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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정령사-226화 (226/241)

00226  마지막을 향해  =========================================================================

“그냥, 신기해서.”

이런 추위 속에서도 흙덩이는 정령력이 활성화 되서 그런지 원피스나 긴 치마와 같은 하늘거리는 복장만 고집했다.

지금도 흙덩이는 불릿의 허벅지를 베고 잠들어 있었는데, 뒤척임에 자꾸 원피스가 말려 올라가니 루나가 알아서 정리해주고 있었다.

그런 그녀와는 완전 상반된 우락크의 복장은 가죽갑옷의 위로 로브를 둘러쌌고, 얼굴은 후드를 깊게 눌러써 마치 마수의 숲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와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무엇이 신기하오?”

루나를 제외한 다른 하녀 넷은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왠지 불릿을 둘러싸는 듯한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어쩔 땐 변태인 줄 알았는데 어쩔 땐 박력도 넘치고, 신기한 아이구나 해서 그렇다.”

그녀의 기감은 불릿의 성 전체로도 뻗을 수 있을 만큼 넓고 또렷했다.

그렇기에 불릿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도 대강이나마 감지할 수 있었는데, 하루도 쉬질 않고 틈만 나면 그 짓을 했으니 변태로 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불릿은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으나 금세 대꾸했다.

“좋은 걸 어쩌겠소, 셋 다 소중한 부인들인걸.”

“…그래, 자애의 여신의 사위답구나.”

“무슨 뜻이오?”

“몰라도 된다, 변태 같은 아이야.”

“크흠.”

이 대화를 끝으로 마차엔 다시 침묵이 감돌고 있었는데, 약 1시간을 이 상태로 나아가자 정자세를 하고 있던 우락크의 빨간 입술이 열렸다.

“나타났군.”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바깥에서부터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흑마법사의 습격이 시작된 것이다.

“습격이다!”

“어, 엄청 큰 전갈이다아-!”

“비상! 비상! 양옆에서 밤 스티드가 달려온다!”

“밤 스티드부터 막아! 궁수 조준!”

펑! 콰아앙!

끄아악!

- 쉬익! 쉬이잇!

- 히히히힝!

마차 바깥으로부터 엄청난 폭음과 비명이 난무하자 불릿이 이를 확인하려 문을 여니 크레파토스가 이를 급히 막아섰다.

“나오지 마십시오! 지금 여기서 힘을 낭비하시면 안 됩니다!”

“상황이 어떻게 된 건가!”

“아무런 징조도 없이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밤 스티드 또한 마찬가지, 아무래도 흑마법사가 주변에 숨어있는 모양입니다!”

“으득, 우리가 당했을 때와 똑같군!”

순간 열이 확 오른 불릿이 마차에서 내리려하자 이번엔 셰실리코프가 말을 타고 다가와 이를 말렸다.

“안에 들어가 계시면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피해가 너무 크다, 막아야해.”

“밤 스티드만 천 마리가 넘습니다! 자이언트 스콜피온은 추정할 수도 없으니 절대 안 됩니다! 개인이 막아설 양이 아닙니다!”

밤 스티드가 천 마리면 불릿이 감당할 양이 아니었다.

밤 스티드만 하더라도 그러할 진데 자이언 스콜피온은 추산도 할 수 없을 정도라니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불릿이 막아선다 하더라도 그 순간을 노리고 아스타로트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바포 백작! 우린 어떡하면 좋겠소?!”

“허억, 헉! 우, 우익이 무너지려 합니다!”

“지시를!”

“명령을!”

‘시작하자마자 꼴이 말도 아니군.’

곳곳에서 연합군의 수장들이 다가와 답을 원하자 불릿은 그들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그들에겐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병사들에겐 미안하지만 일부러 위험성이 큰 외곽에 오합지졸 병력들을 배치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는데, 아무리 그래도 아직 이틀째인데 벌써 이러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었다.

그들이 알아낸 사실에 따라 불모의 황무지 중앙까지 향하는 길은 1주일이 넘는 시간이 걸렸고, 워낙 대군이기에 속도는 더욱 느려 10일은 족히 걸릴 것이다.

지금도 곳곳에서 폭음과 비명이 들리고 있었으니 결단을 내려야 했다.

“우익은 방패병 위주로 병력을 구성, 창병을 투입해 보조케 하고 궁병은 밤 스티드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대기하며 지시에 따라 일제사격.”

“알겠소!”

