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정령사-209화 (209/241)

00209  몬스터 웨이브  =========================================================================

성으로 들어서자 분위기는 한층 더 무거웠다. 사람끼리 싸우면 항복의 여지가 있었지만 몬스터는 그런 것 없이 먹히느냐 마느냐 흑백일로만이 존재해서 그렇다.

“오셨습니까, 대영주님.”

공손히 인사하는 이우우스 행정관에게 불릿도 마주 인사를 건네주었다.

“별 일은 없었고?”

“영토가 넓어 소규모의 다발적 습격에 대응하기 힘들다는 점을 제외하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음, 그런 식으로 본인을 타박하는군.”

“벤젼스 천인장이라도 보내주시지 않았다면 탈주했을지도 모르지요.”

“허허, 거 사람하고는….”

이우우스 행정관은 진중하고 차분한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농담은 웬만해선 잘 안 한다.

그가 농담을 내뱉을 때는 어느 정도 상황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처럼 힘든 상황에서 자신이 얼마큼 노력하고 있음과 자신의 능력부족이 아님을 어필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영리한 사람이었기에 관리상의 문제는 없어보였지만 군사적인 문제는 다른 차원이었기에 둘러볼 필요가 있었다.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테니 객실부터 잡아드리겠습니다.”

“자네의 침실이 아니고?”

그 말에 이우우스는 앞장서 걸으려다말고 뒤를 돌아보며 한마디를 뱉었다.

“여기선 제가 관리자 아니겠습니까?”

뚜벅, 뚜벅.

그리고 다시 앞장서 걷는 그를 보며 불릿은 고개를 저었다.

펄럭-, 펄럭-.

행정관이라 그런지 이우우스는 자신이 맡은 영지가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를 자료화하여 불릿이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가져다주었다.

장시간에 걸쳐 꼼꼼히 살펴본 불릿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괜찮군, 처음인데도 관리를 잘했어.”

“감사합니다.”

군사적 요소는 미흡한 면이 있었지만, 그것은 지난날 게슐린 그랩 자작의 잘못으로 인해 1구역이 되버린 그의 영지와 2구역인 태티스 남작의 군대가 중앙영지의 군단과 화합하기 어려워서였다.

피터지게 치고받고 싸웠는데 반년도 안 된 시간이 흘러 화해할 만큼 살인은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이런 물과 기름 같은 자들을 상대로 무사고를 기록했으니 지휘관으로서도 역량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분쟁문제는 어찌 해결한 것인가?”

불릿도 이 문제만 생각하면 골이 아파올 지경이었기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헌데 영주로서의 경험이 미천한 이우우스가 그걸 해냈으니 신기해서 물어보았던 것.

이에 이우우스 행정관은 가벼이 대답하였다.

“이번 몬스터 웨이브에서 고단한 일들의 대부분을 현지군대인 1, 2구역 병사와 기사들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불만이 보통이 아닐 텐데?”

인원이 부족하다 여겨 지원을 보낸 것인데 그걸 무색하게 만드는 정책이었으니 이우우스가 자신의 결정에 나쁜 생각을 가졌나 싶었다.

“대신 이번 몬스터 웨이브에서 공을 세우면 지난날의 과오를 지워주기로 했사온데, 병사들이야 그저 시키는 데로만 한 것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고, 기사들의 경우 대영주님과의 상의가 필요할 것이지만 이미지 쇄신이라는 점을 내세웠습니다.”

“벤젼스 대대에서의 불만은?”

“불만 있으면 목숨 걸고 앞장서라 했습니다. 상대는 목숨을 걸고서 죄를 뉘우치려 하는데 그 이상으로 무얼 걸어야 하냐는 말도 덧붙였지요.”

“뭔가 미심쩍은데….”

이것만 가지고 병사들의 불만을 내리누를 수 있다는 게 수상하긴 했다.

본래 은혜는 쉬이 잊고 원한은 오래 간다잖은가?

카리스마가 부족한 이우우스 행정관의 말을 얌전히 들을 만큼 군대의 남자들은 거칠었다.

바포 변경백의 군사라는 자존심도 있어서 루드밀라의 순한 성향을 띠면서도 적에게는 자비를 두지 않았으니 말이다.

“벤젼스 천인장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가.”

