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8 마지막을 향해 =========================================================================
대규모 살육장면을 보고나니 우락크는 잠이 오질 않았다.
그녀가 하루에 잠을 자는 시간은 매우 짧았는데, 이는 신격을 잃었더라도 마스터에 다다른 경지와 일반적인 생명체보다는 격이 높았기에 가능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30분에서 1시간 정도만 가수면을 취하면 충분했기에 말하자면 잠을 자지 않아도 됐다.
마차위에 올라서서 고고한 자태로 주변을 둘러보던 우락크는 조그마한 입술을 열며 나직이 읊조렸다.
“무슨 일인가, 인간의 아이여.”
우락크가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밝은 달빛을 받으며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락크님은 시장하진 않으신가요?”
“별로, 그다지.”
“그러시군요….”
“무슨 일인데 홀로 깨어있는 것이지? 너와 같은 여자들은 자고 있는데.”
우락크의 기감을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소드마스터와도 격이 다른 존재, 마스터라는 말 대신에 다른 호칭이 존재했다면 그녀는 그것으로 불릴지 몰랐다.
예를 들자면 마스터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하여 그랜드마스터라고 할까나.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요.”
“누구와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지? 대리자도 잠들어 있거늘.”
“대리자가 누구신지요?”
“불릿 폰 바포 백작을 말하는 것이다.”
우락크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이 몸은 괜찮으니 들어가서 자도록 하거라. 인간의 육체는 연약해서 수면을 필수적으로 취해야하니까.”
척 보기에도 루나는 수련 같은 건 하지 않았기에 여기에서 가장 약한 병사보다도 더욱 약해보였다.
“아니지, 잠깐….”
루나를 쳐다보던 우락크는 뭔가 이상했던지 마차 위에서 사뿐히 뛰어내렸다.
그러고선 루나의 팔뚝을 꽉 잡았다.
덥썩.
“어엇, 왜 이러세요?”
“…….”
루나의 놀란 음성에도 그녀는 팔을 놓지 않고서 동그랗게 떠진 루나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지이잉-
안광이 반짝반짝 빛나며 야생동물이라도 된 것 같았던 우락크의 눈은 이내 평범한 색깔로 돌아오며 루나의 팔에서도 슬며시 손을 놓았다.
그녀의 악력에 팔이 아팠던지 루나는 손으로 양쪽 팔을 조물락거리며 우락크를 바라보았다.
“너…그걸 사용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우락크의 말에 루나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해 했지만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우락크의 시선을 피할 순 없었다.
그렇게 1분가량 아이컨텐트를 지속하니 겨울임에도 식은땀을 흘리던 루나.
그녀는 이어지는 우락크의 말에 사실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생명을 불태우는 기술은 흑마법사들이나 사용하는 방법, 네가 진정 대리자를 섬기는 아이가 맞더냐?”
“어, 어떻게 아셨어요?!”
“목소리를 낮추라, 추궁하는 것이 아니니라.”
“헙!”
차가워진 손으로 입을 가리자 허연 입김이 손바닥을 타고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한동안 말을 못 잇던 루나는 우락크의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가자 조금 안심이 된 것인지 입을 가렸던 손을 내리며 말을 뱉었다.
“…어떻게 아셨나요?”
평생 살면서 단 한번 밖에 사용할 수 없는 기술이고 겉으로 드러나지도 않기에 가까이서 지내는 불릿조차 모르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막 만난 우락크가 단방에 알아보니 루나의 놀람은 극에 달해 있었다.
“지금이 밤이 아니고 주변에 너와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면 몰랐겠지만, 이렇게 보니 확실하구나. 나만이 알 수 있는 방법이니 다른 자에게 들킬 염려는 말려무나.”
“강하신 분들은 원래 다 그렇게 아실 수 있는 건가요?”
루나는 자신이 불릿을 따라온 이유가 있었기에 남에게 들킬 것을 가장 염려하고 있었다.
희생술은 자폭기술이었기에 남이 알게 되면 효과가 매우 미미해지는 기술이었다.
비밀이야말로 희생술의 핵심요인, 그러니 이런 질문을 하는 루나였다.
