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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정령사-204화 (204/241)

00204  몬스터 웨이브  =========================================================================

다음날도 비는 끝없이 내렸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렸는지 억수처럼 내리는 비에 몸도 마음도 축 늘어지는 것 같았다.

이러한 와중에도 병사들은 사후뒤처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마나가 없거나 부족한 병사들을 대신해 기사인 십인장들이 직접 발벗고 뛰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과는 별개로 불릿은 점심이 되어서야 내성을 돌아다니며 모처럼의 휴식을 한가로이 즐기는 중이었다.

터벅, 터벅.

“끄응, 겨우 잠재웠구나….”

시작은 자신이 했으나 끝을 내는 것은 흙덩이였기에 정령력과 육체의 회복과는 별개로 정신적 피로는 여전했다.

그래도 그녀가 보채면 마지못한 척 섹스를 즐기는 불릿.

신체 건강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하자고 하는데 정령력까지 차오르니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몸도 회복된 마당에 그 짓(?)만 하며 하루를 보낼 순 없었기에 폭우가 쏟아지는 바깥 대신 복도라도 거닐고 있었다.

‘올해는 정녕 장난이 아니로군.’

문득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바깥엔 우의를 뒤집어쓰고 돌아다니는 병사들이 보였다.

하위병으로 보이는 병사가 누구의 것인지 모를 조각나 팔을 들고 선임 병사에게 혼이 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신체일부, 빗물에 씻겨나가 핏기하나 없어 창백했으나 어제까지만 해도 저 팔은 누군가의 하루일과를 도왔을 것이다.

바포 변경백은 워낙 수비에 특화된 지역인지라 10년 주기로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하더라도 사상자가 적었다.

헌데 올해는 전보다 1년이나 더 빨리, 기습적으로 시작됐고 더 많고 더 강한 몬스터 군단에게 피해를 받았다.

‘다른 곳은 이러질 않길 바라야겠어.’

바스톤 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까지 이런 식의 습격을 받았다면 마탑지부가 있는 중앙영지와 카텐령을 제외하곤 큰 피해가 예상된다.

‘아니지, 카텐령은 마법사가 있어도 문제군.’

불모의 황무지와 맞닿은 탓인지 성벽이 없고 대신 나무로 만든 장벽만이 존재하는 카텐령.

중형 몬스터라도 등장하면 몇 번의 공격에 벽이 뚫릴 것이다.

“후우우.”

절로 한숨이 나오는 불릿. 가장 높은 곳에 있기에 가장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대영주의 모습이었다.

그가 복도를 거니고 있자 하녀 몇 명이 주춤거리며 불릿에게 다가왔다.

“저, 저기….”

“본인은 너희를 부른 적이 없다만.”

“그러니까, 그게….”

“뭐해, 빨리 말해야지?”

뒤에서 콕콕 찌르며 재촉하는 동료의 말에 하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구,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인가 싶어 그것을 내려다보니 하녀의 두 손 위에 올려진 것은 다름 아닌 좋은 향이 흘러나오는 쿠키봉지였다.

“누군가 전해달라고 시킨 것인가?”

그동안 이러한 것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의문이 들어 물었던 것인데 하녀는 얼굴이 벌게져선 거세게 도리질을 쳤다.

“아니에요! 이, 이건 그저, 저, 저희 오빠를 구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에…시, 싫으시면 도로 가져갈게요!”

‘병사들 중에 누군가의 가족인가보군.’

불릿은 안절부절 못하는 하녀가 안쓰러웠기에 독살의 위험도 있었으나 그 자리에서 포장을 열어 하나를 집어먹었다.

바삭.

“흐음, 맛있긴 한데 단맛이 부족한 것 같기도….”

“네, 넷?!”

“아니다, 충분히 맛있다. 잘 먹으마.”

단거를 좋아하는 불릿이었기에 나온 말이었으나 당황하는 하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재차 말을 건넸다.

‘홍차와 먹으면 알맞겠지.’

다디단 홍차에 설탕을 듬뿍 넣은 쿠키는 생각보다 잘 어울리지 않다.

왜냐면 단맛에 단맛이 중첩되어 상대적으로 덜 단 음식은 맛이 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쿠키가 달면 약간 쓰거나 새콤한 음료가 좋았고, 그 반대라면 담백한 맛의 다과가 좋다.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불릿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재잘거리며 사라져가는 하녀들을 바라보았다.

