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00 몬스터 웨이브 =========================================================================
크오오!
“취, 취이익….”
“끄아! 으아악!”
“으어어어….”
주변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흙덩이가 ‘쾅’이라 외치며 펼친 정령술은 그녀의 정령술 매개체인 흙이나 돌 같은 물질을 터뜨리는 기술이었다.
새로이 만들어낸 만큼 사용할 때마다 쓸 만하다 여기고 있었는데, 그것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정령력을 들이붓자 그것은 운석이라도 낙하한 것 같은 효과를 낳았다.
크레이터가 만들어진 자리엔 몬스터의 핏물이 고이기 시작했으며 다섯 마리의 하급 마물들 또한 정신을 못 차리고 몸도 가누지 못했다.
강인한 육체를 지닌 몬스터들이 이렇다면 연약한 살과 피부를 지닌 인간이 무사할 리 없다.
성벽을 중간에 두었기에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으나 불릿처럼 고막이 손상된 자들, 실수로 성벽에서 떨어진 자들, 심장마비라도 일어났는지 경련을 일으키는 자들도 있었다.
그것은 흙덩이의 탓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아군을 죽인 것도 되었다.
“으음….”
불릿도 흙덩이도, 아직 자신들이 얼마나 강해진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에 벌어진 사고였는데, 그는 흙덩이가 이 일로 자책할까봐 서둘러 입을 열었다.
“브룩 남작! 일어나게!”
“으, 윽. 괘, 괜찮으십니까, 각하?”
“지금이 바로 놈들을 쓸어버릴 기회다! 어서 진격해야 한다!”
“자, 잠시만, 저도 좀 보겠습니다.”
상황판단을 해야 했기에 브룩 남작은 비틀비틀 바깥을 내려다보았다가 혀를 내둘렀다.
“이건, 굉장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군요. 마스터라 할지라도 피하지 못하면 그야말로 즉사하는….”
“뭐하는 겐가! 어서 문을 열고 병력을 출진시키게!”
브룩 남작이 감탄사를 내뱉는 사이 하급 마물들이 정신을 차리고 있자 급해지는 불릿의 마음, 이에 따라 브룩 남작도 뭐가 급선무인지 파악하여 내성의 인물들에게 마나를 실어 외쳤다.
“전 병력은 들어라! 몬스터 군단의 절반이 죽었다! 지금이 아니고선 기회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성문을 열어라!”
“개방!”
“개방하라, 개방! 윽, 시발, 개바아앙!!”
경지가 얕은 자들은 귀에서 피가 흘러나왔으나 다행히 소리는 들을 수 있었는지 부상자를 수습하며 성문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극-
빗장을 치우고 미닫이식의 성문이 열리자 눈앞의 광경에 병사들은 물론이고 기사인 십인장과 백인장, 그리고 겔럭서스 천인장도 눈이 부릅 떠졌다.
“저, 저게 무슨…!”
“이게 정녕 작은아씨의 힘인 것인가?”
“왁, 씨! 오우거가 반쪽이 됐어!”
흙덩이의 정령술에 휘말린 몬스터치고 멀쩡한 놈은 하나도 없었는데 그 중에는 재생력이 뛰어나다는 트롤이나 숲속의 폭군 오우거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트롤은 자신의 장기인 재생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고, 그래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오우거의 대부분은 너무 큰 덩치를 지녀서인지 폭심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상체에 파편을 맞고 죽은 놈들이 많았다.
놈들의 공격 한 방이면 스쳐도 중상이었기에 정예병이라 한들 벌벌 떨며 두려워하던 놈들이 대거 사라졌으니 병사들의 사기가 점점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중형과 대형 몬스터가 많이 사라졌다!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 부모, 형제, 친구, 애인과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모두 돌겨억!”
“돌격하라!”
“와아아!!”
“죽어라 개새끼들아!”
험한 욕설과 함께 지축을 울리며 앞으로 전진 하는 중앙군과 바스톤의 병사들.
그러나 그들은 질서정연하게, 누구하나 먼저 나서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중구난방으로 움직였다가 어찌 되는지를 후퇴를 통해 뼈저리게 느꼈으니까.
으악!
케르르르-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는 전장이 시작되자 그제야 불릿은 겨우 자신의 품에서 덜덜 떠는 흙덩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거 모야, 무셔….”
자신이 만든 참상이 믿기지 않는지 얼어붙은 혀가 제대로 떼어지지 않아 혀 짧은 소리를 냈다.
이런 모습의 흙덩이도 귀엽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우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기에 불릿은 체온이 높아진 자신의 손으로 그녀의 볼을 어루만져주었다.
