으면 싶다. 적어도 너는.”

“오케이, Ji. 나는 Ji의 친구니까.”

빌이 작은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럴 땐 기가 막힌 심정이지만, 정지우는 자칭 친구 빌이 내민 주먹을 향해 가볍게 주먹을 뻗었다.

툭.

“배고파, Ji.”

만족한 듯한 친구가 저녁을 재촉했다.

다음 날.

정지우는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레드 블레이트 구장으로 향했다.

오늘부터 사흘간 휴식이어서 구장은 한가했다.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은 정지우는 트레이닝실로 움직였다. 그러고는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자전거에 올라가 페달을 밟았다.

앞에 붙여 놓은 거울에 페달을 밟는 정지우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지난 6년을 참 바보같이 살았다.

이런 모습을 바란 것은 아닐 텐데.

‘미안해, 지우야.’

‘그런 소리 마세요.’

‘엄마가 우리 아들, 앞길을 막았어.’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도 정작 사는 모습은 망가지는 것을 누군가에게 보여 주고 싶은 철부지와 다를 바 없었다.

거울에 비친 정지우의 모습 위로 박용근의 모습이 떠올랐다.

6년을 먹여 주고 키워 준 그 양반을 완벽하게 물 먹여 놓은 것이 미안해서, 혼자 잘 살겠다고 버둥대는 것처럼 보이는 게 너무 죄송해서, 그동안 게임에 집중하지 못했었다.

두 달 남았다.

임대도 두 달, 소속 팀 던캐스트와 남은 계약도 두 달.

두 달이다.

더 시간을 끄는 것은 바보짓이다.

그래서 정지우는 앞으로 계약이 만료될 때까지의 두 달을 끝으로 축구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동안 최선을 다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사죄하는 것.

그것이 어리석게 보낸 지난 시간을 바로잡는 일의 시작이었다.

결심을 하고 나서부터 마음이 편했었다.

경기에 나서며 불편했던 마음을 놓고, 최선을 다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스널전에서 결과도 좋았고, 이어서 선발도 잡혔다.

정지우는 한국에 있을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박용근이 그 성격에 용서나 해 줄까?

하긴, 당장 주먹을 날려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원하게 맞고 용서를 비는 것이 지금처럼 빌빌거리며 시간을 끄는 것보다 백번 현명한 일이란 생각이었다.

또 누가 뭐라고 해도 지난 6년 내내 그립고 보고 싶은 얼굴인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40분쯤 자전거 페달을 돌린 정지우는 덤벨을 들고 팔과 상체, 그리고 허리 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달려드는 1톤 트럭 같은 선수들을 이기려면 탄력과 순발력을 키우고, 그에 맞는 근육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기고 싶다.

유니온 시티의 관중들에게 승리를,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지지 않는 경기를 선사하고 싶다.

마지막이 될지 모를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고, 좋은 결과를 얻고 싶다.

정지우는 거울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먼 길을 돌아와서 이제야 갈 길을 알았다.

‘최선을 다하고 돌아간다.’

거울 속의 정지우가 모처럼 예전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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