‘그럼 그렇지’라는 반응이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었기에 불릿도 딱히 말을 더 내뱉진 않았다.

정책을 어떻게 하냐는 것보단 그것을 성공시키느냐 마느냐의 문제였기에.

“후우, 지치는군.”

불릿이 의자에 몸을 깊게 묻으며 말하자 이우우스가 언제 가져왔는지 코코아를 타와서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달각.

“작은아씨와의 교접을 통해 체력이 회복된다하지 않으셨습니까?”

“말을 해도 그런 식으로 해야겠는가? 교접이라니.”

흡사 동물처럼 한 적은 있지만 남의 입을 통해 저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럼 좀 자제하셨으면 좋았지 않습니까. 나무판자로 가려졌다고 밖에서 안 한 게 아닙니다, 대영주님이 아니셨다면 공연음란죄로 잡혀가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크흠.”

카텐령으로 입성하며 마차에서 부인 셋과 정사를 벌였던 일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니 할 말을 잃은 불릿.

그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생각난 사안을 입 밖으로 내려놓았다.

“란푸스의 동태는?”

란푸스 왕국은 바포 변경백과 인접한 적대국이었다.

그곳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원래 이렇게 시국이 혼란스런 때에 도래하는 것이 군벌이었다.

오히려 이런 때야말로 무언가 일을 벌이기 좋은 시기였기에 외국과 다른 지역의 패자들을 경계하는 것은 불릿에겐 당연한 일.

“아직은 지켜볼 요량인 것 같습니다.”

“‘아직’이라…, 무언가 알아낸 사실이라도 있는가?”

이우우스는 자신도 자리에 앉아 차를 한입 머금고서 말을 이었다.

“추측입니다만 그동안 란푸스 왕국이 너무 조용했습니다. 특산물거래를 빌미로 영토로의 진입을 막았습니다만, 이렇듯 수월하게 막을 수 있는 자들도 아니질 않습니까?”

란푸스 왕국은 란푸스 3세의 철권통치, 또는 철혈통치로 불리는 절대왕정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란푸스 3세는 홀로 모든 귀족들을 농락할 정도의 뛰어난 인물이니 사분오열된 루드밀라를 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당시엔 비 아이언 외교대사의 활약으로 그렇게 된 줄 알았는데 아닐 수도 있단 점이 부각되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래도 당장 쳐들어오진 않겠지. 우리가 이 성을 어떻게 점령했는지를 파악했으면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큰 문제가 없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저흰 대영주님을 믿으니까요.”

“믿어줘서 고맙군.”

“그렇다고 작은아씨를 혹사시키진 마시기를. 후사도 아직 못 낳지 않으셨습니까.”

“……자네는 농을 안 하는 편이 좋겠어.”

후루룩-.

갈증이 나서 코코아를 들이켰으나 원래 갈증이 날 때 단 것을 마시면 더 큰 갈증이 찾아올 뿐이었다.

“벤젼스는 뭘 하고 있는가?”

“날도 어두워졌으니 식사준비를 하지 않겠습니까?”

불릿이 어딜 도착할 때마다 저녁인 이유는 낮 동안엔 몬스터를 최대한 많이 잡아두려고 해서 그렇다.

사람이 없는 숲이나 적은 인가에서는 빛이 상대적으로 적기에 밤이 더 빨리 찾아온다.

그래서 최대한 많이 잡고 빨리 이동한 후 잠만 마을에 머물며 자는 것이다.

오죽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흙덩이가 숲 한복판에서 애타게 하자고 했겠는가?

“이번 년도엔 홍수가 날 것 같은가?”

비가 내리는 양이 상당했기에 이우우스에게 물어보는 불릿.

이우우스가 행정관이긴 해도 기상정보를 측정하는 자는 아니었기에 자세한 사항을 알 순 없었다.

그래도 자신이 아는 선에서 한껏 알려주는 이우우스.

“작년보다 길어진 우기로 인해 강수량이 증가하였으나 물의 정령의 가호를 받지 못해 감소한 저장량과 상응하여 적절한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친화력의 속성이 바뀐 것은 불릿의 탓이 아니었으나 그는 괜히 자기가 잘못한 것 같아 내심 찔리고 있었다.

‘그래도 흙덩이가 괘씸한 물의 정령들보단 백배 낫지.’

