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7 두 번째 수확제 =========================================================================
흑마법사가 나타났다!
이것은 안전불감증에 빠져들고 있던 대륙의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아주 씨를 말리겠단 기세로 흑마법사와 관련된 모든 하수인들을 처형했다.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대륙의 끝에 위치한 란푸스와 루드밀라를 제외하면 초토화가 되었기에 그런 말은 금세 쏙 들어가 버렸다.
불릿이 머물렀던 용병의 나라 론 타로 왕국도 요새도시 라 쓰랑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영지가 피해를 입었으니 말 다한 거 아니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란푸스와 루드밀라가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었고, 이번 몬스터 웨이브를 통해 그들 또한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상의 손해를 입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잠잠하던 마탑에서 중대발표를 하겠다고 앞둔 이 시점에서 불릿은 수확제를 맞이하게 되었다.
뜨르르 뜬뜬-, 뜨르르 뜬-
높은 음으로 흥을 돋우는 악기연주소리가 울려 퍼지는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바포 변경백 중앙영지의 대영주 저택.
그곳에서 홀로 외로이 야경을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다.
‘분위기가 많이 침체되진 않았군.’
중앙영지의 방비는 다른 영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철통방비, 이곳을 몬스터가 뚫을 수 있다면 루드밀라 그 어디라 할지라도 안전한 곳은 없다는 소리였다.
이러한 면에는 귀족들이 모여 사는 밀집지역이라 돈이 많아서 병력의 질과 수에 있어서 으뜸인 것이다.
하하하!
웅성웅성-.
웃음소리와 함께 밀집된 인구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밤의 차가운 기운을 밀어내고 있었다.
수확제는 귀족도 즐기는 축제였기에 불릿도 참여하는 것이 맞지만 그는 그럴 기분이 나질 않았다.
“후우.”
짧은 한숨을 내쉬니 고개는 절로 아래를 향하게 됐다.
이런저런 고민이 많다보니 느는 건 한숨이다. 대영주란 위치는 고민이 없을 수가 없는 자리다.
영토가 평화로워도 끝없이 고민을 해야지만 그런 평화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니 올바른 지도자라면 마땅히 취해야할 자세였다.
그래도 즐겨야할 축제에서까지 이러는 것은 조금 도가 지나치지 않을까, 여겨지는 순간.
그의 뒤에서 가느다란 손가락이 허리를 감싸왔다.
사라락-.
“뭐하세요, 오라버니?”
“유실리아.”
자신의 허리를 감싸오는 그녀의 손길에 불릿도 유실리아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여름이지만 사랑하는 연인의 체온이 싫진 않았는지 유실리아는 그 손을 빼지 않았다.
“너도 나가서 축제를 즐기지 그러나?”
벌써 흙덩이는 올리비아와 함께 손을 붙잡고 방방 뛰어다니며 축제를 온몸으로 만끽하는 중이었다.
작년의 수확제는 반란진압이 목적이었던지라 은신처에 콕 박혀있어서 즐길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축제 또한 이번 수확제가 처음이었으니 흙덩이에게 있어 이번 축제는 그야말로 신천지이자 별천지였다.
불릿의 물음에 유실리아는 고개를 젓더니 그의 어깨에 얼굴을 올려놓았다.
“저는 많이 봐왔는걸요? 매해 보는 축제라서 그런지 오라버니 곁이 더 즐거운 거 같아요.”
“유리….”
그녀의 진심이 전해지는 말이었기에 불릿은 자신의 어깨에 올라온 얼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코끝을 살짝 혀로 핥았다.
할짝.
“읏, 오라버니?”
키스를 할 줄 알았는데 콧등을 핥자 그를 올려다보는 유실리아에게 불릿은 이런 각도가 되기를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훔쳤다.
유실리아는 수줍음이 많기에 불릿이 이렇게 키스를 해오면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감는 경향이 있었다.
드디어 불릿의 얼굴이 멀어지자 유실리아는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으며 나긋이 중얼거렸다.
