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가문의 네크로맨서 205화
“임무를 실패했나 보군요.”
칼리는 나른한 표정으로 신유현을 바라본 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안을 바라봤다.
그리고 총대장 알렉산더의 왼쪽에 40대 중년 신사가 다가왔다.
검은 정장 슈트를 입고 머리에는 중절모를 쓰고 있는 중년 신사.
잿빛 교단의 암살 조직인 아르스 테우르기아를 이끄는 수장, 페르젠이었다.
“설마 블랙 워치의 이안이 아르스 콜을 부를 줄이야. 굉장히 다급 했었나 봅니다.”
페르젠은 중절모를 살짝 들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신유현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하긴, 그럴 만해 보이는군.”
잿빛 교단의 전투 조직인 아르스 알마델 뿐만이 아니라 모든 조직을 통괄하는 총대장, 알렉산더는 차가운 눈으로 신유현을 바라봤다.
상황은 대충 파악을 완료했다.
신유현에게 제압당해 죽기 직전이었거나, 포로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이안이 그분에게 받은 보랏빛 크리스탈을 사용한 것이리라.
“좋은 판단이다.”
알렉산더는 입 꼬리를 치켜 올리며 말했다.
애초에 아르스 콜은 무조건 완수해야 하는 임무이거나, 적에게 붙잡혀서 정보를 넘겨야 하는 위급한 상황일 때 발동을 허락 받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보랏빛 크리스탈을 깨트려서 발동시킬 수 있는 아르스 콜은 잿빛 교단에서 대기 중인 전투원들을 공간전이로 소환할 수 있는 기술이었으니까.
그 때문에 아무 때나 발동시킬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르스 콜을 발동시킬 수 있는 보랏빛 크리스탈은 잿빛 교단의 간부 집단인 아르스 노토리얼의 간부들만 가질 수 있었다.
이안은 노토리얼의 말석으로 보랏빛 크리스탈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르스 콜을 발동시키는 건 불명예스러운 일로 간주되었다.
자신의 힘으로 임무를 완수할 수 없고, 적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안은 아르스 콜을 발동시켰다.
명예보다는 목숨을 선택하였기에.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안의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이번 임무는 반드시 성공해야 했으며, 이안이 포로로 잡힌다면 잿빛 교단의 비밀이 흘러나갈 위험성이 높았으니까.
거기에 잿빛 교단에게도 이득을 주었다.
마수들이 점령한 도시 강릉.
이곳에는 희귀한 광물과 영약들이 잠들어 있으니 말이다.
“강릉은 우리가 차지한다.”
알렉산더는 선언하듯 말했다.
지금 있는 잿빛 교단의 전투원들이라면 희귀 광물은 소량밖에 채굴하진 못하지만, 영약이라면 꽤 많이 수확할 수 있었다.
“그전에…….”
알렉산더는 차가운 눈으로 신유현과 마리아 일행들을 바라봤다.
눈앞에 있는 인물들이 누구인지 알렉산더는 잘 알고 있었다.
잿빛 교단의 정보 조직인 아르스 포올리나의 수장 칼리에게서 신유현에 대한 정보를 상세하게 보고를 받은 적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리아 일행은 블랙워치와 앙숙이며 잿빛 교단의 비밀을 파헤치고 있는 화이트워치의 일원이었다.
그 때문에 잿빛 교단의 요주의 인물들로 감시 대상이기도 했다.
“너희들은 인질이 되어 줘야겠다. 너희들이 있으면 파천검가와 헌터 협회도 함부로 손을 대진 못하겠지.”
신유현은 파천검가의 직계.
그리고 마리아 일행은 헌터 협회에 소속되어 있는 마법사 집단 화이트 워치의 일원이었다.
그들이 있다면 파천검가나 헌터 협회를 상대로 시간을 벌 수 있을 터.
그 동안 영약만이라도 수확해서 돌아간다면 상당한 이득이었다.
하지만,
“게이트에서 뭐가 나오나 했더니.”
신유현은 헛웃음을 흘리며 눈앞에 나타난 회색 코트의 인물들을 바라봤다.
