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9 몬스터 웨이브 =========================================================================
“자네는 검술에도 일가견이 있었지?”
무언가를 빗대서 말하려는 것인지 예감한 브룩 남작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럽지만 소드익스퍼트 하급에 불과합니다.”
“검술에 비해 마나가 부족한 것은 삼광이나 자네나 비슷하군. 뭔가 공통점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냥 지리적 특징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마수의 숲과 인접한 곳의 영주인 삼광(三光) 셰실리코프와 바스톤의 주인 브룩 남작은 두 사람 다 혹독한 환경에 처했다는 점에서는 같은 점을 지녔다.
그런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호흡법을 통해 마나를 쌓는 것보다도 육체적 힘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할 수밖에 없었기에 자연스레 마나홀은 도태될 것이다.
“셰실리코프가 정령사 가문이라서 그런지 마나를 쌓는 데엔 유리한 면이 있지.”
불릿이 찻잔을 매만지며 중얼거리자 브룩 남작도 이에 동의한다는 모습을 보였다.
재능은 피를 통해 계승된다. 비록 전부는 아니더라도 높은 경지에 있는 이가 후세에게 더욱 많은 재능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여러 사례를 통해 검증되었다.
그래서 소드마스터나 대마법사, 시대를 풍미한 정령사들은 언제나 삼처사첩은 흔한 일이었다.
그 점을 상기하자 어쩐지 불릿은 자신도 그리 되어가는 것 같아 심기가 불편해져 머릿속에서 그걸 지워버렸다.
‘올리비아….’
그녀와 유실리아만 생각하면 아직도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종종 떠올랐지만 이미 엎지른 물, 용서를 빌더라도 몬스터 웨이브가 끝나고서 해야 할 것이다.
“흠흠, 그래서 본인이 얘기코자 한 것은 삼광을 기준으로 하려던 것이네. 자네도 검을 쓰니 그가 얼마나 강한진 알지 않은가.”
“강하지요, 무섭도록.”
브룩 남작은 마수의 숲과 맞닿은 덕분인지 셰실리코프와 교류를 나누고 있었다.
친분까지는 아니어도 서로의 검술을 비교해보기도 했는데, 브룩 남작이 대륙의 일반적인 파워를 앞세운 검술이라면 셰실리코프는 극도의 빠름을 중시한 바람의 검사였다.
그렇기에 브룩 남작은 친선경기를 가질 때마다 그가 제대로 힘을 발휘할 때면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한 채 패배하곤 했다.
“그 정도의 기사가 하급 마물을 상대로 1:1의 상황이라면 승리할 수 있다는 걸 알겠지.”
“그래서 부럽기도 합니다. 제가 그 정도의 경지였다면 이렇게 밀리진 않았을 터인데.”
주먹을 쥐며 부르르 떠는 브룩 남작. 소드익스퍼트 상급이면 하급 마물을 상대로 홀로 격전을 벌일 수 있다.
상급의 경지라 하여 그와 같은 경지에 놓인 이들이 매번 승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셰실리코프의 검술은 상급에서도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었다.
최상급은 중급 마물을, 소드마스터는 상급 마물을 단독으로 상대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그 정도 수준에 도달한 자들은 국가에서 귀중한 보물로 취급해 전면에 나서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본인과 흙덩이는 그런 그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네.”
“각하…?”
“죽인다는 가정 하에는 100명이 있더라도 단숨에 쓸어버리겠지.”
“각하?! 그 무슨!”
“최상급과 마스터는 어떻게 대응할지 상상이 되질 않아 잘 모르겠군. 그래도 최상급이라 하면 질 것 같진 않네.”
그것이 그동안의 여정을 통해 흙덩이의 능력을 점검한 불릿의 평이었다.
놀라운 말이었기에 브룩 남작의 언성도 자연히 높아졌다.
“지금 보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반격에!”
“안 된다고 말했질 않나. 본인에겐 성급하다 해놓고선 자네가 그리 말하면 안 되지.”
“어째서 지금은 아니 된단 말씀이십니까?”
그의 물음에 불릿은 심각하게 굳은 얼굴을 매만지며 나직이 읊조렸다.
“흙덩이가 자고 있잖은가. 자는 아이를 왜 깨우려고 그래.”
“…….”
“흠흠.”
이번엔 진정 할 말을 잃은 브룩 남작이었다.
* * *
- 우오오오!
