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9 마지막을 향해 =========================================================================
종이로 감싼 물품의 정체가 과자였나 보다. 그래서 어쩐지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오나 싶던 케인은 포장지를 부스럭거리며 깠다.
그러자 식욕을 자극하는 곡물냄새가 피어오르며 비어있던 위장에서 어서 들여보내라고 문을 두드린다.
“꿀꺽.”
영지에서도 간식거리는 거의 먹질 못했었다. 기사에게 있어 검과 갑옷, 그리고 말은 필수적이었기에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던 케인.
드디어 한입 와사삭 베어 물자 손가락 마디 크기의 과자가 부서지며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바삭, 와삭.
“우물우물….”
약간 달콤하면서도 뭔가 알 수 없는 이상한 맛이 나 말로 표현하기 미묘한, 그런 애매모호한 맛이었다.
맛이 없는 것은 아닌데 이 알 수 없는 맛이 설탕의 달콤함을 중화하는 듯해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이게 대체 무슨 맛이지?”
분명 먹을 만은 한데 ‘맛있다!’라고 할 정도의 음식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왕 준 것 배는 채울 수 있었기에 입도 심심했으니 조금씩 깨물어 먹었다.
“으음…, 아. 바포 백작님께는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겠구나.”
맛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식량을 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할 일이었다.
한 명당 하루에 하나씩의 끼니와 간식까지 챙겨주니 토벌이 끝날 때까지의 시간을 생각하면 한 달이라 생각해도 어마어마한 비용이 소모되었다.
그것을 온전히 홀로 감당한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돈이 소모될까?
아, 물론 이건 케인을 비롯한 대다수의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으로, 불릿은 전혀 금전적 손해가 없었다.
어차피 남는 잉여 식량을 나눠주는 것일 뿐이었으니까. 맛이 없어서 팔리지도 않는 그런 것 말이다.
게다가 내년에 있을 농사에선 제대로 된 맛의 곡물을 기를 수 있으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불릿이라고 무조건적인 지원을 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하지 말라는 거냐?”
병사가 케인의 혼잣말을 듣고 말리자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건 절대 음식의 맛 때문만은 아니리라.
“저희 같은 사람만 주변에 수백 명은 보이고 거기에 둘러보지 못한 이들까지 합하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엄청 붐빌 테니까 내일쯤 소식을 전하는 게 어떻습니까?”
“아, 그도 그렇겠군. 흠, 이거 미안해서 원.”
흑마법사 토벌이야 모두의 의무나 마찬가지, 오히려 자신까지 포함해 11명밖에 못 와서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신경을 써주고 있으니 바포 백작에 대한 호감이 한껏 상승된 상태.
“돌아가면 영주님께 얘기해드려야겠어, 바포 백작님과 거래를 트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여기저기서 불릿에 대한 호감이 상승되어가고 있었다.
* * *
“1열 창 들어!”
처처처처척-
수백, 수천에 이르는 병력이 일시에 창을 들어 또 다시 습격해온 몬스터군단을 상대로 자세를 취했다.
아무리 정찰병을 운용해도 갑자기 나타나는 놈들의 습격은 막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멀어도 300미터, 심하면 100미터 내외에서도 발견되었으니 뭔가 있어도 있는 모양이었다.
“죽음의 대지!”
맑고 고운 음성이 울려 퍼지는 순간 땅으로부터 3미터에 이르는 송곳이 백여 개가 치솟아 오르며 파괴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슈슈슈슈슉!
- 쉬이이익!
“끼아아아악-!”
자이언트 스콜피온은 이젠 가장 기본적인 습격몬스터가 되었고, 거기에 앞으로 나아갈수록 마계의 온갖 생물들이 그들을 가로막아 섰다.
그러나 이런 강한 마물들도 흙덩이의 정령술이면 한 방에 비명횡사를 했으니, 이렇게 뭉쳐있는 놈들이라면 몰살도 가능했다.
쿵, 쿠궁-.
덩치가 작은 놈들이 없었기에 송곳이 빠져나가면서 스르륵 땅바닥에 처박히니 육중한 울림이 불모의 황무지를 울렸다.
