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22 마수의 숲으로 =========================================================================
쿠구궁-
검은 집은 특이했다. 아니, 이게 집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각이 져 있었고 무엇보다 출입구는 돌 그 자체였다.
바윗덩이를 밀어내듯 우락크가 문을 옆으로 밀자 육중한 소리를 내는 돌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불릿이 흙덩이의 손을 꼭 잡고서 안으로 들어서니 누가 닫지 않았음에도 흡사 바위와 같은 돌문은 저절로 닫혔다.
쿠웅-.
“불릿, 나 무서워.”
낯선 곳의 어두운 실내에 들어서자 흙덩이가 두려워했지만 그녀의 정령술 한방이면 이곳도 초토화가 될 가망이 높았다.
“…오빠가 지켜줄게.”
“정말?”
“그럼, 난 너의 남편이잖아.”
“헤헷, 그럼 나 안 무서워.”
자신을 믿고 두려움을 물리치는 흙덩이가 기특해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우락크는 여전히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자신을 압박하는 것은 여러 군벌들로부터 자주 당해온 일이었지만 흙덩이까지 위험에 처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불릿이었다.
우락크는 불릿의 으름장에도 묵묵히 듣기만 하더니 곧이어 입을 열었다.
“그 아이를 네가 건드린 것인가?”
고오오…
아까처럼 살기를 풀풀 날리진 않았으나 우락크에게선 소름끼치는 무언가가 느껴지고 있었다.
흙덩이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불릿은 그의 기세를 온몸으로 받고 있었기에 이토록 찌릿찌릿하며 등골이 오싹한 기분은 난생 처음인 듯했다.
하지만 이젠 그도 예전과는 수준이 달랐기에 이런 기세만으로 정신이 흔들리진 않는다.
“네놈이 무슨 상관이지? 한낱 죄인이 말이야.”
“어랏, 오빠?”
말을 하면서도 자신을 끌어당기는 불릿의 손길에 놀라면서도 얼굴엔 미소가 어리고 있었다.
둘의 다정한 모습에 우락크는 기세를 접고서 말없이 그들을 쳐다보다가 풀잎사귀의 위장을 벗어던졌다.
부스럭, 푸스럭.
투둑.
스르륵 바닥에 떨어진 풀잎위장, 그러자 모습이 드러나는 우락크의 모습에 불릿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이아의 아이를 어떻게 네놈이 손에 넣을 수 있었지? 단순히 대리자에게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맡겼을 리가 없어!”
높은 고음의 째지는 음성에도 불릿의 입은 떡 벌어져 있었고, 흙덩이는 그런 그가 불안했는지 더욱 허리춤을 꼬옥 안으며 눈앞의 우락크를 경계했다.
우락크, 그는, 아니, ‘그녀’는 잎사귀 위장을 벗어던지자 굵직한 목소리에서 가느다란 여성의 목소리로 변했다.
모습은 오크들의 조상이라는 것과는 다르게 귀가 길고 뾰족한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서 불릿은 지금은 대륙에서 사라졌다고 전해지는 엘프를 떠올릴 수 있었다.
“엘…프…?”
‘신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기록에 의하면 엘프는 자연을 사랑하고 숲에서 동식물과 어울리며 이슬만 먹고 산다 전해지는 미의 종족이다.
그 아름다움과 이슬만 먹고 산다는 신비한 설정 때문인지 수백 년 전 인간들의 무분별한 약탈에 의해 그 개체수가 급속도로 줄어든 존재.
그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엘프에 대한 이야기였다.
분명 인간이 잘못했다는 내용의 이야기였지만 그것과 오크가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오히려 엘프는 오크를 싫어했다. 파괴만 일삼고 조화라는 것 자체를 모르는 오크를 누가 좋아한단 말인가?
그리고 오크가 그리 된 것은 수천, 어쩌면 수만 년 전부터 그랬을지 몰랐기에 지금과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우락크는 어디 있지? 너는 누구인가?”
“내가 바로 우락크이며 모든 오크들의 어머니이다. 무엄하구나, 인간.”
“그럼 넌 무엇이지? 모습만 엘프인 것인가?”