“친숙한 대영주라….”

근엄하고 믿음직한 웃어른으로서 살아온 세월이 잘못됐단 건 아니지만, 마치 이웃집 오빠와 같은 대접을 받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이것도 나쁘진 않군.”

젊어진 만큼 젊게 사는 것도 삶을 사는 하나의 방법이리라.

그는 그렇게 선물 받은 쿠키봉지를 위아래로 던졌다 받으며 어딘가로 걸어갔다.

* * *

브룩 남작은 밀려드는 서류의 홍수에 정신이 없었다.

밖은 홍수가 나진 않을까 걱정되는 폭우가, 안에선 서류에 파묻혀 숨이 막히지 않을까 걱정되는 서류의 홍수가 도래한 것이다!

…그래도 밖에서 고생하는 병력들보단 나았기에 브룩 남작은 별다른 군말 없이 아침부터 점심이 되어서까지 쉬지 않고 종이 넘기는 소리만 내고 있었다.

“3년 치 군비가 한 번에 사라지다니….”

그가 중얼거리는 내역엔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내용이 나와 있었다.

단순 재화가 사라진 것만 그렇고, 성벽이 무너진 것과 죽은 병사들을 위한 보상금, 난민발생에 관련한 것 등등등….

끔찍할 정도로 많은 돈이 나가게 생긴 것이다. 다음 몬스터 웨이브가 있을 때까지 복구가 될지 안 될지 예상도 안 됐고, 내년에 몬스터 웨이브가 재차 발생할 수도 있었기에 긴장을 늦출 수도 없었다.

그가 이러한 고민을 거듭하는 이때, 집무실의 문이 두드려졌다.

똑똑똑.

“들어가도 되는가?”

“물론입니다.”

불릿의 음성이 들리자 브룩 남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구겨진 복장을 점검한 후 문을 향해 걸어갔다.

불릿이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오자 그는 왼팔과 오른다리를 뒤로 빼는 귀족의 예법으로 불릿을 맞이했다.

“찾아뵙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아닐세, 본인이 오지 말라 했거늘 뭘 미안하다고.”

“…끝나신 겁니까?”

“조금 덜 한 것 같기도….”

끝낸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저러는 불릿에게 브룩 남작은 한쪽에 비치된 소파로 그를 안내하며 말을 걸었다.

“정열적인 사랑도 좋지만 조절을 해야 더 길고 오래 가실 수 있습니다.”

“유부남의 조언인가?”

“아뇨, 그냥 한 번에 다 하면 쉽게 질리니까 말입니다.”

“…….”

‘뭐라는 거야.’

서류더미에 묻혀서 그런지 맛이라도 간 모양인지라 불릿은 적당히 흘려들어주었다.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농을 치우고서 본격적인 상황파악에 나서니 브룩 남작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도 자리에 앉자 집무실의 분위기는 한층 가라앉은 상태.

쿠르릉…

무거운 분위기를 날씨도 안 것인지 천둥까지 치며 더욱 우중충한 느낌을 연출해주었다.

“영지의 모든 자금을 피해복구에 힘을 써야할 정도로 나쁩니다.”

“중앙에서 지원을 나오면?”

“이미 많은 병사가 죽었습니다. 자제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으음….”

전력상으로만 보면 중앙영지의 군단이 브룩 남작의 바스톤 영지군보다 강하다.

그러나 군단의 병사들은 실전경험이 적었고, 마수의 숲과 인접한 바스톤의 병사들은 실력은 낮더라도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실력에 비해선 잘 싸웠다.

그렇다곤 해도 기본적인 수준이 낮았기에 각각 1000명씩 존재했던 바스톤 주둔군과 중앙영지의 대대는 대략 500여 명씩 사망한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살아남은 병사들까지 다른 지역에 주둔시키면 그들의 사기는 말이 아니게 된다.

“자네의 영지인데도 거절하는 말을 잘도 하는군.”

불릿의 말에 브룩 남작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

“어차피 변경백의 모든 것은 각하의 것이온데 말입니다.”

“사람하곤, 짓궂긴.”

