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0 마지막을 향해 =========================================================================
그들이 연합한다면 불릿이라 할지라도 단순히 윽박지르는 것만으론 대응이 불가능했기에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면 아군의 피해를 적게 만들기 위해 정령술을 펼쳐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몬스터가 아닌 인간을 살육해야 하는 흙덩이는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 쓰레기들의 저항을 딛고 통합을 이루더라도 피폐해진 루드밀라를 란푸스 왕국이 밀고 들어올 가능성이 농후했다.
저 욕심 많은 군벌들에게 평화적인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이므로 불릿은 자신의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독식한다고 하면 반발도 심할 것이고, 기존에 쌓아왔던 좋은 인식도 무너지겠군.”
“그렇습니다. 설사 투툰께서 나서신다 하더라도 피가 흐르는 것만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외부에서 온 자들이니까요.”
루드밀라 사람들의 성향은 천성이 선하다. 하지만 외국에서 온 자들은 그렇지 않았고, 세월이 흐르며 옅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포악한 핏줄이었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주변의 루드밀라 토박이들까지 탐욕에 물들어가 선한 성향을 잃어갔다.
이미 향락에 취한 귀족들에게 불릿이나 투툰의 정책을 실행하라는 말은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것과 비슷할지 몰랐다.
“…투툰의 의지라고 생각해도 되는가?”
단순한 조언이라고 보기엔 태도가 강했기에 슬쩍 떠보는 말을 건네니 의외로 잘 걸려드는 카미스 백작.
“역시 바포 백작의 눈을 피하긴 어렵군요. 맞습니다, 전날 메시지 마법으로 투툰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흘러갈 것 같다’라고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정확히 예상한 투툰 후작에게 불릿은 오싹함을 느꼈다.
이것은 토벌군에 참여한 군벌들과 그들을 다스리는 불릿을 낱낱이 꿰뚫어보지 않고선 불가능한 심안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 * *
‘다시 생각해도 투툰의 관찰력은 비상하단 말이지.’
개개인의 성향을 알지 못한다면 예상을 빙자한 예언을 할 수 없었기에 불릿 자신도 한 지역의 군주임에도 두려움이 일 것 같았다.
‘그래도 이젠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니까.’
홀로 모든 것을 견디던 때보다 위기는 많았어도 지금이 더 행복한 불릿이었다.
그는 눈앞에서 시시덕거리며 쌓여가는 전리품에 긴장감을 잃은 자들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심처에 다가가는데 습격의 질은 갈수록 떨어진다. 이는 결코 놈들의 전력이 떨어져서가 아닌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는 것이므로 정신을 바짝 세우도록.”
“그리하겠소!”
“알겠습니다.”
“후후, 어차피 저희가 이길 테지만요.”
대답은 씩씩하게 했으나 여전히 철없는 행동을 보이는 귀족들.
이러니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평민들의 주머니를 탈탈 터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어차피 말로 해서는 들을 자들도 아니었으니 군대의 지휘권을 불릿에게로 모은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어쨌든 주의들 하시오, 우린 놀러 온 것이 아니니까.”
“크크큭, 죽던지 말던지.”
다 끝나간다고 생각하던 이때, 가만히 있던 구울 백작의 중얼거림이 막사 안에 울려 퍼졌다.
사뭇 불쾌한 말이었기 때문인지 한껏 기세가 오른 귀족들이 저마다 입을 열었다.
“말이 심한 게 아니오?”
“다 같이 목숨 걸고 싸우는 동지이거늘….”
“쯧쯧, 사람이 야박해서는.”
이 기회를 빌어 구울 백작을 찍어 누르려는 속셈인지 그나마 힘이 있는 사람부터 없는 자들까지, 웅성임이 심해질 정도로 탄압이 심해질 때 불릿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너희가 죽으면 그땐 땅따먹기나 하지 뭐, 크크.”
“뭐, 뭐라고?”
황당한 소리에 누군가 혼잣말이 튀어나왔는데 구울 백작은 가차 없이 거기에 쐐기를 박아넣었다.
“뭐, 뭐라고? 크크큭! 뭐, 그렇다는 거다.”