“좌익은 둘러싸이지 않도록 자리를 지키며 방진을 펼친다.”

“그리하겠습니다.”

“정면은 창병을 위주로 구성하고 둔기류를 가진 자가 있으면 창병이 그를 보조하며 공격한다. 할 수 있다면 팔랑크스 대형을 짜보도록.”

“파, 팔랑크스 말입니까? 그게 뭐지…?”

팔랑크스는 방어력을 앞세워 밀집대형을 갖추는 보병들의 전투방법이었는데, 방어구가 허술하고 방패가 없으면 실행하기 어려운 고급전술이었다.

그러니 끽해야 누비옷에 병사들이 직접 깎은 창날을 달은 무기를 가진 오합지졸 병력을 가진 지휘관이 알 리가 없었다.

“후우, 밀집대형을 하란 말이다! 자이언트 스콜피온은 그리해도 되니까 뭉쳐서 싸우란 말이네!”

“아아, 알겠습니다!”

“혹여 밤 스티드를 상대로 그러한 짓을 하는 미친 자는 없으리라 생각하네. 뭣들 하는가? 어서 가서 병력을 잡아!”

불릿의 호통에 후다닥 달려가는 지휘관들을 보며 그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뭐하는 것인지….”

이미 사전에 어찌 행동할지 얘기가 오고간 상황이었다.

설마 전장에 나서면서 누가 지휘권을 가질지 생각도 않고 움직이겠는가?

불릿은 전체적인 통솔은 자신이 맡기로 했지만 병력이 많기도 하고 각자 다스리던 방식이 있음을 고려해 기습적인 공격에 대해선 일반적인 전술운용을 사용하기로 합의했었다.

그런데도 막상 상황이 터지니 우왕좌왕, 어찌 행동할지 모르고 쪼르르 달려와 지시를 내려달라는 모습에 앞날이 깜깜했다.

“우웅, 오빠….”

“아, 일어났니?”

“흙덩이가 나서야해?”

“괜찮아, 좀 더 자고 있어.”

챙, 채채챙!

콰장창!

이히히힝!

갑옷이 부서지며 꽁꽁 언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자이언트 스콜피온의 집게에 수레가 산산이 조각나고 밤 스티드가 화살에 맞아 구슬핀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것까지.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잠을 잘 만큼 흙덩이의 간은 크지 않았다.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되자 그녀는 큰 눈망울을 깜빡이며 불릿을 쳐다보았다.

“사람 많이 죽어, 정말 가만히 있어?”

“여긴 우리가 나설 곳이 아니야, 문 닫고 들어가.”

“히잉, 사람들 불쌍해….”

“…….”

불릿도 마음 같아선 흙덩이와 함께 마물과 몬스터를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이런 대규모 전투에선 힘을 아껴야 했다.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도 적었고, 더 이상 아스타로트의 힘이 강해지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기에 한정된 시간 안에 진격을 해야 했다.

“이 몸이 나서야할 때인가?”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우락크는 자신의 힘을 사용해야하는 때라고 판단해 마차 밖으로 나서려했다.

그러자 불릿은 그녀보다 한발 더 빠르게 마차로 올라서며 억지로 그녀를 밀어 넣었다.

꾸욱…

“윽, 무슨 짓이더냐?”

“나가지 마시오, 이건 개인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힘을 내서 해결해야하는 문제이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너는 동족이 죽어나가도 괜찮단 말이더냐?”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우락크에게 불릿은 마차의 문을 닫으며 이에 대꾸했다.

“지금 왕국은 사분오열된 상황이오, 이런 상황에서 좋은 일로 모인 것은 아니지만 흑마법사라는 공통의 적이 발생해 힘을 모으게 되었소. 많은 이들이 죽어가겠지만, 이 위기를 극복하고 나면 이들은 같은 국민이라는 소속감을 가지고 분쟁을 줄일 수 있을 것이오.”

불릿의 발언은 그가 이번 사태를 얼마나 중히 여기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개인으로서 화가 나기도 했고 무능한 왕에게 실망도 가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드밀라라는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루드밀라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그가 뭣하러 란푸스 왕국의 진입을 거절했겠는가?

애국심이 없다면 변경에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그토록 척박한 땅을 좋아하겠느냔 말이다. 불릿의 가문이 친화력을 짙게 물려받지 않았다면 세력이 축소되고도 남았을지 몰랐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복잡하게 살아가는구나. 만일 내가 다시 태어나더라도 너희 인간처럼은 못 살 것 같다.”