“…마수의 숲으로 향하신다고 들었어요.”
“그건 어디서 들었는가?”
불릿이 수확제 이후에 마수의 숲으로 향한다는 정보는 극비에 속했다.
가신들 중에서 소수만이 알고 있는 사실로, 그 외에는 각지의 영주들이라 할지라도 아직까진 비밀이었다.
부인들이 불안해 할까봐 알려주지 않았는데 알았다는 것은 정보를 유출한 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 이는 가볍게 볼 수 없는 사안이었다.
벌써부터 유실리아를 상대로 정치질을 하는 자가 등장했다는 뜻이었으니 불릿은 그자가 누군지 알고 싶었다.
“그게….”
“너를 탓하는 게 아니다. 다만 내 분명 아직까진 알리지 말라 했거늘 벌써 발설한 자가 생겼으니 주의를 줄 생각이어서 그렇다.”
“그러지 마세요…, 아버님이 알려주셨어요, 죄송해요, 제가 졸라서 어쩔 수 없이 알려주신 거니까 부디 자비를….”
“음.”
‘크레파토스가 그랬던 거로군.’
크레파토스는 불릿을 호위하는 호위병대의 대장이다.
근래엔 말을 하는 비율이 적었지만, 여전히 불릿의 주변에 불한당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튼튼히 방비를 꾸리고 있는 중이었다.
요즘 눈에 잘 띄지 않았기에 어디서 무얼하고 있나 했더니 유실리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모양이다.
크레파토스가 그녀의 친부모는 아니었지만 양부모는 되었기에 함부로 대하기도 뭣한 상황, 이렇게 되면 불릿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별 걱정도 다 하는군, 내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에까지 인색하진 않다.”
불릿은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등을 껴안고 있던 그녀에게로 빙글 돌아 앞에서부터 품에 안았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곤 안심되지 않는지 유실리아는 재차 그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하지만 저희에겐 알려주시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아버님께 오라버니가 고민이 있진 않나 물어봤었던 거예요.”
불안해하지 말라고 그랬던 것이 오히려 그녀들의 불안감을 부추겼던 것 같았기에 그의 심기는 조금 불편했다.
‘조심해서 행동하는 방향으로 잡아야겠군.’
마수의 숲이나 투툰 후작과의 만남이 조심한다고 해서 안전할진 모르겠으나 그렇게라도 달래주지 않으면 또 미칠 듯이 울면서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것이다.
또 다시 그런 일들을 겪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녀들의 바람을 저버릴 수밖에 없는 불릿의 입장이기에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녀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설득하는 게 가장 좋은 방향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 내가 어찌 너희에게 함부로 말할 수 있겠니?”
“저희를 저버리는 건가요?”
“아니야, 이게 내가 바라서 가는 게 아니란 걸…크레파토스가 알려주었나?”
“네, 들었어요.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요.”
거기로 향한다는 것만으로도 극비에 속한 정보인데 이 사실을 아는 가신들은 하나같이 마수의 숲으로 불릿과 함께 이동할 인원뿐이었다.
마음 같아선 다짜고짜 병력만 이끌고 가고 싶었지만 불릿의 호위를 담당하는 크레파토스가 그걸 인정할 리 없었다.
그러니 최소한의 정보만은 건네주어야 했고, 그것이 지금의 사단을 만들어낸 것이다.
불릿은 그녀의 호리호리한 허리춤을 양손으로 쥐어갔다.
그렇게 양손으로 쥐니 남는 틈 없이 손안에 다 들어오는 그녀의 허리, 이런 유실리아를 자신이 걱정되어 자신의 아비에게 비밀 좀 물었다고 불릿이 혼내진 않는다.
그녀들의 불안을 만든 것이 불릿 본인이었으니까.
“장모님은 뭐라 하셔?”
그의 물음은 여러 가지고 해석될 수 있는 의미였기에 무엇일지 고민하던 유실리아는 자신의 허리춤을 쥔 불릿이 손아귀에 살짝 힘을 주자 입에서 놀란 음성이 튀어나왔다.
