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12 짧은 휴가 =========================================================================
덜그럭, 덜걱-.
본래 귀족의 식사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식기의 소리조차 최대한 적게 내는 것이 미덕, 그렇지만 최근에는 불릿과 식사를 할 땐 그러한 점을 많이 완화시켰다.
이유는 이러한 예의범절에 익숙하지 않은 흙덩이를 위해서였고, 불릿 자신도 젊어진 육체가 답답한 규율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게 느껴졌기에 요란하지만 않으면 그렇게 터치를 하지 않았다.
덜그럭!
“어.이.쿠, 고.기.가.잘.안.썰.리.네? 호.호.호.”
소드익스퍼트인 그녀가 한낱 스테이크의 나이프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말은 거짓.
다시 말해 올리비아의 이러한 행동은 다른 의미가 있다는 뜻이었다.
‘아침부터 웬 스테이크를 주문했나 했더니 저러려고 그랬던 것인가.’
올리비아의 행동은 일종의 시위였는데, 잠에서 깨어나니 옆에는 흙덩이만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니 불릿이 유실리아와 땀범벅이 된 채로 잠들어 있던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녀의 방문 직전까지 한 것인지 열기가 올라오는 땀이 그대로 보였고, 하다가 잠든 것인지 두 사람의 성기는 이어진 상태였다.
이에 열이 받은 올리비아였으나 흙덩이도 아닌 가엾은 유실리아와의 섹스였기에 별다른 말은 안 했었다.
다만 이렇게 묵언시위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화가 난 상태인지를 어필할 뿐.
“나도 줘, 아앙-.”
“어, 어? 그, 그래, 자, 아아-.”
올리비아의 고기가 맛있어 보였던지 식사를 하던 흙덩이가 입을 벌리자 포크로 고기를 찍어 입에 넣어주니 잘도 오물오물 씹어 먹는다.
“우웅, 우웅, 꿀꺽! 올리비아가 주니까 더 맛있어!”
“얘도 참…하하.”
활기찬 둘과는 다르게 유실리아는 기운이 없는지 빵만 조그맣게 뜯어서 입에서 굴리고 있었다.
“왜, 입맛이 없어?”
혹시 자기가 재우질 않아 얼마 못 자서 저런 것인지 걱정된 불릿이 물어오자 화들짝 놀라는 유실리아.
“아뇨, 그냥, 아기가 언제쯤 생기나 싶어서….”
그러면서 자신의 아랫배를 살며시 문지르는 유실리아를 보니 불릿은 괜히 헛기침이 나왔다.
“커흠. 그게 가지고 싶다고 반드시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근데 아직 식도 안 가졌는데 벌써 갖고 싶나?”
“제 꿈인 걸요….”
말하면서도 민망했는지 옆으로 땋은 머리카락만 조신하게 매만지는 유실리아를 보니 다시 불끈했지만 자신을 노려보는 올리비아의 눈초리에 부스스 가라앉기 시작했다.
“으흠! 그래서, 오빠는 이제 어쩔 거야?”
“무얼 말인가?”
아침식사라 그런지 단출하게 마련된 음식이 빠르게 사라져가자 올리비아는 식사가 끝나기 전에 본론을 물어왔다.
“모르는 체 좀 하지 말고, 우리도 반 바퀴 빙 돌았으니까 이제 돌아보지 않아도 되잖아?”
“으음.”
그녀의 말대로라면 몬스터 웨이브는 흑마법사의 소행이 있었어도 성공적으로 막아낸 셈이다.
이제 더 이상 큰 위협은 없을 테니 당초의 목표는 세운 것이 됐는데 아직도 할 거냐는 의미.
“그래, 네 말대로다. 이번 여정은 끝, 더 이상 발 아프게 돌아다닐 이유가 없지.”
“와아! 쉰다 쉬어! 놀아도 된다! 와아!”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 누구보다 고생한 흙덩이였기에 새초롬한 올리비아도, 아랫배를 문지르던 유실리아도 흐뭇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중앙영지로 돌아갈 이유도 없지.”
이상한 말이었기에 세 명의 여자들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가장 나이가 많은 올리비아가(그래봤자 열아홉) 대표로 불릿에게 물었다.
“오빠 설마…?”
“아냐, 기왕 나온 거 좀 쉬고 들어가자는 말이다. 이만큼 해놨으니 업무는 가신들에게 맡겨놓자고.”
