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1 마지막을 향해 =========================================================================
그리고 이런 소란에 잠을 청하던 불릿과 흙덩이도 일어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뛰쳐나오던 불릿은 추웠던 것인지 흙덩이를 품에 안고서 호위병 둘과 함께 자베르에게로 다가올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여기 계셨습니까, 각하!”
“크레파토스?”
호위대장인 크레파토스도 잠을 청하다 깨었는지 복장이 허술했으나 기본적인 무장은 하고서 잠들어서인지 무장만은 충실했다.
그는 불릿을 찾자마자 호위병대를 곳곳에 둘러싸 다른 자들이 불릿에게로 접근하지 못하게 차단했고, 뒤이어 도착한 셰실리코프에겐 불릿의 근접호위를 명했다.
“자네는 각하를 맡게.”
“알겠습니다. 각하, 잠시 뒤로 물러서시지요, 너무 위험해보입니다.”
그들은 악마의 심장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에 일단 미지의 위험으로부터 불릿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그는 이 상태가 무엇인지 알았기에 셰실리코프를 뒤로 물렸다.
“괜찮다, 놈들은 이미 다 죽었어.”
“이거 뭐야? 내꺼랑 비슷해.”
흙덩이가 쪼그려 앉아서 콕콕 찌르려고 하자 그녀의 손가락을 냉큼 낚아채는 불릿.
덥썩!
“악, 왜 그래?”
“가까이 가지마라, 독성이 강하다.”
흙덩이의 치유능력이라면 다치자마자 나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서 불릿은 악마의 심장의 시신을 바라보며 놈들의 특징에 대해 떠올렸다.
‘사정거리 100미터, 둥근 원형의 몸통에 1.5미터가량의 독가시가 달린 놈들의 무기는 성인 몸통만한 거목도 단번에 관통하는 파괴력과 속도.’
그리고 가장 큰 특징으로는 악마의 심장은 스스로 생각할 수 없는 생물이며 오직 72군주의 마기를 먹고서야 살 수 있었다.
그런 놈들이 이런 황무지 한복판에서 나타난 것을 보면 드디어 목표했던 장소에 거의 근접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어지간히 급했나보군.’
아마 그동안 띄엄띄엄 적절히 섞어서 몬스터나 마물을 보내지 않은 것은 연합군의 방심을 이끌어내기 위함인 듯했다.
그동안 흑마법사인지 아스타로트인지, 누구의 지시인지 모를 명령에 의해 거의 버리듯이 단일병력으로만 습격해온 이유가 그러한 목적 때문임을 불릿도 깨닫게 되었다.
“위험했군….”
“대리자여.”
맑고 고운 음성이 귓가에 울리자 불릿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로브를 둘러쓴 우락크가 있었고, 자베르는 불릿과 함께 시선을 돌리다가 화들짝 놀랐다.
“으헉, 누, 누구요?”
“…조력자니 놀랄 필요는 없소이다.”
그런 그에게 셰실리코프가 대답을 해주니 놀란 가슴을 진정하는 자베르.
셰실리코프도 그녀가 접근한 것을 몰랐었기에 착잡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기감을 펼치고 있어도 알 수가 없는 것인가.’
루드밀라에서 가장 제일의 재능을 지닌 자로서 자존심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불릿을 돕기 위해 온 사람이었고, 그의 무력도 확인했으니 인정할 도리만이 남은 상황.
“잠시 대화 좀 나누지.”
불릿에게 다가온 우락크의 몸에서부터 기의 막이 펼쳐지자 주변으로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 조용해졌다.”
흙덩이가 어리둥절해하자 불릿은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서 입을 열었다.
“우락크가 한 일이오?”
그녀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불릿이 곧장 물어오니 우락크도 부정할 이유가 없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너희가 감당할 수 없어 보이기에 손을 좀 썼다.”
헌데 약간 불편해 보이는 우락크의 심기. 후드를 뒤집어쓴 그녀의 가려진 얼굴에서 불안함이 엿보이고 있었다.
입술을 우물거리던 우락크는 자신의 심리가 내포된 말을 내뱉기에 이르렀다.
“…내가 쓸데없는 짓을 했는가?”
한때 신이었던 자가 인간의 눈치를 보는 것은 대륙 그 어느 곳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모습이었기에 불릿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매우 잘하셨소이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피해가 극심했을 것이오. 정체를 알리지 않은 것도 잘한 일이오. 당신이 알려지면 혼란이 일어날 테니까.”
