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6 몬스터 웨이브 =========================================================================
누가 바포 변경백 최고의 실력자 아니랄까봐 중무장한 채로도 전력질주를 해온 셰실리코프.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른 곳에 비해 영지가 깨끗하더군.”
“감사합니다!”
추레한 차림의 두 사람에게 거듭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셰실리코프의 행동에 그가 누구인지 병사들도 알게 되었다.
이에 사격을 가하려던 병사의 안색은 새하얗게 탈색된 상태.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것인지 깨달았으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자네가 직접 돌아다니는 것인가?”
바람이 머무는 곳은 다른 영지들과 비교하면 몬스터 웨이브의 피해가 적은 듯했는데, 마수의 숲과 인접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적었다.
바로 아래지역의 바스톤만 하더라도 극심한 피해를 입고 불릿의 구원이 없었더라면 그대로 무너졌을 것이다.
“옛, 제가 직접 돌아다니며 몬스터의 수를 줄이고 다녔습니다!”
실전 경험도 풍부하고 검술 실력도 뛰어난 셰실리코프가 나섰다면 많은 병력을 이끌고 다니지 않더라도 짧은 시간내에 빠르게 없앴으리라.
그래도 영주 체면상 영주성을 지키는 것이 관례였는데, 대영주인 불릿이 직접 발로 뛰어다니자 그도 불릿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 같다.
‘5공녀와 빨리 이어줘야겠군.’
그가 왜 이러는지 불릿도 알고 있었기에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말을 해주기로 했다.
부인들과 지내면서 생각만 하는 것과 말로 표현하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체험할 수 있어서 그렇다.
“잘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5공녀와의 혼인을 추진해보도록하지.”
“가, 감읍하나이다!”
어찌나 좋아했던지 넙죽 엎드릴 기세였으나 중장갑을 착용한 상태였기에 허리를 숙이는 셰실리코프.
“이, 일단 들어가시지요. 제 침상이라도 빌려드리겠습니다.”
“그 정도는 필요 없고, 방음이 잘 되는 곳이라면 상관없네.”
셰실리코프의 말에 대꾸하며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불릿.
슬쩍 상기되는 그녀의 뺨에 셰실리코프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릿은 셰실리코프와 성벽에 올라서서 지형을 둘러봤다.
역시 몬스터 웨이브답게 평소라면 소수로 다녔을 몬스터들이 떼로 지어서 다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군대라면 모를까 일반인이 모여서 사는 마을단위라면 감당하기 버거울 전력이었다.
“바스톤의 일이 전 영토로 잘 전해졌는가?”
“확실히 전달받았습니다. 대단한 활약을 하셨더군요.”
“허허, 별거 아닐세. 백성을 위한 일이거늘.”
“아닙니다, 저라도 하급 마물이 다섯이나 뭉쳐 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불릿을 치켜세워주는 말인 듯 했으나 어디까지나 사실이었기에 민망할 필요도 없었다.
워낙 큰 규모의 사건이었던지라 비바람이 몰아치는 위험한 밤에 전령을 운영했었다.
미리 대비를 하지 않으면 급격하게 밀릴 수 있었기에 그런 일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본인이 무얼 했다고, 다 흙덩이가 고생한 덕분이지.”
“역시 각하의 배필답습니다. 저도 그런 배필을 맞이하고 싶군요.”
적당한 아부에 적당한 자기어필, 그래서 그런지 셰실리코프가 그리 밉상으로 보이진 않았다.
“흐음, 병력의 운용은 나무랄 데가 없군.”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셰실리코프의 요새화된 성은 흠잡을 만한 곳이 없었다.
수비에 용하기에 공격을 하기엔 약간 어려운 측면이 있었지만, 그것을 소드익스퍼트 상급인 셰실리코프가 직접 나서서 소수병력으로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벌이면 됐기에 딱히 단점으로 볼 수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평화로운데….”
“몬스터의 습격은 꾸준히 있습니다.”
자칫 자신의 활약이 묻힐까봐 급히 대꾸하는 셰실리코프.
그의 독백에 셰실리코프가 곧장 대답했으나 불릿은 고개를 저었다.
