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6 마지막을 향해 =========================================================================
우우웅-!
흙덩이의 정령술 대지의 축복엔 마기의 정화능력이 있다.
이건 불릿이 기존 땅의 정령사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능력이었기에 가이아 여신이 그녀를 어여삐 여겨서, 아니면 핏줄에 대지계열 최고신의 핏줄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흙덩이의 정령술이 펼쳐지자 거무죽죽하던 바닥에서 비명이 흘러나왔다.
- 끼아아악!
- 구오오오오-!
그리고 그것을 목격한 마법사들의 입에서 증언이 터졌다.
“와치의 혼령 발견!”
“고스트다!”
“사람 먹는 귀신 접근 중! 턴 언데드!”
바아앙-
꾸어억…
마법사들이 땅속에서 튀어나오는 마계의 악령들을 상대하는 사이, 9만에 달하는 연합군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물리적인 공격에 치중된 연합군의 경우 마법사들이 와치나 스펙터, 고스트 등을 사이 주로 하급 마물이나 몬스터 등의 방대한 군단을 상대하고 있었다.
- 우어어!
“쉬이익!”
하급 마물이 바스톤에서처럼 주변에 널려 있던 몬스터를 집어다 던지려 했는데, 이번엔 소형 몬스터가 아닌 중형급인 자이언트 스콜피온을 두 팔로 번쩍 들어보였다.
그때, 셰실리코프가 바람처럼 달려와 하급 마물의 허벅지를 박차고 위로 날아올랐다.
“츳.”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검이 번쩍하니 그가 땅으로 내려섰을 땐 하급 마물은 물론이거니와 놈이 들고 있던 자이언트 스콜피온까지 삼등분이 되었다.
우수수수수…
이런 난장판을 바라보던 불릿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도착하겠군.”
황무지 중앙에 임박하자 흑마법사들도 급했던 것인지 지난 며칠 동안 한 번도 내보이지 않았던 병력을 우수수 쏟아내었다.
바닥에 유령타입의 악령들도 심어놓았지만 흙덩이가 마기를 정화하며 나아가니 치명적인 타격을 입음과 동시에 발각되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쿠웅-
쿠웅-
몬스터보다도 많은 병사들과 함께하니 셰실리코프도 마음껏 날뛰며 마물들을 거꾸러뜨렸고, 벤젼스를 비롯한 신생 라체나의 기사들도 저마다의 무력을 뽐냈다.
투툰 후작령의 군사들은 당연히 잘 싸웠지만 3만이나 되는 수를 통솔하면서도 카미스 백작은 그 자신도 마물을 잘도 베어 넘겼다.
“흩어지지 마라! 하!”
촤악-!
셰실리코프의 번쩍번쩍 빛을 뿌리는 화려한 검술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지만, 카미스 백작의 검술은 긴 궤적을 그리며 허공에 오래토록 남아 있었다.
“…오러 블레이드?”
원활한 작업진행을 위해서 수레에 탑승했던 불릿은 잠시 휴식시간을 갖는 흙덩이의 손을 잡아준 상태로 그 광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자 여전히 불릿과 흙덩이를 지키고 있던 크레파토스가 답변을 주었다.
“마스터는 아닐 것입니다. 오러 블레이드에 근접한 것은 사실이지만, 흔들림이 있는 걸로 봐선 레베다 아인그루츠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인그루츠….”
레베다 아인그루츠는 반역자 게슐린 그랩 자작의 자랑이었던 붉은 장미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인물이다.
비록 반역에 가담한 자이긴 했으나 뒤늦게나마 충심을 되살려 자결한 사람.
그 또한 왜 그런 치졸한 인물에게 붙었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있던 인물이었다.
대외적으론 소드익스퍼트 상급의 인물이었지만 실은 최상급이었으니, 그 정도면 그 스스로도 충분히 자작의 작위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죽은 것도 벌써 작년의 일이었으니 시간이 빠르게 흐름을 느끼는 불릿.
“아니야, 카미스 백작도 아인그루츠 ‘경’처럼 실력을 숨기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말입니까?”