이렇게 몬스터의 밀집이 심한 곳은 불릿의 지시에 따라 흙덩이의 정령술이 펼쳐졌으니 마구잡이로 나서는 것보다 더욱 큰 효과를 낼 수 있었다.
흑마법사들도 멍청하진 않아 현혹한 몬스터와 소환한 마물을 흩어서 공격시켰지만 그런 방식으론 9만에 달하는 인간을 상대로 이길 수가 없었다.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 전투는 밤 스티드다 없었다곤 하나 수월하게 승리하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이다.
“승리했다!”
“와아아아!!”
“이런 식이라면 금방 끝나겠는데?!”
“바포 백작님 만세! 작은아씨 만세!”
“만세! 만세!”
몇 번의 전투를 이런 식으로 쉽게 승리하니 병사들은 물론, 군벌의 패자(霸者)들까지 환호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과연 우리 왕국을 지키는 수호신이야!”
“누가 아니라나? 역시 진(眞)의 이름을 계승하는 자는 뭐가 달라도 달라! 와하하!”
가장 큰 공을 불릿에게 양보하고 있었지만 그들도 불릿과 흙덩이가 있기에 처음 격돌 이후 피해가 미미할 수 있었다는 점을 깨닫고 최고공로의 자리는 양보한 듯했다.
그러나 2순위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기에 투툰 후작의 심복 카미스의 눈치를 보면서도 나쁜 짓은 아니었기에 더욱 열심히, 누구보다 많이 몬스터와 마물을 잡으려고 힘을 내었다.
“생각보다 반응이 더 좋은 것 같네.”
“내가 했어, 흙덩이가 했어!”
“그러엄, 누구 아내인데? 당연한 결과지.”
“헤헤헤.”
불릿은 흙덩이가 이러한 일로 충격을 받지 않도록 일을 마치고 난 후에는 칭찬과 스킨십을 비롯한 애정행각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주었다.
흙덩이가 충격을 받는 부분이 살육현장을 목격했을 때인데, 그걸 보여주지 않으려고 기술을 펼친 후에는 곧바로 마차에 오르도록 만들었다.
몬스터를 하나둘 죽였을 때와는 다르게 수천 마리가 죽어있는 광경은 느낌부터가 달랐기에 그녀를 적응시키더라도 이러한 전장은 아니었다.
“출발하도록.”
불릿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는 앞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이런 대규모 공습이 있고나면 마정석과 사체에서 돈이 될 만한 부위를 추려야 했기에 얼마 못 가서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첫 공습 때는 후속부대에게 그러한 해체작업을 맡겼는데, 인원이 부족해서 그런지 속도도 느렸고 두 번째 때는 후속부대가 습격받기에 이르렀다.
이걸 포기하기엔 너무도 막대한 금액이 오고갔고, 무엇보다 이걸 가지고 흑마법사들이 또 다른 수작을 부릴 수 있었기에 반드시 회수해야 했다.
그래서 불릿이 선택한 방법은 전투 후에 인원을 반으로 나눠서 1군은 미리 숙영지를 만들고, 2군은 해체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1인당 1마리씩 맡는다고 쳐도 순식간에 끝나고, 거기에 몬스터가 인간보다 많은 경우는 없었기에 도움을 받으면 더욱 빨리 끝났다.
이런 식으로 매일 번갈아가며 하니 불만은 있지만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위험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오늘도 마정석이 풍년입니다!”
“이거이거, 피해에 대한 보상을 이런 식으로 보상받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구려.”
“흐흐, 난 오늘 내 손으로 셋이나 목을 베었소!”
“오오오, 대단하오!”
“와하하하!”
어두운 분위기가 연출되어야할 임시 회의실이 기대에 부푼 군벌들의 대화로 화기애애함을 연출하고 있었다.
각고의 회의 끝에 마정석의 분배방식은 보다 많은 전과와 역할을 한 자에게 배분이 돌아가도록 했다.