“저만 짓궂겠습니까?”

“그렇긴 하지. 괜히 젊어졌어, 쯧.”

“하핫!”

일부러 화제전환을 하기 위해 웃어보였으나 그래도 억지웃음이나마 지으니 한결 기분이 나아지는 듯했다.

“각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그런 웃음기도 지우고 브룩 남작이 다시 진지모드로 돌아서자 불릿은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대체 본인의 가신들은 저런 말을 할 때면 하나같이 거북한 말을 한단 말이지.”

그래도 안 들을 수도 없었기에 그가 손을 휘저으며 허락하자 브룩 남작의 입이 열렸다.

“이번 여정, 이쯤에서 그만두시는 편이 어떨까 싶습니다.”

“또 그 소리였군.”

이미 불릿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기에 재차 대답을 하려 했으나 브룩 남작의 입이 더 빨랐다.

“너무도 위험합니다. 각하께서도 보셨듯이 이번 몬스터 웨이브는 저희 모두가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몬스터떼의 수준이 남달랐지 않습니까.”

“그래서 더더욱 본인이 필요한….”

“작은아씨는 대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것, 으음.”

흙덩이까지 이야기에 들어서자 불릿은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녀가 없으면 자신이 정령력을 발산해 기세로 몬스터를 압박한다 해도 그것만으론 몬스터를 잡을 순 없다.

게다가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단도 없으니 어제 보았던 하급 마물의 투척공격이라도 당하면 그대로 즉사할 것이다.

소드익스퍼트 중급 이상의 인물이 호위를 선다면 괜찮겠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실력자를 단순히 호위를 목적으로 사용한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는다.

“분명 능력은 출중합니다. 인간의 몸으로 정령술을 발휘하는 것, 전후무후한 대단한 사건이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브룩 남작은 깍지를 끼고서 턱을 댄 채 불릿을 향해 시선을 던지며 읊조리듯 말을 내뱉었다.

“정신이란 것은 쉬이 강해지지 않습니다. 아니, 강해진다기보다는 무뎌진다는 것이 더 적절하겠군요.”

자신의 머리를 톡톡 건드리며 말하는 브룩 남작을 불릿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흙덩이의 나이 이제야 10살, 그보다 더 적을 수도 있는 그녀에게 무섭다며, 공포에 질려서 울어재끼던 그녀를 억지로 다독이며 끌고 온 것도 불릿이었다.

아무리 잘해준다고 해도, 사랑을 나눈다 해도 잘못한 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여기서 무슨 말을 하건 변명일 것이다.

“강한 병사의 조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병장기의 숙련도, 강인한 체력, 좋은 무장.”

그야말로 정석적인 대답이었으나 브룩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살겠다는 의지. 저놈을 죽이고 내가 살겠다, 그래서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겁니다.”

죽인다는 것도 하나의 고통이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할 수 있기에 인간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군인이 존경받을 수 있는 직업인 것이다.

하지만 10살짜리 아이가 감당할 수 있냐 묻는다면, 그걸 시키는 사람보고 미쳤다는 소릴 들어도 할 말 없으리라.

‘…씁쓸하군.’

문득 불릿은 흙덩이가 겁에 질려서 내뱉던 말이 떠올랐다.

‘으으, 이거 이제 하기 싫어…, 힘들고 무서워.’

가슴을 저미는 말, 그녀에게 자신은 끝없는 고통을 안겨주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불릿의 입장에서 마냥 자신만을 위해 살아갈 순 없었다.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다.”

설사 부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버림받더라도 물러설 수 없는 불릿.

가장 가까운 이에게 이해받을 수 없기에 고독한 자리, 그 이름은 대영주였다.

그래서 바포 변경백까지 자신을 따라온 올리비아에게 진심어린 사랑을 느꼈던 것인데, 그녀조차도 불릿의 행보를 마냥 응원해주지 못했다.

현모양처인 유실리아도, 오직 불릿만 바라보는 흙덩이도 싫다고 한 게 이번 여정이었으니까.

불릿도 알고 있었다. 이런 선택이 남녀사이에 결코 좋지 못하다는 것을.

“내년에 결혼식을 못하는 수가 있어도 말입니까?”

“생각 좀 해보지.”

그래도 혼인만은 사수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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