“휴우, 난 또 뭐라고.”
안심하며 다시 고기를 써는 올리비아. 다들 간단한 아침메뉴를 골랐기에 자신만 고기메뉴를 골라 가장 늦게 식사가 진행 중이어서 허겁지겁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반대로 유실리아는 약간 걱정 어린 어조로 불릿에게 물어왔다.
“괜찮을까요? 아직 몬스터 웨이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저희만 이렇게 놀아도요.”
아직도 고통 받고 있을 영지민이 있었기에 한 지역을 다스리는 대영주가 이래도 되냐는 의미였기에 불릿은 그녀를 안심시켜줄 말을 건네주었다.
“괜찮다. 목숨 걸고 싸웠는데 휴식을 하는 것 또한 당연한 보상 아니겠나? 만약 불만을 터뜨리는 놈이 있으면 바로 숙청이다.”
“그러지 마세요, 너무 과격한 처사에요.”
“음, 좋은 자세다. 나도 나를 통제하기 힘들 때가 있으니 유실리아가 막아줬으면 좋겠어.”
유실리아를 믿는다는 소리였기에 그녀는 기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 여기서 뭐해?”
흙덩이가 눈을 멀뚱멀뚱 뜨고서 말하자 불릿도 고민하는 모양을 보였다.
확실히 쉰다고는 했지만 몬스터 웨이브가 끝나지 않고서는 외부로 나들이를 나갈 수도 없었고, 성 내부의 분위기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뭔갈 하기엔 적절한 시기는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불릿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손가락을 퉁기며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딱!
“일단 오늘은 올리비아랑 하고 내일은 흙덩이, 그 다음 날은 유실리아랑 하고서 생각하자.”
화아악-.
펑!
올리비아와 유실리아의 얼굴에 피가 쏠리며 부끄러워했다.
“…난 찬성, 나 아직 안 했잖아….”
“그, 그러세요.”
두 여자가 민망한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흙덩이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난 다 같이 하는 게 좋은데.”
흙덩이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소리쳤다.
“난교는 안됏!”
“안돼요!”
“힘들다, 좀 봐줘.”
“응? 어째서?”
셋이 극렬하게 거부하자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 흙덩이의 물음에 올리비아가 새빨개진 얼굴로 그녀에게 대꾸했다.
“너랑 하면 끝나질 않는단 말얏!”
흙덩이의 치유능력과 그녀와의 성교를 통해 무한으로 회복되는 정령력 때문에 불릿이 지치질 않으니 그것이 두려운 올리비아였다.
아무리 그래도 사흘밤낮으로 하는 것은 조금 그랬다.
“아니, 한번 해볼까….”
예전에 생각해뒀던 삼일밤낮을 실현시켜보려는 불릿을 유실리아가 말렸다.
“사랑해주실 땐 한 번에 한 사람씩 해주세요. 여럿이서 하면 그 느낌을 받기가 어려워요….”
“아, 응, 알았다. 미안.”
“그리고 만약이지만, 아이들의 생일은 각자 달랐으면 좋겠어요.”
문질문질.
아직 아이가 생긴 것도 아닌데 계속해서 아랫배를 문지르는 유실리아에게 괜히 부끄러움을 느낀 불릿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올리비아와 유실리아가 붉어지는 거면 모를까, 불릿이 부끄러워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기에 그걸 발견한 흙덩이가 까르르 웃었다.
“불릿 바지 찢어지겠다, 푸히힛!”
“…….”
“헉, 자, 잠깐만, 이건 마저 먹고!”
“밥상머리에서 하는 건 조금…, 지금 가지면 내년 결혼식을 아이와 함께 맞이할 수 있을까요?”
흙덩이의 말에 불릿이 침묵하자 올리비아는 진짜로 하려는 줄 알고 음식을 급히 입에 털어 넣었고, 유실리아는 조언을 하는 듯 하면서 불릿이 벗기기 쉽도록 옷을 헐겁게 하는 중이었다.
이 자리에 루나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녀가 좋아하는 ‘혼돈의 카오스’였거늘.
* * *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아침부터 가볍게(?) 한바탕 뛴 불릿은 마무리로 흙덩이와의 정사를 끝으로 산책시간을 가졌다.
그렇다곤 해도 셋이나 상대해야 했기에 시간은 어느새 점심이 다 되어갔고, 얼마 남지 않은 여유시간을 산책에 투자하며 몸과 마음을 쉬는 순간.