“그럴 일은 없다. 아마 이 대륙에서 오직 나만이 가능하겠지….”
중얼거림에서 ‘중간계에선….’이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루나는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서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가슴에 손을 모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던 루나는 옆구리에 매고 왔던 가방에서 보온병을 하나 꺼냈다.
“그래도 여자분이 이런 밤중에 나와 계시면 안 돼요, 이거라도 좀 드셔보세요.”
쪼르륵-
뚜껑을 컵처럼 사용하며 따라준 따뜻한 그것은 일부 부유한 자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커피라는 음료였다.
냄새는 향긋하나 맛은 걸레를 빤 것처럼 고약한 씁쓸함이었기에 취향을 정말 많이 타는 차(tea).
우락크는 짙은 갈색의 액체가 뚜껑에 졸졸졸 떨어지는 것을 보고선 입을 열었다.
“커피로군. 어느 지방의 것이지? 타카오피? 삐나? 향만 맡으면 산체코프의 것인 것 같기도 한데….”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그녀가 내뱉은 지명은 수천 년 전에나 있었던 커피의 명산지였는데, 그때엔 화폐라는 개념이 없어 물물거래가 활발했었다.
인간의 수도 적어서 지금처럼 대륙을 인간이 지배하듯 다니질 못했고, 육체적 능력이 강한 이종족들이 대세였던 고대의 시대.
그때를 떠오르게 만든 것이 지금 루나가 내민 커피의 향기였기에 잠시 추억에 젖어들었던 우락크였다.
“우락크님?”
“…마셔도 되는가?”
“물론이지요. 우락크님을 드리려고 가져온 것인걸요? 작은아씨께도 허락 맡았으니 어서 드세요, 식으면 맛이 없어요.”
“그러도록 하지.”
커피의 특징이야 수천 년이 지났다고 해도 기본적인 건 같을 터이니 우락크가 더욱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성의를 봐서 받아든 커피를 향부터 맡아보았다.
“흐음-.”
본래 커피는 향으로 마신다고 하질 않는가? 향을 맡으니 차가워지던 마음도 훈훈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 후 한 모금 마시는 짙은 갈색의 액체.
“후루룩-.”
커피의 기본은 아무것도 타지 않은 블랙, 씁쓸한 맛이 더욱 향을 살려주며 달달 볶아지는 커피콩을 떠올리게 만든다.
“독특하군.”
“네? 맛있긴 해도 평범한 커피콩을 썼는데요…?”
불릿의 특산품계획에 따라 베니스 남작령에서 기르는 향신료들은 저렴한 값에 비해 품질이 높다는 특징을 지녔다.
그렇다곤 해도 엄청 고급화된 것들은 아니었기에 우락크의 말을 루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칭찬을 하려는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것인가 싶었지만 연신 마시면서 독특하다는 말을 내뱉는 것을 보니 그건 아닌 듯 했다.
그렇게 연거푸 커피를 다섯 잔이나 마시니 루나는 우락크가 걱정되었다.
“그렇게 드시면 잠이 안 오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원래 커피를 아는 자들은 많이 마셔봤자 2잔이 끝이었다.
이유는 너무 많이 마시면 소변을 자주 누게 되었고 밤에 잠도 잘 오질 않아서 밤을 새야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고생하게 되는 음료였다.
홍차나 다른 음료도 이런 효과가 있었지만 커피는 유독 그런 효능이 짙었기에 조심해서 음용할 필요가 있었다.
“괜찮다, 나는 잠이 없으니까.”
“네? 안 주무세요? 후암…, 헛.”
슬슬 졸린 모양인지 루나가 저도 모르게 하품을 내뱉은 루나는 흠칫하며 우락크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우락크는 화가 났다기 보단 오히려 그녀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조곤조곤 말을 건넸다.
“어여 들어가서 자려무나, 인간은 잠을 자지 않으면 심신이 피로해진다 들었다.”
“네에, 고맙습니다….”
뭔가 이상한 말이었지만 자신을 걱정해준다는 것만은 확실했기에 감사인사를 전한 루나는 보온통을 챙기고서 꾸벅 허리를 숙인 후 하녀들이 머무는 막사로 종종걸음을 했다.
