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8 몬스터 웨이브 =========================================================================
“발사!”
“쏴!”
여전히 맹목적으로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쏴 죽이는 병사들.
바스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무력하게 당하는 몬스터인지라 불릿도 안심하고 떠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나는 이만 가볼 테니 수확제때 볼 수 있으면 좋겠네.”
몬스터 웨이브로 또 다시 피해를 입었지만 그런 축제라도 지내야지 다음 한 해도 사람들은 힘을 내며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역시나 몬스터는 바포 변경백 내부보단 외부에서부터 많이 들어오는지라 습격이 진행되는 와중에 떠나려는 불릿을 셰실리코프도 굳이 말리진 않았다.
“조심히 살펴 가십시오.”
“아저씨, 케이크 맛있었어. 잘 있어.”
“각하를 부탁드립니다, 작은아씨.”
“흙덩이만 믿어!”
비가 내리는 중이었기에 불릿과 흙덩이는 예의 회색로브를 착용한 상태였다.
흙덩이는 굳이 회색이 아니어도 됐지만 불릿과 색을 맞추고 싶어 해 낡은 회색로브를 선택했다.
불릿도 지친 것인지 바스톤에 도착할 때까진 사용하던 창을 등에 매달아놓기만 하고 손에 들진 않았다.
그렇게 둘은 성에 나있는 작은 쪽문을 통해 몬스터에게 들키지 않고 조용히 떠날 수 있었다.
이번 목적지는 북쪽의 영지, 옛 지명은 그랩 자작령인 1, 2구역이었다.
되도록 많은 몬스터를 처리하기 위해 그들은 길이 잘 닦인 관도보단 산을 타거나 숲을 헤치며 나아갔다.
숲에 들어서면서 부턴 불릿의 손엔 창이 들려있었고, 정령력을 마냥 소진할 수 없는 흙덩이도 거친 호흡을 내쉬는 중이었다.
“헤엑, 헤엑.”
“숨을 길게 내쉬어라. 짧게 호흡하면 더 힘들다.”
“후우우-, 하아아, 후우웁, 하아아-.”
불릿의 조언대로 숨을 고르며 움직이는 흙덩이. 그러나 밤새 내린 비로 인해 질퍽해진 바닥은 그녀의 노력을 무시했다.
“씨이, 더 힘들어! 헤엑, 헤엑!”
“…….”
사실 호흡이란 게 조절하기 쉬운 요소는 아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무의식중에도 조절할 수 있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했고, 그래서 많은 검사들이 스승이나 교관으로부터 가장 많이 지적받는 부분이 호흡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을 흙덩이에게 해보라고 했으니 잘 될 리가 없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3주 동안이나 걸어 다니니 짜증이 잔뜩 쌓인 그녀.
이젠 잠깐잠깐 화를 풀어주는 것만으론 스트레스가 해소되지 않았다.
“그렇게 힘드, 니! 크앗!”
푹-
“끼엑!”
“흙덩아!”
언제 접근했는지 고블린 무리가 또 습격을 해오자 냅다 창을 쑤셔 박고서 외쳤다.
그가 부르자 흙덩이는 평소 듣기 어려운 짜증스런 어조로 이에 응했다.
“지옥구덩이!”
위력에 비해 정령력의 소모가 심한데다가 대인기술인 함정을 설치하는 그녀.
그러나 그 수만큼은 주변의 고블린을 모두 빠트리기엔 충분했다.
이젠 순식간에 만들어낼 수 있어서인지 예전처럼 위기는 없었다.
오히려 위기는 고블린들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쑤욱!
“끼긱?!”
“끼아악!”
구덩이에 쏙하고 빨려든 고블린.
푸슈슈슉!
슈슈슉-
푸화확!
“윽.”
불릿이 창을 찔러 넣었던 고블린까지 굳이 함정에 빠트리며 갈아버리자 핏물이 불릿의 로브자락에 잔뜩 묻게 되었다.
하필이면 얼굴에도 핏물이 튀자 절로 인상이 구겨진 불릿이 흙덩이를 돌아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왜, 뭐, 왜? 나한테 시켰잖아, 왜 짜증이야!”
“…아니, 이렇게 안 할 수도 있었잖아.”
“몰라! 흥!”
‘얘가 짜증도 다 내고 별일이군.’