“꺅!”
“혼내는 거 아니래도. 죄송스러워서 그래, 어떻게 생각하시는데?”
“으음, 그게 그러니까요, 으으음-.”
말하기가 곤란했는지 길게 고민하는 그녀에게 불릿은 다시 허리춤을 꽉 쥐었다.
꼬옥…
“으읏, 아, 알았어요, 말씀드릴게요.”
결국 불릿의 재촉에 유실리아는 어머니의 소식을 털어놓았다.
“제가 결혼을 하면 오라버니께 끌려다니다 안 좋게…될 것 같다고 과연 이어져도 괜찮을까라고 하셨어요.”
“본 백작은 그런 격이 낮은 짓은 하지 않는다. 진(眞)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헉, 불릿 폰 바포이시여…!”
왕국에 단 둘밖에 없는 진의 이름을 내걸자 기사로서의 본능에 그녀가 무릎을 꿇으려하자 불릿은 그녀의 허리를 냉큼 끌어당겼다.
“어멋!”
“누가 함부로 무릎을 꿇으랬는가.”
불릿의 품으로 끌어당겨진 유실리아는 가슴이 짓눌리며 한층 불릿과의 체온이 잘 느껴지고 있었다.
후욱-, 후욱-.
그의 숨결이 피부에 와닿자 그녀는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저는 평생 오라버니만 따라갈 거예요….”
자신을 믿는다는 유실리아의 대답에 불릿은 장모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힘껏 그녀를 껴안은 불릿은 테라스에서 방안으로 이동해 남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내부에서 은밀하고 뜨거운 행위를 이어갔다.
* * *
“후작님.”
사가하라 공작은 어두운 실내에서 술을 홀짝이고 있는 투툰 후작에게 말을 걸었다.
찰랑-.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와인이 아니라 독한 보드카를 마시는 투툰 후작.
남부러울 게 없는 그였지만 그라도 해서 고민이 없을 수는 없었다.
최근 그의 가장 큰 고민은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5공녀 션샤인 폰 투툰이었다.
그녀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섰다.
“왜 부르는가.”
그가 가운을 입고 있는 것을 보면 둘의 만남은 사전에 약속 잡혀 있던 것은 아닌 듯했다.
평소 그의 가벼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무겁고 진중한 분위기에 사가하라 공작도 농담 따위는 꺼내지 않았다.
“다른 군벌로부터 구원의 메시지가 계속해서 도착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 이런 밤중에 말입니다.”
“미친놈들이군. 아무리 간청하더라도 받아주지 말도록.”
“제 힘으로도 말입니까?”
“어, 싹 다 갈아치울 예정이다. 쓰레기 같은 놈들.”
앞으로 격동하게 될 루드밀라의 미래가 지금 이 순간, 멍청하고 어리석은 군벌들의 구원요청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그동안 5공녀의 부탁으로 무력을 휘두르는 것을 자제하고 있었을 뿐이지 투툰 후작이 결코 얌전한 성격은 아니었다.
루드밀라 국민들의 선한 성격은 투툰가를 따르는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은 루드밀라를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함의 기준은 달랐다. 악이라는 쓰레기가 있다면 깨끗이 청소하는 것, 그게 바로 투툰 후작의 정의이자 가치관인 것이다.
“용무는 그게 끝인가?”
흡사 사가하라 공작을 노려보는 눈빛이었기에 그도 잡말 싹 빼고서 말을 이었다.
“바포 백작이 만남주선을 신청하였습니다.”
무려 공작이라는 직위를 가진 자가 심부름꾼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것을 불쾌해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런 중요한 일만을 도맡아 했기에 그가 투툰 후작의 오른팔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남주선…? 이유야 상상이 간다만 별로 만나고 싶지 않군.”
투툰 후작령은 벌써 몬스터로 입은 피해를 복구한지 오래였다.
애초에 입은 피해도 적었고, 주변 파벌로부터 흔들린 적도 없기에 체제자체가 잘 정비되어있어 발 빠른 대응이 가능했기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