그러다보니 경쟁이 과열돼 의욕만 앞서 진영에서 이탈했다가 죽임을 당하는 영주도 몇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에게로 돌아올 보상이 더 많아지자 애도도 잠시,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는 그들이었다.
‘언제고 갈아치워야 할 것들.’
실질적으로 이들을 섬기는 병사나 기사들에겐 별다른 혜택이 없었기에 불릿은 투툰 후작의 심복인 카미스와 밀담을 주고받았었다.
“이번 토벌로 얻는 부산물을 토대로 저 쓰레기들을 밀어버리는 게 어떻겠는가?”
카미스는 불릿처럼 백작의 작위에 스스로의 영토도 있는 상태.
바포 변경백의 절반정도의 넓이였으나 그 영토는 오직 백작 혼자서만 다스리는 영지, 나눠먹는 것 자체가 없었기에 카미스는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투툰 후작의 심복이며 그의 가문도 명가로 이름 높았고, 검술 실력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러니 불릿에게 꿇릴 게 없는 그였으나 불릿에겐 여전히 하대를 받고 존대를 해주었다.
“그들이 못마땅한 것은 알겠지만 그들 또한 필요한 자들입니다.”
“…? 그런 쓰레기들이 어디에 필요하단 말인가?”
불릿이 보기에 그들은 재활용도 불가능한 썩은 음식물이었다.
곰팡이에 온갖 균이 득실득실해 비료로도 쓸수 없는 자들을 어디에 쓰겠냐는 뉘앙스로 물으니 카미스는 쓸곳이 있다는 답을 내놓았다.
“백성들은 어리석습니다. 대영주께선 언제나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쳤고, 변경백에 속한 백성들이 당신을 좋아했기에 잘 모를 수도 있으시겠지만 모든 백성들이 좋은 정책에 좋은 반응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군주는 아랫것들을 생각해 그들에게 이익이 돌아갈 수 있도록 자신이 조금 손해보고, 덜 풍족하게 살 수 있더라도 정책을 펼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을 펼쳐도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으면 혜택을 누리던 자들은 그게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인 줄 알고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불만이 터져 나오고, 결국엔 참다못한 군주는 어차피 좋게 해도 좋은 소릴 못 들으니 자신에게 유리한 정책을 펼치게 된다.
그 후엔 이미 백성들을 안 좋게 바라보는 시선만이 남게 되어 뭘 하더라도 ‘어차피 뭘 해도 불만만 터뜨리겠지’라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떠올라 같은 짓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투툰께서는 ‘군주론’에 입각한 일반적 정치만을 펼치고 계십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저희 투툰령의 백성들은 그 누구보다 풍족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지요.”
너무 잘해줄 필요도, 그렇다고 못되게 굴 필요도 없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딱 적당한 균형을 이루어 절차에 따라 일을 치른다.
때론 법에 따라 움직이면서도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한 명, 두 명 봐주다 보면은 결국엔 ‘쟤는 되고 나는 왜 안 되냐’라는 자가 등장할 것이다.
“평범한 것이라도 다른 쪽이 상대적으로 나쁘다면 평범함이 곧 좋은 것이 된다는 말이로군.”
“예, 그러니 굳이 저놈들을 밀어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 저런 쓰레기들이 존재한다면 불릿의 영토는 언제까지나 ‘어디어디보다 좋은’ 곳이 되어 불만 같은 것이 안 나올지 몰랐다.
“하지만 그리하면 그곳의 백성들은 언제까지고 괴로움을 겪어야 하잖은가?”
선군정치만을 펼쳐오던 불릿이 보기엔 이 또한 부조리의 하나였기에 쉬이 넘길 수 없었다.
자신이 여태껏 살아오며 실행해온 신념과 상반되는 생각이었기에 그랬던 것인데, 이에 카미스는 재차 그의 설득에 나섰다.
“바포 대영주께서 놈들의 징치에 나서시려면 반드시 피가 강이 되고 시체가 산이 될 것입니다. 이점을 명심하십시오.”
“으으음….”
투툰 후작의 도움을 받는다 쳐도, 구울 백작이 상황을 관망한다 하더라도 나머지 군소군벌들은 반드시 들고 일어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