이안이 보랏빛 크리스탈을 깨고 균열이 열리면서 여러 개의 게이트들이 소환되었을 때는 좀 놀랐었다.
게티아와 연관된 무언가가 넘어올 줄 알았으니까.
최악의 경우 게티아 선발대들이거나, 혹은 게티아들이 개발한 전투 병기들이 넘어오지 않을까, 긴장했었다.
‘이전 삶에서 게티아들이 도시를 이동할 때 사용하던 게이트와 어딘가 비슷한 느낌이었으니까.’
그런데 설마 잿빛 교단으로 보이는 자들이 넘어올 줄이야.
신유현은 여전히 바닥에 쓰러진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이안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발을 뒤로 치켜 들었다.
퍼억!
신유현은 강체술까지 발동하며 있는 힘껏 이안을 발로 차올렸다.
“크헉!”
그러자 이안은 비명과 피를 토하며 허공에 떠올라 빠른 속도로 알렉산더 앞으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이안이 알렉산더를 덮치려는 순간,
콰앙!
갑자기 이안의 몸이 정지하더니 그대로 알렉산더 앞 콘크리트 바닥에 내리꽂히는 게 아닌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이안을 붙잡고 바닥에 내리꽂은 것처럼 보였다.
“중력 마법인가?”
신유현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알렉산더를 바라봤다.
이전 삶에서 잿빛 교단과 마주친 일은 거의 없었다.
단지, 소문만 들었을 뿐.
그리고 신유현이 들은 소문 중에는 잿빛 교단에 중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을 가진 초인이 있다고 들었었다.
잿빛 교단의 모든 조직을 통솔하고 중력을 다루는 인물.
“네놈이 총대장, 알렉산더겠군.”
“날…… 알고 있다고?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알렉산더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음에도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한 신유현의 말에 동요한 것이다.
지금까지 알렉산더는 물론 잿빛 교단의 간부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목격자들 또한 없었다.
전부 몰살시켰으니까.
그 때문에 잿빛 교단의 간부들 조직인 아르스 노토리얼에 대한 비밀을 지켜올 수 있었다.
그런데 첫눈에 자신의 정체를 꿰뚫어 볼 줄이야.
“신유현. 네놈에게서 들어야 할 게 많을 것 같구나.”
알렉산더는 차가운 눈으로 신유현을 노려봤다.
“글쎄. 그럴 수 있을까?”
신유현 또한 알렉산더를 마주봤다.
그때 칼리가 가소로운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아직 어리네. 고작 이안 따위를 이겼다고 해서 우리를 상대하겠다고?”
칼리는 팔까지 감싸는 긴 붉은 장갑을 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신유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신유현에 대해 조사를 한 인물은 다름 아닌 그녀였으니까.
“그림자 속에 숨겨둔 언데드들을 믿고 있나 본데 고작 수백 마리 정도 되는 언데드로 어떡하겠다는 거지?”
칼리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신유현을 바라봤다.
실제로 지금 아르스 콜로 집합한 잿빛 교단의 전투원 숫자는 약 1000여 명.
최소 4성 이상의 베테랑급 실력자들이었다.
그들은 신유현과 알렉산더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곳곳에 포진하며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도로 위에 있는 자들.
건물 각 층에 숨어서 몸을 숨기고 있는 자들.
그리고 신유현을 노리고 있는 장거리 저격수들까지.
언제든지 명령만 오면 신유현을 공격할 모든 준비를 갖춰 놓은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어머니를 구출한 티르달이 무사히 강릉을 빠져 나갔다는 사실 정도였다.
“수백 마리라…….”
신유현은 칼리를 바라봤다.
나른한 표정에 노출이 심한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미인.
총대장 알렉산더의 바로 옆에 서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간부일 테지.
그리고 그녀의 정보력 또한 놀라웠다.
그녀의 말대로 신유현은 평소 까망이의 그림자 속에 수백 마리 정도 되는 언데드들을 넣어 두고 다녔으니까.