“헛소리하지 말거라, 요즘 대리자는 눈이 없는 것이더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불릿은 그녀가 우락크가 아니라 혹시 함정이 아닐까 거듭 물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멍청하다는 대답이었다.
꽤나 모욕적인 언사였기에 불릿은 황당함을 지우고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그 모습을 보고 우락크라는 신을 떠올리나? 아니지, 이젠 신격을 격하당한 데다가 죄인일 뿐이니 우락크가 맞는지도 의심스럽군. 다시 묻겠다, 넌 누구냐?”
“무례한 놈이로고…!”
부들부들-.
분노를 참지 못해 몸을 부들부들 떨어도 미의 화신이라 불렸던 엘프라서 그런지 엄청난 미모를 자랑했다.
그래도 불릿에겐 흙덩이가 제일이었다. …올리비아나 유실리아는 솔직히 조금 딸릴지도.
흙덩이도 명색이 신의 핏줄이니 완벽한 밸런스를 지니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닐까?
하지만 사랑이라는 양념이 첨가되었기 때문에 우락크가 아무리 예뻐도 올리비아와 유실리아가 더 좋았다.
이건 우락크가 좋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저 예쁘다는 것을 인정할 뿐이지.
“흙덩이를 봤으면 알겠지, 장모님이 너의 도움을 받으라 하셨다.”
“…….”
우락크가 말이 없자 불릿은 가이아 여신의 말이 맞는지 결과를 기다렸다.
솔직히 지금 흙덩이의 능력만 보면 딱히 우락크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마스터로 여겨지는 우락크도 무섭지 않을 지경이니 현세에 강림하면서 많은 힘을 소실했을 72군주의 선두 아스타로트도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아냐, 그래도 이왕이면 도움을 받는 게 낫겠지.’
이미 마족의 무서움은 결사대의 전멸을 통해 뼈저리게 겪었다.
그러니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리해야한다.
놈들도 아무 생각도 없이 불모의 황무지 중앙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을 것이기에.
그리 생각하며 기다리고 있자니 우락크의 앵두 같은 입술이 열리고 있었다.
“대리자여, 그대는 가이아가 어떤 이유로 나를 찾아오라고 시킨 것인지 알고 있는가?”
“아스타로트를 죽일 수 있는 것은 당신뿐이라더군. 하지만 우린 이미 마족을 죽인 전적이 있다.”
“결국 아스타로트가 1위가 되었군.”
“…뭔갈 아는 모양이지?”
서열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아스타로트가 가장 높은 서열이 됐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무언가를 안다는 점에선 틀림없으리라.
“이곳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고 있나?”
“글쎄, 문지기가 지키고 있는 곳이 문이지 않을까 싶군.”
“맞다, 멍청하진 않은 모양이구나.”
그녀는 다시 한 번 불릿에게 찰싹 붙어있는 흙덩이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우락크가 머무는 검은 장벽이라는 마을은 마계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그리고 불릿과 흙덩이가 함께 들어선 검은 집은 그 관문을 봉인하기 위한 장소라고 한다.
주변의 빈집들은 검은 귀 부족이라 불리는 우락크의 보조자들이 머무는 집이었고, 지금의 오크가 아니라 우락크가 초기에 축복을 내렸던 로열 오크들이라 한다.
그들과 함께 이곳에 지내며 마계로 통하는 문을 봉인하며 지키고 있었는데, 몬스터 웨이브 때 사단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곳이 마수의 숲이라 불려지는 진짜 이유는 마족과도 싸울 수 있는 마수들 중에서 가장 상위에 놓인 고대종 베히모스가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베히모스로 인해 마수의 숲은 마기로 오염되어갔고, 그로 인해 몬스터와 하급 마물이 들끓는 지역이 됐다한다.
무슨 이유에선진 모르겠으나 이번 몬스터 웨이브 때 베히모스가 잠에서 깨어났고, 놈을 다시 봉인하기 위해 로열 오크들이 힘을 소진하며 희생했고, 간신히 놈을 다시 잠재우고 나니 자신만 살아남아 여태껏 텅 빈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고 말하는 우락크.