“바스톤은 물경 4천에 이르는 몬스터 군단이 습격했는데 여기도 그러진 않았잖은가?”
“그건 그렇습니다. 엊그제 있었던 습격에서 일천가량이 왔었으나 마물은 없었습니다.”
“그게 이상하단 거다. 똑같은 조건에 지형, 그런데 아무리 몬스터 웨이브라지만 바스톤에만 몰리는 게 말이 되는가?”
불릿이 무언가 말하려하자 셰실리코프도 수업을 듣는 학생처럼 경청하기 시작했다.
“역시 이번년도의 몬스터 웨이브는 흑마법사의 소행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급 마물이 다섯이나 뭉쳐있는 것이라거나 고급전력이 상대적으로 적은 바스톤을 습격한 것은 말이 되질 않아.”
흑마법사를 토벌하려고 준비를 하는 과정에 몬스터 웨이브가 터졌다.
그리고 그 몬스터 웨이브가 전례도 없이 1년이나 일찍 시작됐고, 그 전력도 이상할 정도로 막강했다.
보통 몬스터 웨이브는 한 달가량 지속되지만 많아봤자 수백이 뭉치는 게 끝이었다.
그 이상이 모여 있으면 몬스터들이 굶주림을 참지 못해 저들끼리 잡아먹거나 흩어져서 습격할만한 인가를 찾는다.
“이게 끝나고서도 사정이 되질 않는다며 칭얼대는 놈들이 있다면 그놈들부터 흑마법사의 조무래기로 판단해야겠군.”
그의 중얼거림에 셰실리코프는 식은땀이 흘렀다.
협력을 하던가 물자를 지원해주던가, 뭐라도 해주지 않는다면 흑마법사로 몰아가 죽이겠단 말이 아닌가?
셰실리코프도 한 지역의 영주였기에 무시할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온화한 성격의 불릿이 이런 말을 내뱉을 정도면 흑마법사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었는데, 이런 그에게 반대라느니 상황을 지켜봐야겠느니 말을 내뱉는 가신이 있다면 저번처럼 숙청당할지 몰랐다.
‘조심해야겠다.’
칭찬 한번 받았다고 방심했다가 실언이라도 내뱉으면 큰 코 다칠 것이다.
차가운 기운을 몰아내는 햇살을 맞으며 성벽로를 걷던 가운데, 저 멀리서부터 검은 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두두두…
그리고 이를 발견한 병사가 종을 울렸다.
땡땡땡땡땡-!
“서쪽 마수의 숲 방향 적 출현! 소형 몬스터 무리로 추정!”
종이 울리자마자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성벽에 비치해 두었던 활을 들며 이를 경계했다.
그리고 이들이 위치한 곳보다 조금 멀리서부터 상황을 관망하는 페릭스 천인장의 지시에 따라 지원 나온 병력들도 각기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불릿은 셰실리코프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가 병력을 지휘하지 않는군?”
본래 지원을 나온 대대의 천인장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해당 영지의 영주들의 지휘를 듣게 되어 있었다.
게다가 셰실리코프라 하면 왕국 전역에 이름 높은 검사이자 기사였으니 여러모로 보나 그가 지휘권을 잡는 게 맞았다.
불릿의 물음에 셰실리코프는 살짝 쑥스러워하며 말을 뱉었다.
“송구하오나 저 스스로가 부족함을 느껴 페릭스 천인장에게 지휘를 대리케 하였습니다.”
“부족하다? 자네가?”
“예, 그렇습니다.”
셰실리코프는 불릿이 복권하기 전에 어려운 국면에서도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욕을 먹는 것도 감수하고서 게슐린 그랩 자작의 휘하에 들어갔던 전적이 있었다.
그 후 불릿에 의해 상황이 악화, 그랩 자작이 도주하자 자작의 호위를 핑계 삼아 곁에서 충성스러운 연기를 하다 단칼에 목을 베었다.
반역의 주동자를 처단했다는 전과가 있었기에 숙청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셰실리코프.
그만큼 재치 있는 자가 스스로 부족하다 말하니 절로 눈가가 찡그려졌다.