스윽, 스윽.
“괜찮아, 괜찮아, 오히려 이건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일이란다.”
“흐, 흙덩이가 저런걸 한 거야? 으으으.”
“내 힘을 이렇게 쓸 수 있는 건 너뿐인걸? 흙덩이는 내 힘이 싫어?”
불릿이 자신을 언급하며 묻자 그녀의 떨림은 귀신같이 멈추었다.
“아니, 좋아. 불릿꺼라면 뭐든 좋아. 하얀 오줌도 맛있게 먹을 수 있….”
“크흠, 각하.”
“……어.”
하필 그 대화를 빠짐없이 듣고 있던 브룩 남작이었기에 불릿은 괜히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흙덩이는 그의 손바닥으로 입이 봉해졌으나 진정은 됐는지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심리상태를 알려주었다.
이런 가운데 셋은 성벽에서 활을 쏘아대는 병사들과 함께 아래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슈슉, 슉, 슉.
“역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당하는군요.”
“아무렴, 누구 솜씬데.”
스윽스윽.
“헤헤.”
자신을 칭찬하는 불릿의 말과 손길에 흙덩이가 달라붙자 회색의 로브로 인해 작은 바윗덩이가 된 듯했다.
그는 흙덩이의 몸을 어루만지며 브룩 남작에게 말을 걸었다.
“…예상보다 위력이 강하다. 우리를 보호한다고 호위병이 곁에 있다간 같이 휩쓸릴 수도 있겠어.”
“설마 두 분이서만 가시겠단 겁니까?”
그들의 계획은 흙덩이가 큰 거 한 방을 날리면 줄어든 몬스터군단의 틈으로 병력이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혼란해진 사이에 소수의 인원을 대동, 잡스런 몬스터에게 힘을 낭비하지 않으며 관심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고, 하급 마물을 하나하나 처리해나간다는, 그런 시나리오.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허나 이런 위력이라면 굳이 눈에 띄게 호위병을 대동하며 느릿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 불릿은 절반의 정령력만 남은 상태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꾸준히 회복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흙덩이와 야한 짓을 하면 빠르게 차올랐으니 정령력의 수급에도 문제는 없었다.
아, 그렇다고 막 전장 한복판에서 그 짓을 하는 건 아니다.
“호위로 익스퍼트 중급 이상을 붙여준다면 내 생각해보기로 하지.”
“……무리인걸 뻔히 아시면서 그런 소릴 하시다니….”
호위병을 떼어놓기 위해 내뱉는 불릿의 대꾸에 브룩 남작은 화가 나는 듯했다.
“각하께오선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진정 대영주란 자각을 하고 계시긴 합니까?”
“자네는 화를 잘 내는군.”
“말 돌리지 마십쇼. 당신께서 없으신다면 이번에야말로 진정 혼돈이 도래할 것입니다.”
“흐음.”
“오빠, 이 아저씨 때려줘?”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보는 흙덩이의 콧등을 살짝 꼬집어주는 불릿.
“아코.”
그의 손길에 흙덩이는 귀여운 소릴 내며 얌전히 불릿의 손길을 받았다.
“믿어보게. 다른 변명은 하지 않겠네.”
“…….”
‘가이아 여신이 지켜보고 있는데 알려줄 수 없으니 답답하군.’
분명 불릿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줄 때 무언가 선물을 준 가이아 여신이었다.
게다가 항시 흙덩이를 통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고 있다니 그만큼 든든할 수가 없었다.
아무렴 자기 딸이 위험한데 신이라는 위치 때문에 중간계에 아무 개입도 하지 않겠는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뭔가를 해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고 그것에만 의존하는 것도 우스웠고, 그저 만약을 위한 대비책이 하나 생겼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도 편하고 좋았다.
‘흙덩이와 사랑을 나눌 땐 안 봐주셨으면 좋겠지만.’
그걸 엿보는 건 부모라 할지라도 도촬(?)이다, 범죄, 변태다.(?)
“더 이상 지체했다간 늦겠군. 우린 먼저 가볼 테니 자네도 합류하게. 흙덩아, 손잡아.”
“많이 줘야해?”
“배부를 때까지 주도록 하지.”
뚜벅, 뚜벅.
둘이 계단을 타고 성벽에서 내려가자 침묵을 지키던 브룩 남작은 시선을 돌려 난전이 진행 중인 외성 쪽을 바라보았다.
- 쿠어, 쿠어!