신유현이 강릉을 탈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너에게 제안할 게 있어.”
그때 칼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붉은 빛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후웅.
이윽고 낮은 진동음과 함께 칼리의 모습이 다시 나타났다.
다름 아닌 신유현의 바로 눈앞에.
단거리 공간이동이 가능한 그녀의 고유스킬, 블링크(A)였다.
전령신 헤르메스의 신발, 탈라리아에 붙어 있는 블링크(S)와 같지만 등급이 한 단계 낮았다.
그리고 블링크를 사용해 신유현의 눈앞에 나타난 칼리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잿빛 교단에 들어와. 그러면 네가 원하는 걸 이뤄 줄 테니까.”
칼리는 신유현에 대해 자세히 조사했다.
그 덕분에 신유현이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파천검가의 사람들에게 무시 받고 무능한 쓰레기 취급을 당해 왔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신유현이 원하는 건, 단 하나일 터.
“나는 너를 인정한다. 네가 지금까지 해 온 노력들, 네가 해 온 일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사람들은 인정받길 원한다.
자신의 능력, 외모, 성격, 노력 등등.
다름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으며 인정받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
칼리는 그 마음의 틈을 노린 것이다.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봐.”
칼리는 신유현의 팔을 붙잡고 가깝게 밀착하며 말했다.
그녀에게서 달콤한 향기와 뜨거운 숨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속에는 보상심리가 존재한다.
인정받는 만큼 돈을 더 많이 받는다거나, 아니면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거나.
명예나 명성을 받고 싶어 할 수도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걸 말해 보라고?”
“그래. 내가 전부 이루어 줄 테니까. 너라면 나를 가져도 좋아.”
칼리는 신유현의 귓가에 뜨거운 숨소리로 속삭였다.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웨이브가 진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을 가진 미녀.
그리고 그녀가 입고 있는 붉은 드레스는 글래머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그 때문에 시선을 떼기 힘들 정도로 관능적인 모습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신유현을 바라보는 칼리의 눈에서 나른하면서 퇴폐적인 붉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유현. 넌 내 노예로 만들어 줄게.’
칼리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신유현을 바라봤다.
[고유스킬, 매료의 마안(A)을 발동 중입니다.]
상대를 매료시켜서 정신을 조작할 수 있는 마안.
그녀는 A급 고유스킬 두 개로 잿빛 교단의 간부자리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지금 신유현을 유혹하면서 매료의 마안으로 세뇌를 시키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말해 봐. 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지?”
칼리는 은근한 목소리로 신유현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자신의 유혹에 이제 거의 다 넘어왔을 터.
남은 건, 신유현을 자신의 노예로 만들고 파천검가의 스파이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게티아 놈들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어, 뭐?”
신유현의 말에 순간 칼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하는 게 게티아의 파멸이라니?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대상, 신유현이 매료의 마안(A)에 저항합니다.]
“뭐, 뭐? 말도 안 돼!”
그리고 이어서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한 칼리는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 유혹을 버텨 냈다고?”
“나한테 정신계열 마법이나 스킬은 통하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신유현은 비웃음을 흘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신유현의 정신력 수치는 100.
정신계열 상태이상에는 걸리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너보다 더 좋은 여자들을 알고 있으니 말이야.”
신유현은 칼리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무슨……?”
그 말에 칼리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찰나,
스스슥!
뀨!
신유현의 그림자 속에서 까망이와 세븐아크스들이 튀어나왔다.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온 까망이는 빙글빙글 돌며 신유현의 어깨에 안착했다.
그리고 신유현의 양옆으로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미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들의 모습에 잿빛교단의 전투원들조차 눈을 크게 뜨며 속으로 감탄했다.
슈브와 루베르는 인간 같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니, 실제로 그녀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한명은 서큐버스로 몽마의 여왕이었고, 다른 한 명은 진조의 공주였으니 말이다.
“감히 마스터를 유혹하려고 하다니.”
“죽고 싶은가 보구나?”
그림자 속에서 뛰쳐나온 슈브와 루베르는 다짜고짜 칼리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