“변명일지 모르겠사오나 저는 검을 쓰는 검사, 그것을 내세워 모자란 지력을 무력으로 떼웠던 것인데 운 좋게도 다른 자들이 그 점을 높게 평가해주었습니다.”
“쏴라!”
슈슈슈슉-
활이 쏘아지며 잠시 중단된 대화. 이러한 단절의 속에 목청이 터지도록 외치는 것은 몬스터 군단의 비명이었다.
- 크뤠렉!
- 취이, 케!
푸부북, 푸푸푸푹!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히는 공격에 소형 몬스터들은 변변히 저항도 못하며 불꽃처럼 아스라이 사라져갔다.
바스톤에서의 일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치 간단하게 정리되어가는 전투를 보는 불릿.
“이러한 전투가 지속된다면 차라리 자네가 밖으로 정찰을 나가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속을 알기가 어렵군.’
스스로를 낮추고, 불릿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쓰지만 역시 셰실리코프는 속이 깊은 사내였다.
불릿처럼 무턱대고 움직이지도 않았고, 돌이켜보면 하나하나의 행동에 이유와 적당한 명분이 존재했다.
경계할 필요는 없으나 조심정도는 하는 것이 서로의 관계에도 좋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가신과 주군 사이였으니까.
전력차이가 상당했기에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전투는 그로부터 약 반나절이 지나서야 끝을 맺었다.
거의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서야 종료가 되니 짙은 석양이 몬스터의 피로 얼룩진 대지를 붉게 비춰주고 있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항상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정석의 수급이 원활해지니까요.”
“그래도 그런 말은 함부로 해선 안 될 것이네. 정작 고통 받는 것은 백성들이니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음.”
불릿이 고개를 끄덕이자 셰실리코프도 곳곳에 횃불을 비추며 몬스터 사체의 수거에 들어선 작업장을 보며 입을 떼었다.
“슬슬 들어가시지요, 바람이 찹니다.”
툭, 두둑.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 아직은 얕기 때문에 사체의 해체작업을 진행하는 병사들도, 이를 지켜보는 불릿에게도 문제는 없었으나 대영주인 불릿이 하염없이 저것만 지켜볼 이유도 없었다.
“자네 덕분에 여기선 본인이 할 일이 없군.”
“각하께오서 한가할수록 변경백의 홍복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도 그렇구만. 그럼 들어가도록 하지.”
“옛.”
본래 불릿처럼 가장 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움직임이 적어야 한다.
지금이야 돈과 인력이 부족해 그가 직접 발로 뛰어다니지만, 예전만 하더라도 셰실리코프의 말처럼 그도 집무실에 앉아 보고만 받으며 승인처리를 해주는 것이 다였던 때가 있었다.
불릿이 바쁘게 돌아다니면 그 자신도 힘들고, 주변의 가신들도 눈치를 보느라 힘든, 서로가 서로를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었던 것이다.
투두둑, 투둑.
찔끔찔끔 내리는 비는 낮 동안 대지를 말려가던 따사로운 햇살로 인해 후덥지근해진 병사들에게 더욱 불쾌한 기분을 선사했다.
“에이 씨, 비는 왜 오고 지랄이야.”
스걱스걱-.
해가 지기 전에 가장 값나가는 마정석만 캐내려고 시체를 헤집던 병장의 얼굴이 있는 대로 찡그려졌다.
“말년에 이게 웬 개고생이냐….”
“아저씨, 빨리 끝내고 들어가서 밥이나 먹읍시다. 오늘은 특식이라고 하더만.”
병장의 투덜거림에 대꾸한 것은 상위병이었는데, 그는 이곳 토박이었고 병장은 중앙영지에서 지원 나온 병사였다.
하위병부터 병장까지 병력의 비율이 유지되는 것은 일정기간 복무하며 계급이 올라 병장이 되면 전역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목돈마련을 위해 군에 지원하는 것을 생각하면 병장의 비율이 낮은 것도 이해할 만했다.
기껏 목돈을 마련했는데 어영부영 눌러 붙어 있다가 죽으면 엄청난 손해였으니까.
“에이 씨, 진짜 거지같네.”
찔끔찔끔 내리는 비가 더욱더 그의 짜증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투둑, 툭.
========== 작품 후기 ==========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매크로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