세상을 떠난 아인그루츠에게 ‘경’이라 불러주는 불릿이 신경 쓰였지만 굳이 이 상황에서 그 점을 꼬집을 필요는 없었다.
그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자 반항을 포기하고 자결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병력을 통솔하면서도 저런 여유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투툰의 사람이지 않은가?”
“투툰이시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요.”
투툰이라면 소드마스터를 휘하에 데리고 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그가 왕국 제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으니 굳이 전력을 노출할 필요도 없었다.
“흙덩아, 얼마나 온 것 같니?”
아군의 전력이야 숨겨져 있건 말건, 어차피 투툰은 이제 남이 아니었으니 상관없었다.
오히려 숨겨진 전력이 많다면 이번 전쟁에서 유리해지는 것은 자신들이었다.
담요를 덮고 있던 흙덩이는 불릿의 물음에 대꾸하였다.
“엄청 기분도 나쁘고 무서워. 꼭 가야해?”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통해 떨림이 전해져오자 불릿은 더욱 세게 흙덩이의 손을 잡아주었다.
꼬옥…
“오빠만 믿어, 알겠지?”
가장 못 믿을 만한 발언을 꺼내는 불릿이었으나 순진한 흙덩이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었다.
“응! 그럼 빨리 하고 가자!”
“그래, 그래.”
그녀를 달래준 불릿은 덜컹거리며 움직이는 수레의 위에서 질문을 건넸다.
“얼마나 남았지?”
불릿의 물음에 흙덩이는 주변의 살육현장과는 다르게 귀여운 동작으로 토끼처럼 양쪽 손가락을 두 개씩 까딱였다.
“어제처럼 걸으면 4시간.”
“4시간?! 바로 코앞이잖아!”
“그래서 무섭댔잖아….”
“바포 부인, 그 말이 사실입니까?”
카텐령의 지부장 라르벨로 자베르 또한 이번 전쟁에 참가했었다.
그는 불릿이 영입도 하려했던 대상, 꽤나 친분을 나눈 편인지라 마법사들 중에서도 그를 대동하는 편이었다.
자베르의 실력이 골드 클래스이기 때문에 상위에 속하기도 했고.
“왜 물어봐놓고 흙덩이한테 뭐라 그래.”
“아닙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흥.”
삐진 것처럼 보였으나 주변의 전장이 험악했기 때문에 긴장한 상태였다.
이젠 정말 결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불릿도 흙덩이처럼 긴장하기 시작했다.
‘모조리 박멸해주마.’
전쟁의 원흉, 아스타로트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 * *
“예전에는 이런 구멍이 없었는데….”
“윽, 마기가 장난이 아니로군.”
온갖 방어마법으로 몸을 둘러싼 마법사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불모의 황무지 한 가운데에 뻥 뚫린 새까만 구멍이었다.
구멍이 어찌나 컸던지 바닥이 보이질 않았고, 그곳에서부터 마계의 기운이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고오오……
지독한 마기에 마나도 느끼질 못하는 일반병사들도 주춤 뒷걸음질 칠 정도로 짙고 짙은 기운.
하지만 이런 걸 발견하고서도 물러날 정도로 그들의 자신감이 얕진 않았다.
“여길 통해서 내려가야 하나?”
방금 전의 격전을 통해 9만여 명이었던 병력이 8만으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연이은 대승과 전투의 흥분으로 인해 거대한 구멍과 짙은 마기에도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다.
불릿은 어서 흑마법사를 토벌하고 싶었으나 여기를 제외하면 마땅한 출입구가 보이질 않는 상태.
이럴 때 나서야 하는 인물은 불릿이 아니라 따로 있었다.
“디텍티브.”
“디텍티브.”
천 명의 마법사가 바닥도 보이지 않는 이 거대한 구멍을 둘러싸고 탐지마법을 펼쳤다.
어떻게든 놈들의 씨를 말리겠다는 일념으로 펼치는 탐지마법은 그 어떤 공격기보다 무시무시했는데, 이러한 마법사들의 노력은 아쉽게도 보답 받지 못했다.
1시간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그들은 마력이 떨어져 감을 느끼고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쩌라는 거지?”
“설마 여기가 끝은 아니겠지?”