결국 우락크는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도로 앉으며 팔짱을 끼었고, 거기서 고개를 아래로 숙이며 침묵하게 되었다.

로브를 뒤집어써서 심리상태를 알 순 없었지만 기분이 좋은 편은 아닐 것이다.

찰칵.

문이 닫히니 외부와 내부의 세계는 별개의 공간이 되었지만 소음방지가 된 마차라도 이렇게 큰 소리에는 안 들릴 수가 없었다.

끄아악!

누군가 맞은 것인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니 흙덩이는 그것이 듣기 싫었던지 양쪽의 귀를 겨드랑이가 노출될 정도로 꽉 막았다.

으아아악!

“힉!”

눈까지 질끈 감고서 부들부들 떠니 자연히 숨을 곳을 찾게 되었고, 그곳은 불릿의 품으로 종결되는 것이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힉, 힉!”

귀를 꽉 막아서 그런지 불릿의 목소리도 들리진 않았으나 차가운 공기가 들어온 마차에서 그의 온기가 따스이 다가오니 정신을 잃듯 잠이 들었다.

“새액…, 새액….”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잠든 그녀를 보니 불릿의 마음도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역시 이런 대규모 살육의 현장은…….”

“그 아이는 몬스터를 죽인 경험이 없나?”

흙덩이가 잠드니 자는 척하던 우락크가 의문을 제시했다.

평소 밝게 웃으며 불릿과 흙덩이를 대하던 루나는 이번 여정에선 별다른 농도 건네지 않고 조용하기만 했다.

그녀가 대신 말해줄 줄 알았던 불릿은 흙덩이의 가녀린 어깨에 자신의 외투를 덮어주고선 우락크에게 대꾸해주었다.

“많은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일에까지 익숙해지는 것은 지양하는 편이 좋다고, 나는 그리 여기고 있소.”

타인의 죽음에 무감각해지면 자신과 친인의 죽음에도 감각이 무뎌진다.

몬스터를 상대로는 과감해지지만 그건 흙덩이의 손길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아서 그럴 수 있던 것.

실제로 몬스터의 시체를 보면 그녀는 몸을 흠칫흠칫 떤다.

흥분하면 그렇지도 않지만, 그것은 평소엔 착하고 순한 사람이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리는 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불릿은 이런 흙덩이가 안타까우면서도 너무도 좋았다.

자신과는 달랐고, 보다 인간다웠으니까.

“익숙해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게 내가 신격을 잃고서 깨달은 것이다.”

“익숙해지지 않아도 살 수 있소, 다만 괴로울 뿐이지.”

“네가 아느냐? 소중한 자가 죽는다는 것을? 그때의 기분을?”

우락크는 수천 년의 기억을 되살리며 괴로웠던 순간을 회상했다.

조화의 종족인 엘프로 태어났음에도 혼돈의 시대에서 살아남으려 살육을 행하던 때를, 그러다 각성을 하고 숭배를 받으며 신격까지 얻어 신이라는 존재가 되던 때를.

그리고 사랑을 하고, 그녀에겐 눈 깜빡할 새처럼 짧은 시간이 지나 남편이 늙어 죽던 때를, 자식들은 늙고 늙어 몇 세대가 흐르니 어느새 누가 누군지도 모를 만큼 많은 죽음을 눈에 각인하던 때를.

그녀가 괴로워하니 마지막 순혈의 피를 지닌 자손들이 저주라고 일컬어지는 신격을 얻어 영원불멸의 삶을 살게 되던 때를, 그리고 지금처럼 오크라는 종족이 몬스터로 취급받으며 자신도 알아보지는 못하는 때를….

잊지 못하니 마음을 이리저리 패대기치고 깎으며 결국 고통이라는 바늘이 찔러와도 그대로 통과될 만큼 너덜너덜해졌을 때에서야 우락크는 비로소 신다운 면모를 갖출 수 있었다.

감정에 휘둘려서는 안 되는 영원불멸의 존재, 그것이 신이라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그게 옳은 거라고 지금껏 여겨왔었다.

수천 년간 정지되어 있던 감정이 다시금 되살아나니 그녀는 견딜 수가 없었다.

“가이아의 대리자여, 그 아이를 생각한다면 죽음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끄아악!!

이히-히히힝!

퍼엉!

슈슈슈슉!

그들의 대화 뒤로 비명과 폭음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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