외눈박이 거인의 모습을 한 마물이 부서진 성벽의 잔해를 집어던지자 거기에 부딪친 내성의 외곽은 거세게 흔들렸다.
콰과과과곽!
“으악, 떠, 떨어진다!”
“엎드려, 엎드려! 대가리 내밀지 마!”
수비를 위해 많은 수의 병력이 성벽로(성벽에 나있는 길, 용도에 따라 폭을 조절한다)에 올라서 있었기에 대놓고 날아오는 바위덩이에도 그들은 차마 피할 수도 없었다.
내성을 포기하면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고, 수비를 할 만한 마땅한 위치도 없었기에 그냥 몬스터의 해일에 그대로 휩쓸리는 수만 남는 것이다.
“겁먹지 마라! 각하께서 큰 한 방을 준비하고 계신다!”
“불릿 폰 바포 백작각하께서 상급 정령사라는 점을 잊지 말라!”
주변의 십인장과 백인장들이 그들을 다독이자 성벽에 바짝 엎드려있던 병사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마, 맞아, 우리에겐 정령이 있었어!”
“대영주님 만세! 바포 백작님 만세!”
“최고 사령관 만세!”
“와아아!”
불릿이 복권한 이래 해내지 못한 일이 없었기에 병사들의 사기는 치솟기 시작했다.
“근데 작은아씨는 정령이 아니잖아?”
“그럼 대체 뭘로 힘을 내시는 거지?”
“그러게.”
“?”
“??”
이러한 와중에 흙덩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인간이 된 것인지 모르는 병사들에게 있어 미심쩍은 요소가 남아있었다.
정말 자신들을 구해줄 정령사가 맞는 것인지, 아니면 능력을 상실했으나 말만 그럴듯한 불릿만 남은 것인지.
기대 반, 불안 반의 감정이 뒤섞인 장내의 분위기속에 불릿은 브룩 남작과 함께 우글우글한 몬스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에에
끼악!
크르르르…
하급 몬스터라고 해서 마냥 얕볼 순 없는 게 그들 중에서는 인간처럼 발달된 문화를 지닌 놈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놈들은 대개 지능이 높거나 압도적인 폭력을 지니고 있었기에 흑마법사의 현혹과 소환마법에 걸리지 않은 것인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랄 수 있었기에 브룩 남작은 한숨을 토해냈다.
“후우. 그나마 다행입니다. 검은 귀 부족이 난입했으면 이미 사태는 끝났을 겁니다.”
“놈들도 아는 거겠지. 이번 사태가 누군가의 개수작이란 것을.”
거친 말을 내뱉는 불릿에게 브룩 남작은 고개만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검은 귀 부족은 마수의 숲을 영역으로 삼는 오크종족이었는데, 외부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가끔 인간과 마주치더라도 조용히 뒤로 물러서며 분쟁을 피했다.
그렇다곤 하나 과거 마수의 숲을 침범한 왕실의 기록에 따르면 마스터로 추정되는 강한 오크가 있다하니, 그게 아마 검은 귀 부족의 족장이 아닐까 짐작되었다.
“이번 몬스터 웨이브를 넘기더라도 마수의 숲은 예의주시해야 할 것이다. 검은 귀 부족 또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예, 각하.”
마스터의 경지는 지고지순한 무의 정점, 끝없이 갈고닦지 않으면 선천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 한들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그러니 검은 귀 부족의 족장은 머리가 좋을 것이고, 놈들을 자극하는 일은 피해야 할 것이다.
불릿은 자신의 로브자락을 잡고 있는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문을 열었다.
“흙덩아, 네 차례가 돌아왔단다.”
“쿨쩍, 여기 추워.”
그녀의 말대로 성벽은 높을 수밖에 없었기에 그곳의 위는 바람이 쌩쌩 불었다.
게다가 지금은 장마철, 지금은 비가 그쳤다고 하나 여전히 먹구름은 끼어있고 비에 젖은 대지는 질척이면서 온도가 낮았다.
그는 흙덩이의 콧물을 손수건으로 닦아준 후 몬스터가 대거 뭉쳐있는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몬스터가 많이 있는 곳 보이지?”
“히윽, 앙, 너무 문대지마, 말하기, 익, 힘들어.”
“콧물 흘리면서 그런 말 해봤자 소용없다. 자, 다 됐다. 그럼 큰 거 한방 날려주겠니?”