“밑에서부터 마기가 뿜어지는 것을 보면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플라잉으로 내려가면 어떻습니까?”
“그건 마력소모가 심하지, 페더(feather)가 낫다.”
저마다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을 바라보며 불릿의 바포 변경백 군단의 군단장 뎁슨 레너드 자작이 입을 열었다.
“놈들은 지하공동을 만들어 숨어있던 전력이 있으니 비밀입구가 있을 것 같습니다.”
레너드 자작은 구울 백작과의 분쟁에서 많은 전략을 펼치고, 보았었기에 지금의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 마기가 뿜어져오는 저 거대한 구멍으로 내려갈 생각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그는 판단하는 중이다.
‘함정일 가능성이 높다.’
흑마법사들이라고 생각이 없겠는가? 이미 여기까지 몰려놓고도 몸을 피하지 않는 놈들이었다.
그러니 믿는 수가 있는 의미, 이럴 땐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다는 것을 레너드 자작의 직감이 알려주고 있었다.
그동안은 연합의 주축인 구울 백작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침묵을 지켰으나 거의 끝판인 마당에도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불릿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우리가 이곳까지 진격하면서 많은 마물과 몬스터를 처치하였으나, 실질적으론 본체라 할 수 있는 흑마법사를 죽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긴 하오.”
“…크큭, 계속 말해봐라.”
카미스 백작과 구울 백작도 명장이라 불리는 레너드 자작의 의견을 듣고자 귀를 기울였다.
고위귀족들이 저처럼 굴어주니 제 잘난 맛에 사는 마법사들도 함부로 입을 놀리진 못했다.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레너드 자작은 불릿의 허락을 기다렸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짙은 마기가 뿜어져오는 저 구멍으로 인해 마법사들이 제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선 저희 작은아씨께서 나서주심이 현명한 판단일 것입니다.”
마기가 워낙 짙다보니 마법사들도 연신 탐지마법을 펼쳤지만, 큰 줄기에 묻혀 작은 줄기가 보이질 않았기에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이때야말로 흙덩이가 나설 차례! 그녀의 탐지능력은 마법사들도 인정해주는 부분이었으니 그들도 기분 나쁘진 않으리라.
“잠깐만 기다려 줘야해?”
‘윽….’
‘귀엽다!’
상황과는 별개로 흙덩이의 심쿵한 모습에 심장을 부여잡으며 숨을 헐떡이니 예전에 불릿이 연설할 때 이상한 소리를 하던 놈이 떠올랐다.
여하튼 간에, 흙덩이는 잠시 짬을 타 불릿에게서 전해 받은(….) 정령력으로 대지의 기억과 대지의 축복을 동시에 시전했다.
우우웅-!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웅장한 정령력이 빛을 뿌리자 흙인형이 일어섬과 동시에 마기가 그녀의 기술에 충돌했다.
쿠와아아악!
“힉….”
움찔할 정도로 격하게 반응하는 마기에 순간 놀랐던 흙덩이지만 자신의 곁에 누가 있는지를 떠올리고선 조그마한 입술을 꽉 깨물고 흙인형을 움직였다.
흙인형은 사라지기 직전의 모습을 재연했는데,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무언가가 머리 위를 덮으며 땅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져?”
흙인형이 이런 식으로 사라지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불릿이 의문을 표하니 흙덩이는 그의 손을 꽉 잡으며 의문을 풀어주었다.
“저기에 계단 있어. 엄청 길고, 좁아. 한명씩밖에 못 갈 것 같아.”
“그렇게나 좁단 말이지….”
그녀의 말이 거짓일 리는 없을 테니 이 많은 병력이 모두 내려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정예 중의 정예만을 이끌고 내려가야 할 텐데, 문제는 밑에 무엇이 기다릴지 알 수가 없다는 점.
흙덩이의 능력도 만능은 아니라서 힘의 간섭을 받는 곳에선 마냥 발휘하기 힘들다.
‘어쩌면 이것도 함정일지도….’
마법을 통해 지켜보고 있단 것은 보고를 통해서 알고 있었으니 놈들도 뭔가 대비책을 세웠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