“쉬긴 뭘 쉬어….”
불릿과 그녀들 사이엔 아직도 상당한 앙금이 남아있는 상태.
잔뜩 뿔난 그녀들을 달래주기 위해선 휴식은 핑계고, 그냥 많이 해줘야 했다.(?)
비로 촉촉해진 화단을 걷던 불릿은 빨간색의 꽃잎을 보고서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직 반지도 주지 않았었네.’
결혼의 상징이 무엇인가? 순백의 웨딩드레스와 멋지고 날선 턱시도, 신부가 던지는 부케를 받기 위한 하객들….
하지만 연인임을 상징하는 가장 기본적인 물품은 다름 아닌 반지였다.
얼굴 다음으로 타인에게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이 손이었다.
얼굴은 귀걸이가 아닌 이상 뭔가를 보여주기 어려웠으니 손이야말로 가장 대중적인 신체부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올리비아에게 뭔가 줬던 것 같긴 한데….”
그녀에겐 마정석을 사용한 아티펙트를 겸한 반지를 선물로 줬었다.
하지만 그건 엄연히 보석도 아니었고, 결혼상징도 아니었기에 그게 있다고 다른 반지를 안 줄 수도 없는 노릇.
“올리비아는 정열적이니까 루비가 좋겠고, 유실리아의 청순함을 훼손시키지 않으려면 청금석(라피스라즐리)에 백금으로 음각을…아니, 양각이 나으려나…으음.”
올리비아와 유실리아는 값지면서도 그녀들과 어울리는 보석과 광물이 많았지만, 다른 하나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불릿의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흙덩이는…하아, 얘는 대체 뭘로 해줘야 하지.”
흙덩이는 특별했다. 여신의 딸이기도 했고, 한때 신이기도 했던 객체.
거기에 세상에 나온지 2년도 되지 않았으며 10살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풍만한 육체미까지.
가이아 여신의 핏줄이면서 땅의 정령술을 사용하니 대부분의 광물이 그녀에게 어울리겠으나 반대로 말하면 대체 뭐가 좋을지 고르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다.
불릿은 자신이 결정장애라도 온 것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잘 잃어버릴 거 같기도 하고….”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과 소꿉장난도 하고, 놀이도 하니까 손에 반지 같은 걸 착용하면 잊어먹기 딱 좋은 그녀였다.
물론 무언가를 찾는 데엔 흙덩이가 제격이었지만 크기가 작은 만큼 아무리 그녀라도 어렵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하지만 상상 속에서의 흙덩이가 매우 기뻐하며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모습에 불릿의 얼굴엔 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후후, 녀석도…이크, 상상이었네.’
비록 상상이었지만 현실의 흙덩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주는 것에 항상 감사하고 고마워하며 온몸으로 기뻐하는 것이 흙덩이였으니까.
화해의 징표로 반지만한 것도 없으리라. 이건 연애경험이 없는 불릿이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여자치고 보석 싫어하는 사람 봤는가?
터벅, 터벅.
화단을 걷는 불릿의 발걸음이 약간 가벼워지면서 주변으로 튀는 빗물의 양도 적어졌다.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그녀들을 상상하면 그것만으로도 불릿 또한 기분이 좋아지는 듯했다.
“밥 먹고, 운동 좀 하고, 흠. 몬스터도 잡을 겸 투창연습이나 할까….”
‘뭐야, 그것도 투창이라도 던진 거야?’
옛날에 올리비아가 불릿의 조잡한 투창 실력을 보며 깔깔대고 웃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언제고 그녀에게 가르침을 받겠다는 다짐을 했었는데, 오늘 올리비아에게 배우면서 떨어진 애정을 다시 끌어올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밖에서 만지면 화를 내겠지.”
최근 성욕이 왕성해진 불릿인지라 틈만 나면 흙덩이의 이곳저곳을 만져댔었다.
특히 부드럽고 탱탱한 가슴에 얼굴을 묻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럴 때면 흙덩이가 평소의 장난기가 사라지고 가이아 여신처럼 자비롭고 포근하게 안아주는 것이 너무도 좋았다.
“…흠흠, 조금은 괜찮겠지.”
잘못하면 올리비아에게서 스무 명의 아이가 나올지도 몰랐다.
그녀가 불릿을 감당할 수 있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