이런 어물쩡 넘기려는 태도가 오히려 불씨는 지피는 것이었으니, 들떠서 앞뒤 분간을 못하던 군소군벌의 군주들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꿀꺽.
누가 삼키는 침소리였을까, 아마 한 명일 수도 있고 여러 명일 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위기의식을 느꼈고, 눈앞의 이득에 눈이 멀어 어떻게 행동했었는지를 떠올렸단 사실인 것이다.
“허, 허험. 총사령관의 말을 따라야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우리를 이끌어주는 바포 백작을 믿어야지요!”
“내가 미쳤지, 미쳤어….”
“내일부턴 뒤에서 해야지….”
애써 두려움을 밀어내려고 큰소리를 치는 자들과 중얼거리며 자신을 자책하는 자들이 어울려 소란스러워지자 카미스 백작이 중재에 나섰다.
“진정들 하시오. 바포 백작의 지휘에 따르면 더 이상 죽는 이도 없을 것이고 흑마법사의 잔당도 무사히 토벌할 수 있을 것이오.”
“믿을 수 있는 말입니까?”
“그럼 지금까지 먹은 식량값이라도 내놓을 것이오? 내 알아보니 아예 병사들의 끼니를 대영주께서 지급하는 것으로만 해결하는 놈들도 있던데, 계속 그러면 투툰께서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헉!!”
“더헉!!!”
막장까지 치달으려는 놈들의 행각에 투툰이라는 이름이 나오니 헛숨을 들이켜며 침묵하는 귀족들.
사태도 진정시키고 경고도 주자 카미스 백작은 불릿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워낙 생각 없이 말하는 자들인지라.”
카미스 백작이 사과할 이유는 없었으나 그가 왜 이렇듯 고개를 숙이는지 불릿도 아는 모양이다.
상석에 있던 불릿도 슬쩍 엉덩이를 들고서 고개를 숙인다.
“그런 말씀 마시오, 어차피 군율에 의거 그릇된 행동을 하는 자는 합당한 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욕망을 채우는 것 말고도 그렇습니까?”
“진영을 지키지 않고 몸을 사려도 그리 되겠지.”
“설마 그런 자가 있겠습니까? 그 정도면 목이라도 베일 텐데.”
“그러게 말이네, 후후후.”
“하하하.”
왕국 최대 파벌의 세 사람이 자꾸 으름장을 놓으니 다른 귀족들은 숨을 쉴 수 가 없었다.
‘젠장, 자꾸 왜 저러는 거야?’
‘조금밖에 못 챙겼는데….’
그들이 회의를 진행하고 있을 때, 밖에선 우락크가 활발히 몸을 놀리고 있었다.
스응-
- 쿠르륵….
로브로 몸을 둘둘 만 전사의 검이 허공에 은빛 궤적을 그리니 마계의 마물인지 온 몸에 새까만 가시가 송송 난 괴물이 얕은 신음을 흘리고 바닥에 처박혔다.
생긴 것만 보면 성게나 밤송이처럼 생겼으나 크기가 1미터 50센치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혐오스러울 지경이었다.
저 새까맣고 기다란 가시가 몸통에서 튀어나가면 하나의 폭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밀집대형을 유지한 군대를 상대로는 효과적인 공격수단, 방패로 막아서기엔 하나하나의 공격이 장창투척과 비슷했기에 기사도 아닌 병사들에겐 무리였다.
스응-, 스응, 스응-
밤 스티드보다도 무시무시한 이런 괴물을 상대로 우락크는 조용히, 그러나 미세하게 진동하는 검으로 구름아래 어둠 속에서 홀로 춤을 추었다.
스응-, 스으응-
푸확!
몸을 한바퀴 회전하며 검을 휘두르니 약간 멀리 떨어져 있던 밤송이 괴물들이 부서지듯 죽어버렸다.
촤악-.
그녀가 검을 아래로 내리며 털어내니 주변엔 물경 수천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시들이 잔해로 남아있었다.
고오오…
하나의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엄청난 전투가 있었음에도 저 멀리 숙영지의 불빛은 흔들림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아무도 모르게 괴물을 전멸시킨 우락크는 자신과 삶을 함께 해온 검을 매만지며 숙영지로 향했다.