- 오오, 우오오…
마물은 절대 뭉치지 않는다. 마계의 율법인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놈들은 저마다 자기가 왕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이놈들처럼 다섯이나 되는 놈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그 거대한 덩치를 들이밀며 알아들을 수도 없는 괴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경우를 보기란 하늘에 별 따기만큼 힘들 것이다.
외눈거인, 파충류인지 혀를 낼름거리면서도 이족보행을 하는 희한한 놈, 근육이 우락부락한 위압적인 녀석 등…
총 다섯 마리의 하급 마물은 무언가 작당모의를 하는 듯했다.
이런 모습은 저 멀리서 조심스레 접근하는 불릿의 눈에도 들어왔다.
“근처에 흑마법사가 있나?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로군.”
주변을 살펴보던 불릿은 몬스터가 접근하자 병사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윽, 밀지 말라!”
“어떤 새끼가…헉, 가, 각, 읍!”
“쉿, 조용히. 마물에게 접근 중이니 입 닥치도록.”
“읍읍.”
“좋아, 계속 전투를 하라. 건투를 빌지.”
“푸하!…기다리겠습니다. 충.”
“충.”
십인장의 군례를 받아준 불릿은 대동한 흙덩이를 놓치지 않도록 더욱 손을 꼭 잡았다.
“흙덩아, 주변에 흑마법사가 있는지 확인 가능하니?”
그녀의 탐지능력이라면 대지를 딛는 자라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궁극의 탐지기능이었다.
“알고 싶으면 정령력 5쿠퍼.”
“……뭔 소리야, 빨랑 해.”
“치, 알았어.”
우우웅…
그녀는 마나에 민감한 마물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얕게 정령력을 뽑아내 땅으로 침투시킨 후 눈을 감았다.
흙덩이가 흑마법사의 존재를 탐지하는 사이 불릿은 그녀를 지키기 위해 창을 꼬나쥐고서 주위를 경계했다.
그들은 지금 의심받지 않기 위해 병사들의 갑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미리 착용하고 있다가 로브만 벗으니 유관상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웠으나 외모가 워낙 빛나서 불릿은 차림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안면가리개가 달린 투구를 착용했다.
흙덩이는 워낙 가슴이 커서 맞는 갑옷이 없었기에 가슴팍의 부품은 떼어낸 상태.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가슴에 우연히 눈을 마주친 병사들이 그곳에 눈길이 갔다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은 몰라도 되는 사실.
그녀 또한 기다란 머리카락을 가리기 위해 올리비아처럼 머리를 올려 묶은 뒤 헬름으로 그것을 가렸다.
“없어. 근데 저 큰 하급 마물로부터 더러운 끈이 있어.”
“끈?”
“응. 까만 끈. 중앙영지를 지나 불모의 황무지까지 이어져 있어.”
“역시 그러한 건가….”
흙덩이의 본래 나이를 생각하면 이상한 대화였으나 그녀의 기억력이 비상할 정도라는 것을 상기하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불릿은 그녀의 대답에 상념에 잠기려다 곧장 거기서 빠져나왔다.
“일단 저기까지 이동하자. 마침 모여 있으니 큰 거 한 방이면 마물을 전멸시킬 수 있겠군.”
“여기 끝나고 나면 흙덩이랑 할 거야?”
“음?”
의문이 든 불릿이 그녀를 쳐다보자 흙덩이는 손을 뒤로 한 채로 몸을 배배 꼬며 부끄러워했다.
“그게 말이야, 정령력 없으면 오빠도 힘들잖아? 그러니까, 그거 채우려면, 그게, 흙덩이랑 그거…기분 좋은 거…해야지…. 헤헷.”
“…….”
확실히 정령력을 채우는 데에 흙덩이와의 성교만큼 좋은 것도 없었지만 때때로 난감한 불릿이었다.
‘왜 하필 이런 방식으로 채워지는 것인지….’
그렇다고 마정석을 이용한 방법은 너무도 방대해진 정령력을 채우기에 많이 모자랐다.
아마 다 채우려면 시간도 시간이지만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기분도 좋고 정령력도 채우고, 잘하면 애도 생기는(?) 잠들지 못하는 사랑이 나으리라.
“올리비아랑 유실리아의 화를 풀어주지 못했는데….”
“말 안하면 돼! 그럼 거짓말 하는 거 아냐! 하자, 응?”
여자 쪽에서 먼저 애타게 바라오니 피가 난무하는 전장 속에서 괜히 이상한 쪽으로 불릿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크흠, 일단 마물 먼저.”
“그래! 히히히!”
하급 마물을 죽이러 가는 흙덩이의 발길은 한층 가벼웠고, 창을 꼬나쥔 불릿의 발걸음은 그보다 무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