비록 직접적으로 물을 만들어내진 못하지만 수맥을 찾아내 물을 끌어 올린다거나 토질을 상승시키는 등으로 가뭄과 농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투력에서는 흙덩이가 압도적, 물의 정령의 특징인 치유능력도 상급의 경지에 도달한 그녀가 훨씬 앞섰다.

‘밤일…, 밤일이 아닌가?’

섹스는 밤낮 안 가리고 했으니 밤일이라고 부르기엔 뭣했다.

굳이 비교할 건 아니지만 성적매력 역시 흙덩이가 압승.

여기까지 비교하며 생각하니 살짝 귀끝이 빨개진 불릿, 그리고 이우우스는 그의 변화를 알아챘다.

“…대영주님, 왜 갑자기 야한 생각으로 넘어가신 겁니까.”

“무, 무슨! 본인은 그런 적이 없네만?”

“예, 예. 잠자리는 준비해뒀사오니 저녁부터 들고 하시지요.”

화악-

이런 식의 배려를 옛날이라면 화를 내며 치도곤을 했겠지만 워낙 왕성해진 성욕 탓인지 굳이 거부하진 않는다.

“…좀 넓은 곳이면 좋겠는데 말이지.”

흙덩이와는 밤이 새도록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땀과 애액 등의 분비물로 더러워지기 일쑤.

애정행각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선 시트를 갈아주기 위해 하녀가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리저리 구르며 할 수 있는 넓은 침대가 좋았다.

“?”

이에 의문을 가지는 이우우스. 그가 불릿의 성교를 직접적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흙덩이에게 묻기로, 그리 넓은 공간은 필요가 없던 것이다.

“그랩 자작의 침실로 준비했사오니 문제는 없을 겁니다. 아, 물론 모두 새것으로 교체했고 원하신다면 그의 애첩들도 준비되어 있으니 불러만 주시기를.”

“뭐야, 그녀들이 왜 남아있는 것인가?”

침실문제가 해결되니 한결 편안해진 어조로 이우우스와 대화를 잇는 그에게 대답이 오고갔다.

“2인자였던 게슐린 그랩 자작이 끼고 살았던 여자를 누가 데려가려 하겠습니까? 아름답긴 합니다만 데려가려는 자들도 외모만 보고서 욕구를 채우려는 이들이니 제 독단으로 성에서 일하도록 했습니다.”

“가족들은?”

“그랩 자작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긴 했어도 멍청하진 않았습니다. 다 뒤탈이 없는 하녀들에게 손을 댔었으니까요.”

“으음, 개새끼로군.”

불릿은 나이 41이 되어서야 딱지를(?) 뗐거늘, 강제로 하녀들에게 밤시중을 들게 한 그랩 자작이 너무 편히 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이우우스도 맞장구를 치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성에서 일하는 것에도 능숙하고 동정해주는 동료들도 있기에 그리 불편하진 않을 것입니다. 가족들은 대영주님의 분노를 받을까봐 의절 당했다는군요.”

“가족들 전부 감옥에 처넣으라.”

“예?”

“아, 아니, 좀 심한가?”

자신도 모르게 분노하며 튀어나오는 말에 이우우스는 물론이고 불릿도 당황했다.

‘정신이 육체에 따라잡혔군. 짜증나는구나.’

거듭 주의를 기해도 몸이 새것인지라 길이 들여지지 않았다.

아마 예전의 위엄 있는 군주가 되려면 많은 시일이 걸릴 것 같았다.

“대영주님의 명이라면 따르겠습니다만, 너무 성급히 결정하시는 건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척 봐도 열불이 확 올라와 내린 판단이었기에 한 번 더 생각해보라는 이우우스의 조언에 불릿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밥부터 먹자. 우리 아가 뱃가죽이 등에 닿을라.”

자신도 처가 세 명이어서 그런지 더욱 그랩 자작의 애첩들에게 관심이 갔던 불릿은 흙덩이가 생각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우우스가 문을 열어주려 일어섰지만 불릿은 기다리지도 않고 벌컥 열고서 나가니 이우우스 1급 행정관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마님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군.”

무언가를 넌지시 알려주려던 이우우스. 불릿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채 낮잠을 자고 있는 흙덩이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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