“…신격을 잃은 몸은 너무도 나약하다. 베히모스를 죽이는 것은 어렵기에 봉인을 해야 했는데, 지금 이 몸으로는 아이들의 희생을 통해야 간신히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표정이었으나 그리 나약하지는 않았는지 입술을 앙다물고서 참아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불릿은 쏘아붙이려던 것도 멈추고 말을 흐렸다.
“그렇게…오크들은 소중히 여기면서 왜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리려 했지?”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죄라고 하니 나도 어떡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대륙에 피해를 입힌 것은 사실이기에 신격의 박탈을 받아들인 것이지.”
“으음…….”
하지만 그런 지나친 사랑 때문에 오크들은 자신들의 신을 잃고 오히려 퇴화하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이젠 마기까지 품어 몬스터 중에서도 악질적인 존재로 평가되고 있으니 오크들을 사랑하던 우락크에겐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기분일 것이다.
“그래도 아이들 덕분에 봉인을 더욱 튼튼하게 할 수 있었다. 이젠 더 이상 틈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야.”
“잠깐, 더 이상? 그렇다면 빠져나왔던 마계의 존재가 있단 소린가?”
“그렇다. 그게 바로 아스타로트와 탄타로스다.”
“탄타로스? 탄타로스는 누구지?”
아스타로트는 72악마군주의 일인, 그리고 지금의 사태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기에 불릿이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탄타로스는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기에 어떤 마족인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몰랐나? 탄타로스는 상급 마족 중에서 최상급을 노릴 수 있는 악마, 불의 악마 바르겐 아르아고의 채찍으로 불리는 놈이다.”
불릿이 모르는 것 같아 친절히 설명을 해주었으나 이것만으로는 지상으로 나와 무얼 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것만 가지고는 모르겠소. 놈이 한 일을 알려주겠소이까?”
“…말투가 갑자기 왜…, 음. 일이라, 마신숭배자들이 놈을 소환해내는데 성공했었지.”
갑자기 반존대를 해주는 불릿에게 어색함을 느꼈지만 원래 그런 사람인가보다 여기며 말을 잇는 우락크.
“설마 탄타로스라는 마족이 엘프족의 바람의 상급 정령사를 죽였소?”
“거기까진 나도 모른다. 다만 강한 힘을 지닌 동족이 놈이 죽던 때와 맞물린다는 것은 말할 수 있겠군.”
“그럴 수가….”
상급 마족이 그 정도인데 최상급 중에서도 단 72명만이 될 수 있다는 악마군주는 대체 얼마나 강한 것일까?
불릿은 자신과 흙덩이의 힘만으로도 아스타로트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안일한 자신감을 고쳐먹어야 했다.
그는 비록 검은 귀 부족의 도움을 받았지만 고대종 베히모스를 봉인할 수 있는 우락크의 힘이 반드시 필요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점.
“엘프라면서 오크의 어머니라니, 대체 무슨 소리오?”
분명 그녀는 자기가 엘프라는 것을 시인했다. 헌데 오크를 낳았다는 소리에 궁금증이 일은 것.
“당시 남편이 오크족 대전사였다. 뭔가 문제라도?”
오히려 불릿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우락크였기에 그는 반박하고 싶은 말을 집어삼켰다.
‘엘프가 오크의 아이를 낳는 게 말이 되냐고….’
하지만 생각을 거듭하다보니 말이 되는가도 싶다고 납득하게 됐다.
인간도 엘프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당시엔 막강한 신력을 지닌 신이었으니 뭔가 방법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니 불릿은 단도직입적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장모님이 본인을 당신에게 보낸 이유가 무엇이오?”
이야기의 시작이 그거였기에 말을 자르고서 묻자 그녀는 신답지 않게 볼을 부풀리며 귀여운 표정을 지었다.
우락크의 자태에 불릿은 어째서 오크가 종족이 다름에도 그녀에게 반해 아이까지 가졌었는지를 망상을 통해 떠올렸지만 흙덩이가 자신의 옷자락을 꾹꾹 잡아당기며 애달프게 바라보자 머리를 작게 흔들며 그녀가 대답하기를 쳐다보았다.
이내 우락크는 그런 표정을 치워버리고 불릿의 물음에 대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