“조금만 더 있다 갈까?”
검에 대고 마치 사람과 대화를 하듯 나긋하게 읊조린 그녀의 물음에 검으로부터 떨림이 전해져왔다.
우우웅-
그녀의 물음에 대꾸라도 하듯 공명음이 울리자 우락크는 애틋한 시선으로 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조금만 더 걷다가 들어가자.”
터벅, 터벅.
괴물의 사체사이로 거닐며 우락크의 앵두 같은 입으로부터 허연 입김이 올라왔다.
“하아…, 끝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그녀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는 본인을 제외하곤 아무도 몰랐다.
* * *
“우왁!”
“이런 씨발, 이게 뭐야?!”
“비상! 비상! 전 병력 집하압-!!”
새벽이 되자 우락크가 만들어낸 광경을 다른 사람들도 발견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모든 인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라이트!”
파앗-
횃불만으로는 어둠을 물리기 어려워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빛을 만들어내니 혐오스런 광경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우웨엑!”
투두둑!
“윽, 드럽게 진짜!”
“야야, 게르늄은 일단 뒤로 물려라. 나까지 쏠릴 것 같네.”
“우욱….”
“이 자식이, 참아!”
우락크가 어떤 방식으로 죽인 것인지 모르겠으나 괴물들의 뾰족뾰족한 가시만 남고 그것을 고정시켜주는 몸체만이 액체처럼 바닥에 흡수되고 있었다.
불모의 황무지는 물을 흡수할 수 없는 곳, 그래서 그런지 피로 추정되는 검붉은 액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서서히 땅속 깊은 곳으로 사라져갔다.
이런 광경은 새벽의 으스스함을 더해 마치 괴물의 영혼이 저승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와중에 역한 냄새는 비몽사몽한 사람들의 비위를 자극해 구토를 유발한 것이다.
“이것은….”
때마침 이러한 현장에 다가온 것은 이번 토벌군을 지원하는 책임자 라르벨로 자베르였다.
그는 살짝 무릎을 꿇으며 날카로운 가시의 중간을 잡았다.
치이익-.
“으음….”
만지자마자 연기가 올라오며 역한 냄새를 풍기는 가시에서 손을 뗀 자베르는 약간 뭉그러진 자신의 손가락을 쳐다보다가 입술을 웅얼거렸다.
“큐어 포이즌, 힐링.”
그와 동시에 반짝이는 빛가루가 손가락의 주변을 둘러싸고서 사라지니 뭉그러지던 상처가 싹 사라져버렸다.
그 후 자리에서 일어선 자베르는 저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괴물의 사체를 보며 절로 독백이 흘러나왔다.
“악마의 심장….”
자베르의 입을 통해 나온 단어는 자칫 연합군을 전멸시킬 수 있던 악마의 이름이었다.
우리는 악마의 심장이라 불리는 놈들이 마물이 아닌 악마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스스로 생각을 할 수 없는 놈들이긴 했으나 이놈들의 특징은 72악마군주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들, 두려움을 모르는 놈들이었기에 전멸시키기 전엔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섬기는 마족의 마기를 먹고 자라는 놈들이었기에 악마군주급이 아니라면 키울 엄두도 낼 수 없었는데, 우락크가 이런 놈들을 상대로 손쉽게 죽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만이 아는 독특한 방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놈들이 일제히 발사하는 가시에 온몸에 구멍이 송송 뚫려서 시체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놈들이 왜 여기에…, 아니, 누가 이놈들을 이렇게….”
불릿이라 할지라도 이놈들과의 전투에선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길쭉하고 강력한, 그러면서 독까지 품은 가시공격으로부터 몸을 숨기는 것만도 벅차리라.
돌벽을 설치하면 연합군의 공격수단은 매우 제한될 것이고, 설치를 하더라도 놈들은 가만히 멈춰있는 것들이 아니기에 큰 효용은 없었다.
불릿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베르가 판단하기에 이건 불릿과 그의 아내 흙덩이가 만들어 놓은 결과는 절대 아니었다.
애초에 그들이 나섰다면 엄청난 폭음이 뒤따르기에 아무도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