물경 10만, 이젠 9만여 명이지만 어쨌든 이런 대군도 상대하기 어려운 악마 수천 마리를 홀로 다친 곳 없이,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처리한 우락크가 세상에 알려지면 대륙은 아주 난리가 날 것이다.
당장 각국의 왕들이 그녀를 모셔가려고 사신을 보낼 것이고, 그러다 보면 서로가 부딪혀 대륙이 뒤집혀도 몇 번은 뒤집히리라.
그러니 인간사에 별달리 관심이 없는 그녀와 바포 변경백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모르는 체하는 게 나았다.
“…….”
불릿의 칭찬에도 말이 없는 우락크. 기막으로 소리를 차단하고 있긴 했으나 그건 외부로 소리가 나가는 것을 막는 것이지 서로의 의사소통엔 장애가 전혀 없었다.
“후야얌….”
자다 깨서 그런지 흙덩이가 하품을 길게 내뱉고 있자니 드디어 우락크의 입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런가.”
“?”
그냥 칭찬을 했을 뿐인데 대답의 딜레이도 길고 말까지 더듬는다.
주변에 라이트 마법으로 인한 광체구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지만 오히려 너무 밝은 밝기에 음영이 져서 서로간의 얼굴이 잘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한발 앞으로 다가가는 순간, 그녀가 주변으로부터 소리가 들려왔다.
웅성웅성-
“각하, 괜찮으십니까?”
언제 다가온 것인지 셰실리코프가 불릿의 곁으로 다가와 물음을 건넸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던 불릿은 어리둥절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니 어느새 많은 인원이 불릿과 흙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사일런스를 사용했습니까?”
자베르는 자신보다 더 높은 서클의 마법사가 공간차단이나 사일런스라도 사용한 줄 알고 셰실리코프와 함께 다가왔던 것이다.
“그게 아니….”
문득 우락크가 있던 자리를 쳐다보니 그녀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어 새벽의 찬 기운만이 그곳을 메꾸고 있었다.
“어라? 언니 어디 갔, 읍읍!”
“쉿,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읍…푸하!”
“대체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흙덩이의 입을 불릿이 틀어막자 사람들의 궁금증은 늘어갔고 이에 불릿은 태연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별 일 아니다. 흙덩이가 잠이 덜 깼는지 올리비아를 찾던 모양이더군.”
“아닌데, 언니 딴 사람…으븝!”
“유실리아인가보군. 살아있는 마물이 있는 것 같은가?”
화제전환이 부자연스러웠지만 지금 흙덩이의 잠꼬대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자베르는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불릿에게 전달해주었다.
“백작님은 겪어보셔서 아시겠지만 놈들의 정체는 악마의 심장, 악마군주들이 기르는 놈들이니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아스타로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이놈들이 접근할 때까지 우린 아무도 몰랐다는 것과 누가 이렇게 만들었고 왜 이런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불릿은 능청스럽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행동을 취하며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다시 잠에 들기엔 어중간한 시각이었기에 이동할 준비를 서두르게 명령을 내렸다.
악마군주와의 대면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의 새벽이었다.
* * *
콰앙!
쾅, 쾅-
콰아아아앙!
“짜증나아아아!!!”
가죽 본디지를 착용한 매력적인 여성이 철제로 이루어진 탁자를 완력만으로 찌그러뜨리며 화를 풀고 있었다.
위에는 기형학적인 마법진과 마정석인지 수정구술인지 모를 무언가가 깨져서는 파편을 이루는 상태, 그녀의 가녀린 팔만으로 이러한 일을 해내는 모습은 이질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더욱 이질적인 것은 잠자리 시중이나 들법한 차림의 그녀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흑색로브의 사내들이었다.
덜덜덜-.
사내들은 벌벌 떨면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래도 그 중에서 수장이라 여겨지는 자가 앞으로 나서서 조심히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여, 여신이시여, 부디 진노를 푸시옵소서….”
불타버렸는지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과 반쯤 타버린 머리칼을 가진 사내의 말에 이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여성은 앙칼지게 대꾸를 하였다.
“이게 다 네놈들이 똑바로 못해서 벌어진 일이잖아! 왜 시키는 일도 똑바로 못하는 거지?! 어엉?”
“여신이시여….”
“닥쳐! 부르지도 마! 이 무능한 것들아!”