이처럼 새침하게 구는 흙덩이는 정신체이던 시절 정령인 줄 알고 어디서 왔냐 물었을 때 모른다고 일변하던 때와 비슷했다.
특히 올리비아면 몰라도 자신에겐 보이질 않던 행동이기에 나름 신선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편한 건 아니다.
어차피 비가 내리는 중이었기에 불릿은 내리는 비에 핏물을 털어냈고, 그 와중에 흙덩이가 언제 흙을 갈아엎은 것인지 지옥구덩이에서 찰랑이던 핏물이 보이질 않았다.
그래도 이런 일로 흙덩이와 싸울 순 없다. 테라스에서 했던 고찰이 다시금 자신의 성급함을 상기케 했으니까.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야.”
사르륵.
비에 젖어 축축해진 상태였기에 불릿이 뒤에서 껴안으니 짜증을 내려고 고개를 위로 들며 젖히려던 흙덩이.
불릿은 그런 짜증을 내려던 그녀의 입을 자신의 입으로 막았다.
“쪼옥, 쪼옥.”
서로를 바라보며 하면 닿을 수 없는 부위인 혓바닥. 그곳이 서로의 혀를 쓸어가니 묘한 흥분감이 일어났다.
“스읍, 스읍, 스읍!”
숨결이 거칠어지자 그녀를 놓아주려니 떨어지기 싫었던지 허리를 활대처럼 휘며 더더욱 달라붙으려한다.
“더! 더 줘, 더!”
불릿이 고개를 들자 키가 닿질 않자 폴짝폴짝 뛰니 귀엽긴 했으나 입맞춤은 여기까지였다.
화가 풀린 것 같았기에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뱉는 불릿.
“말 잘 듣는 아이에겐 뭘 해준다고 했었지?”
“상! 상준다고 했어!”
“그래, 그러니 오빠 말을 잘 들어야겠지?”
“그래야 착한 아이야?”
“아니, 지금도 착한 아이지. 후후후.”
그러면서 뒤로 젖혀진 후드를 다시 씌워주니 볼을 부풀린다.
“뿌우, 방금 거 좋았는데.”
“주변에 몬스터가 있는지 확인해주겠니?”
방금 전에 고블린 무리에게 습격을 받았으니 다른 놈들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불릿이야 흙덩이를 믿으니 숲 한복판에서도 끈적한 키스를 나눌 수 있던 것이지만, 그래도 정찰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기에 약간 소홀했던 자신을 탓해야 했다.
“없어. 아까 걔네가 끝이야.”
“…? 언제 확인했니?”
아무리 정령술을 빠르게 시전할 수 있게 됐다지만 전조도 없이 가능하진 않았다.
그가 묻자 흙덩이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대꾸했다.
“아까.”
“아까?”
“응, 아까. 고블린 다가오는 거 알고 있었어.”
“……왜 안 알려준….”
“불릿 맴매하려고.”
“…….”
진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 * *
불릿과 흙덩이가 변경백을 순회하는 동안 그들에겐 묻혔던 별명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볼레트라는 용병명이 타 왕국에서 널리 퍼졌었단 것을 고용된 용병들의 입소문을 타며 전해지기 시작했고, 그들의 도움을 받은 마을에서 증언과 함께 살이 붙어가며 정령사 ‘아이언가드’와 ‘발키리’가 대단한 실력자라는 소릴 말이다.
불릿도 어느 지점을 통과하자 그 소식을 접하게 됐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이렇게 알려질 걸 대비해 일부러 용병패를 버리지 않고 냅뒀던 것인지라 나름 성공적이라 생각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흙덩이를 보고 여검사인 발키리를 떠올렸다는 점에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발키리가 뭐야?”
이렇게 묻는 흙덩이의 물음에 신의 여전사라며 갖가지 신화적 요소와 이야기를 첨부해서 알려주니 그녀는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자신이 귀엽지도 않은 그런 것으로 비유된다는 게 기분 상했다며 입술을 삐죽인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마을주민이 불릿과 흙덩이를 통틀어 아이언가드라고 부르자 혼란이 가중되었다.
흙덩이를 보고 발키리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중앙영지에 올리비아가 있으니 그녀는 아닐 것이고, 유명한 여검사를 불릿이 아는 한에선 적어도 바포 변경백엔 없었다.