“알았어!”
어젯밤 잠이 들었던 베갯머리에서 말했던 것처럼 흙덩이는 불릿의 정령력을 거의 절반이나 끌어다 썼다.
우우웅-!
휘청.
“큭.”
“각하!”
“괜찮다, 예상한 일이다.”
없을 땐 모르겠으나 있다가 없을 때의 상실감은 크다.
마치 강처럼 웅장하게 있던 정령력이 큰 규모의 무언가를 준비하는 흙덩이에게 빨리니 마치 올리비아에게 시달린 후 눈 밑에 거뭇한 기미가 올라왔을 때처럼 힘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흙덩이는 착실히 정령술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마나의 폭풍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사방에 흩어져 있던 모든 마물과 몬스터들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 크와! 크롸롸!
- 우오오오!
- 취리릿!
놈들은 걸걸하다 못해 인간이 낼 수 없는 괴상한 음성과 대기를 울리는 엄청난 피어, 그리고 족히 수십 미터는 될 법한 혀를 채찍처럼 날름거리고 있었다.
쿵-, 쿵-, 쿵-!
두두두두두-
취이익!
끼아악!
“각하, 놈들이 몰려옵니다!”
“알고 있어!”
저 멀리 있는 몬스터들이 모두 알아챌 정도면 당연히 인간 쪽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들 또한 흙덩이가 있는 성벽에서 발산되는 마나의 흐름에 놀란 상태.
모두가 오직 흙덩이만을 바라보는 가운데 불릿도 초조한 기색을 띠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휘오오오…
바람의 정령도 아닌데 흙덩이의 주위엔 이상한 기류가 흘렀으나 그렇다고 빛이 번쩍인다거나 공명음이 울리진 않았다.
그렇게 몬스터 웨이브가 코앞까지 들이닥치자 기다리다 못한 불릿이 그녀를 향해 외쳤다.
“흙덩아, 지금!”
그의 목소리에 흙덩이는 번쩍 눈을 뜨더니 개떼처럼 몰린 몬스터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이거나 먹엇! 쾅!”
……
잠시의 정적,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드드득-
“킥?”
진흙바닥이 분명하거늘 뛰어가던 고블린은 그것이 이상한지 자신의 발밑을 쳐다보았다.
드드드…쿠구구!
“끼익?”
콰아아아앙-
쿠구구구구--!!!
모두의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커다란 굉음, 이에 흙덩이는 자신이 펼쳐놓고도 양손으로 귀를 막았고, 성벽의 위까지 거센 진동이 느껴지자 불릿은 고막을 보호하는 것을 포기하고 흙덩이를 덮치며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전군 자세를 낮춰라! 엄폐! 엄폐에에!!”
그 말을 끝으로 브룩 남작 또한 성벽에 의지한 채 몸을 숙였고, 겔럭서스 천인장이 미처 그의 말을 복창하기도 전에 굉음 후의 미칠 듯한 폭풍이 내성의 인간들을 덮쳐왔다.
푸화악-!
후두둑,
톡, 톡, 데구르르르…
위에서부터 무언가의 파편이 등에 닿자 흙덩이의 위에 올라탔던 불릿은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크으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으나 어쩐지 그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흙덩이!’
그러나 흙덩이에게 생각이 미치자 그의 정신은 번쩍 들었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자신의 밑에 그녀가 있음을 깨닫고 서둘러 시선을 내렸다.
“……!!”
“…? 뭐라고?”
“…! …??!”
“뭐야, 왜 안 들리는 거지?”
자신의 아래에 깔려있는 흙덩이가 입을 뻥긋거리며 무언가를 전하고자 했으나 그는 몸으로 전해지는 진동을 제외하면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침묵마법? 근처에 흑마법사가 있나?!”
서둘러 고개를 좌우로 살펴보는 불릿이 한심했는지 흙덩이는 그의 팔을 붙잡고 치유능력을 불어넣었다.
화아악!
밝은 빛이 뿜어지며 단숨에 생체기를 포함한 상처들이 낫자 불릿은 그제야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불릿, 괜찮아? 이제 들려?”
“들린다. 청력이 손상됐었나 보군.”
“일어나! 빨리! 나중에 해줄 테니까(?) 빨리!”
“아, 알았어, 누가 그걸 지금 한다고, 크흠!”
이상한 대화를 주고받은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둘의 입은 절로 떡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