“부디 화를 푸시옵소서, 아스타로트시여!”
“화를 푸시옵소서!”
“푸시옵소서!”
수장을 포함한 모든 검은 로브의 사내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바닥에 넙죽 엎드리니 화내는 모습에서도 색기가 풀풀 풍기는 아스타로트가 발을 디밀었다.
꾸욱…
그녀는 수장의 반쯤 타버린 머리를 하이힐로 밟았는데, 철제를 우그러트리는 완력으로 머리를 누르니 수장의 입에서 고통스런 음성이 흘러나왔다.
“여, 여신, 커허, 이시여!”
“어쩜 이렇게 무능할까? 이 몸이 밑밥을 다 깔아주고 판도 마련해줬는데 그걸 다 죽게 내버려둬?”
현재 지상에 강림한 악마군주는 아스타로트 단 하나, 그녀는 탄타로스라는 상급 마족을 제물로 삼아 온전한 힘을 가지고 강림할 수 있었기에 자신의 수족도 마음껏 소환할 수 있었다.
만약 탄타로스가 신격을 지닐 수 있는 최상급 마족에 근접한 마족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계획도 실현되지 못했으리라.
악마조차도 까마득할 정도의 긴 세월동안 꾸며온 계획이었는데 하찮은 인간 흑마법사가 단순히 문을 열어서 악마의 심장이라 불리는 자신의 수족을 보내는 일조차 실패했으니 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 정말 피곤해, 왜 그런지 알아?”
꾸욱, 꾸욱-.
“끄아악! 제발 용서를!!”
두개골이 으깨질 듯한 고통에도 차마 머리를 빼지 못하는 수장를 바라보던 아스타로트는 비명을 듣자 어느 정도 분노가 수그러드는지 바짝 섰던 눈꼬리가 아래로 늘어졌다.
“호호, 듣기 좋은 소리도 낼 줄 알잖아?”
“끄으으….”
“라스불그, 이제 진짜 코앞까지 왔으니 실수하면 안 돼? 알았지?”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아, 오늘은 침대에서 뒹굴어야겠다-.”
흑마법사의 수장, 라스불그의 뒤통수에서 발을 뗀 아스타로트는 자신의 옆에 인형처럼 서있던 아틱 커맨더에게 안기더니 한쪽 다리를 들어 그의 허벅지를 감았다.
“이렇게 짜증나는 날엔 한바탕 뒹구는 것만큼 좋은 건 없더라?”
“…….”
“호호호.”
아스타로트는 악마군주이기도 했지만 원래는 사랑의 여신이었다.
그 중에서도 다산을 상징해서 그런지 창녀취급을 받기도 했으나 지성(知性)이 뛰어나기도 했기에 그녀를 얕본 숱한 신들이 남성기를 잃기도 했다.
너무 악독한 손속에 악마로 분류되어버렸지만 어디까지나 신격을 지닌 신이라는 소리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근본이 무엇인지 잘 알았기에 성(性)이란 것을 즐겼다.
“그래, 조금 아쉽기야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니까.”
아스타로트는 이후의 일을 생각하면서 아틱 커맨더의 몸을 더듬거리고 있었다.
마치 이지를 상실한 것처럼 표정변화 없이 멀겋게 서있는 커맨더였으나 하물만은 벌떡 서서 우렁차게 기침을 토해내는 중이었다.
그녀의 손길 하나하나에 반응해 움찔거리던 하물은 이내 옷을 뚫을 기세로 바지를 적셔갔기에 충분하다 여겼는지 아스타로트는 아틱 커맨더의 입술을 벌려 이빨을 핥아갔다.
“츄르릅-, 너네는 그만 가봐, 쭈웁쭈웁…. 뭐해, 구경났어?”
그녀의 축객령에 흑마법사들은 고개를 깊게 조아리며 밖으로 물러섰고, 둘만 남게 되자 아스타로트의 빨간 입술에서 달콤한 향이 흘러나왔다.
“참지 않아도 돼, 날 먹어.”
아스타로트의 속삭임에 석상처럼 무표정하던 아틱 커맨더가 그녀를 돌로 된 탁자에 눕혔다.
쿵!
“넣는다.”
푹!
“아앙!”
애무도 없이 다짜고짜 박아넣는 아틱 커맨더였으나 아스타로트는 오히려 좋다는 듯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쌌고, 내부는 둘의 질척임으로 가득 채워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