그렇게 궁금증만 한가득 안은 상태에서 불릿이 이우우스 1급 행정관에게 영주직을 맡긴 1구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 드디어 쉴 수 있따!”
여기까지 오면서 소규모 몬스터 무리를 질리게도 마주쳤었기에 흙덩이가 만세를 하며 외치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 주변을 돌아다니며 경계를 서던 소대가 다가왔다.
“어디서 오시는 길이십니까?”
이곳의 지리를 지원 나온 벤젼스의 부대는 잘 몰랐기에 1구역 출신의 기사가 불릿에게 물었다.
장대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비를 맞으며 걸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로브를 뒤집어썼는지라 불릿이라 여겨져도 확실한 신분확인은 필요했다.
스르륵.
“흙덩이가 많이 지쳤으니 안으로 안내해주겠는가?”
보통 얼굴을 내비추면 알아서 행동할 법도 한데, 이번엔 그렇지가 않았다.
“죄송하지만 인장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전시상황이기에 절차에 따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빠, 쟤 잘라.”
“헉…, 자, 작은아씨, 그게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절차라서….”
물론 십인장인 기사도 두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병사들은 모를 수 있지만 기사들은 자신들이 섬겨야할 진정한 주군이자 대영주인 불릿에 대해선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십인장이 절절매는 모습을 보이자 불릿은 그녀를 말리며 이번엔 펜던트가 아닌, 새로 만든 반지 형태의 인장을 보여주었다.
우우웅-
정령력을 불어넣자 이에 반응해 바포가의 문양이 드러나니 소대일원 전체가 일제히 무릎을 굽혔다.
철퍽!
“대영주님을 뵙습니다!”
“송구하나이다, 각하!”
“만세만세 만만세!”
비에 젖은 바닥에 소대원들이 무릎을 꿇자 진흙이 튀니 흙덩이가 기겁하며 불릿의 뒤로 피했다.
“에이 씨, 짜증나.”
“숙녀가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랬지?”
“씨이…, 그럼 뽀뽀.”
“……쪽.”
“히히, 이젠 기분 좋아.”
불릿이 인사는 안 받아주고 흙덩이와 노닥거리는 와중에도 병사와 그들을 이끄는 십인장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상태였고, 불릿도 그것을 깨닫고서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그만 일어나도록. 흙덩이가 많이 지쳤으니 내실로 향해야겠다. 레이디를 기다리게 할 참은 아니겠지?”
“기다리게 해서 송구합니다! 뭣들 하느냐, 어서 각하와 작은아씨를 모시지 않고!”
“옛! 알겠습니다!”
“허슬, 너는 빨리 뛰어가서 이 소식을 알려라!”
“쓰벌, 또 나야.”
“이놈의 자식이! 중위병이 상위병한테 대들어?”
“갑니다, 가요!”
후다닥 달려가는 허슬이라는 중위병의 뒷모습이 처량해보였지만 불릿에겐 흙덩이가 더 소중했기에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른 곳과는 달리 그래도 영지 2개를 합친 만큼 크기도 남달랐고, 무엇보다 예전에 변경백의 2인자였던 그랩 자작의 보금자리였기 때문인지 발전도가 상당했다.
몬스터 웨이브 때는 대부분의 상행위가 중단되는 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여긴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아니, 무슨 보리빵이 10쿠퍼나해?”
“난들 어쩌겠수, 비가 이렇게 죽어라 퍼붓는 데다가 몬스터까지 들끓는데.”
“그래도 대영주님이 계시니까 기다리면 이것도 곧 끝나겠죠. 그런 의미에서 자, 한 개 더 가져가요.”
“어휴, 고마워요. 식구들 먹을거리 생겨서 다행이네.”
빵을 파는 상인이라고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덤을 주는 것을 보니 상황이 그렇게 바닥을 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한 달 이상 이 상태가 지속되면 그나마 있던 정도 사라질지 몰랐다.
루드밀라 왕국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극한 상황에서까지 자신보다 남을 위하진 않았으니까.
몇 없는 인파를 지나 성이 있는 곳에 도달하니 바람에 따라 물결치는 해자가 보였고, 아직까지 수리가 끝나지 않은 부서진 성벽도 눈에 들어왔다.
소식이 전해진 것인지 위로 올라갔던 문은 도르래에 따라 천천히 내려오며 성과 해자 사이에 새로운 다리를 하나 내려놓는 중이었다.
쿠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