멀어져가던 루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우락크는 자신의 입안에 머무는 커피향에 취했는지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아아…….”
운명의 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 * *
끼릭, 끼리릭-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을 때 마차와 수레를 바리케이드로 사용해서인지 부서지거나 고장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이동하면서 기분 나쁜 소음을 듣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것은 미묘하게 기분을 짜증나게 만들었다.
“후우우, 춥다는 말이지.”
기사라고 해서 안 추운 것은 아니었다. 견딜 수 있는 체력이 강할 뿐이지 마나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주진 않는 것이다.
어느 곳의 가문인지 병사도 10명 남짓이었고 기사는 그 혼자뿐이었다.
그래도 실력은 나쁘지 않은지 간간히 눈이 마주치는 자들과는 고개도 숙이며 곧잘 인사도 주고받는 상태였다.
무시는 받지 않으니 그나마 그게 위안이라도 되는 상태.
“케, 케인 기사님.”
뒤에서 따라오던 병사중 하나가 말을 걸어오자 말의 고삐를 당기며 케인이라 불린 기사가 멈춰 섰다.
“배고파도 참아라, 내가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진짜 가난한 영지에서 온 모양인지 기사가 되어서 병사의 먹을거리 걱정부터 하고 있었다.
아니,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다짜고짜 대답한다는 소리가 저런 거라니 평소 어떤 대화를 주고받았을지 알만한 대목이었다.
그러나 병사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무언가를 내민다.
스윽.
병사가 내민 그것은 종이에 곱게 싸여있었는데, 겨울임에도 고소한 향기가 퍼지는 것이 절로 군침이 돌았다.
하지만 병사가 그것을 내민 이유를 케인은 알 수 없었다.
“이걸 왜 나에게? 훔친 것만 아니라면 어서 먹거라. 아직 갈 길이 멀다.”
배가 고프면 걷는 것도 힘들었기에 병사들부터 챙기는 케인.
자신은 영지에선 싸구려긴 해도 잘 먹는 편이어서 굶주린 적은 없었으니 여기서라도 병사들은 잘 먹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무장과 실력이 출중한 기사들도 저번의 습격에서 떼거지로 죽어나갔는데 언제 죽을지 모르니 밥이라도 든든히 먹여야 할 것이 아닌가?
“저희는 이미 먹었습니다, 바포 백작님께서 주신 보급품이니 얼른 드시지요.”
“백작각하께서?”
자신들의 소속이 임시적으로 바포 변경백에 들어섰다는 것을 케인도 전해 듣긴 했다.
자기들이야 워낙 수가 적은데다가 영주도 행차하지 않았기에 어디로 편입되든 이상하진 않았으나 연합군은 흑마법사를 토벌하고 나면 금방 흩어질 자들, 자신의 것을 나눠줄 이유가 없었다.
“혹시 이걸 먹고서 우리보고 전열에 서라는 것은 아니겠지?”
불릿은 소수 규모로 참여한 병력들의 경우 후방지역에서 활동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이유는 어차피 호흡을 맞춰볼 시간도 없었기에 따로따로 전투를 진행해야 했는데, 50명도 안 되는 소규모의 집단은 전술을 사용한답시고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었기에 보조나 하라는 의미에서 잡일 등을 맡겼던 것이다.
공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은 불만이 될 수도 있었지만 케인 일행은 무사히 돌아가는 것이 목표였기에 이러한 처사가 되려 고마웠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러는 것을 보니 바포 백작도 사람은 주변 군벌들과 같은 자였나보다.
그리 생각하고 있던 케인은 아직 끝나지 않은 병사의 말에 다시 한 번 놀람을 드러냈다.
“토벌이 끝날 때까진 하루 한 끼의 식사와 간식을 제공한다고 합니다.”
“뭐라고? 진짜 다른 수작은 없고?”
“어휴, 그 고마운 분께 대체 뭐라고 하시는 겁니까? 케인님이라 할지라도 말이 좀 심하십니다.”
“으, 으음. 내 실수를 했군.”
“자자, 식기 전에 어서 드시지요. 생각보다 먹을 만한 과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