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8 몬스터 웨이브 =========================================================================
“헉, 헉.”
레논은 루드밀라 왕국의 국경선을 지키는 바포 변경백 바스톤 영지의 병사다.
딱히 뛰어난 무력을 지녔다고 볼 순 없지만 다른 군벌에 속한 병사들보단 낫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레논의 장점은 서포트, 다른 병사들이 마수의 숲을 뚫고 튀어나오는 몬스터를 사냥하는 사이 자신은 뒤나 옆에서 견제를 하거나 필요한 물품을 제때 보급하는 것이었다.
직접적인 활약은 없었으나 그는 언제나 그 일들이 중요하다 여겼고, 실제로 그의 도움을 받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군이 있을 때의 이야기, 지금처럼 중구난방으로 후퇴하는 과정에선 그의 장점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크취익!”
부우웅-
“으헉!”
등 뒤에서 파공성이 들려오자 레논은 뒤돌아볼 새도 없이 옆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그가 옆으로 구르자마자 오크의 몽둥이가 땅거죽을 파헤쳤는데,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을 노려보는 오크의 시선에 레논은 바짝 얼었다.
“크르르….”
“제, 젠장!”
서둘러 일어서려 했으나 한번 몸이 굳어버리니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주변에 마물이 많아서인지 광폭화에 걸린 오크는 단숨에 몽둥이를 내리치니, 레논의 최후도 여기인가 싶었다.
“큭.”
팔이라도 들어 몽둥이질을 막으려던 레논은 눈을 질끈 감았다.
팔이 부러져서라도 막으면 뭣하는가? 어차피 죽을 텐데.
그래도 생존본능에 따른 그의 행동은 멈추질 않았는데, 그는 눈을 감아서 자신을 살려주는 순간을 목격하지 못했다.
드드드드득-!
“푸컥!”
커다란 굉음과 함께 몬스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음성이 들리자 레논은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헉, 이, 이게 뭐지?”
그의 눈앞에는 오크는 온데간데없고 회색빛 돌벽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어찌나 큰지 고개를 뒤로 확 꺾어야 그 끝을 볼 수 있었다.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주변을 둘러보니 몬스터에게 쫓기는 이들의 뒤로 돌벽이 솟아나는 장면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드드드득-
드드득!
드드드드득-!
“콰우!”
“끼익, 끽!”
철퍽, 퍽!
투퍽!
돌벽은 바리케이드의 역할도 해주었지만 일부 몬스터는 갑자기 치솟는 돌벽에 처맞고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어찌된 영문인진 몰랐으나 레논은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내성을 향해 재차 달려갔다.
“좌측에 돌벽, 우측 둘, 성벽에 지옥송곳-.”
“돌벽! 두 개! 지옥송곳!”
“저기 병사들 뒤로 돌벽길 만들어. 통로에는 지옥구덩이 설치.”
“응응!”
불릿과 흙덩이는 당초에 한 약속대로 인간은 물론이고 몬스터까지 그들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먼 거리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불릿이 지시하면 흙덩이는 거기에 맞춘 정령술을 발휘하고, 계속된 지원에 정령력이 떨어지면 간간히 입맞춤을 통해 힘을 보충하고(?), 맞잡은 손도 떼지 않았다.
“불릿,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해?”
“흠.”
흙덩이가 힘들어하자 불릿은 날카로운 눈으로 전황을 살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내성으로 가자.”
“꼭 가야해?”
그녀의 물기어린 눈망울을 보았으나 그도 이번엔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여기가 밀리면 마수의 숲에서 중앙영지로 밀고 들어올 길이 생긴다. 그러면 올리비아와 유실리아도 위험해질 거야.”
둘의 활약으로 파죽지세로 밀리던 것은 막았지만 아직도 몬스터는 많았다.
적어도 3천 마리는 되어 보였고, 무엇보다 놈들의 구심점인 하급 마물 다섯 마리는 고스란히 남겨진 상태.
저놈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이곳뿐만이 아니라 왕국 전역에서 몬스터를 끌어들일지 몰랐다.
흙덩이는 이러한 불릿의 설명에 실망했는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힝, 알았어. 집까지 온다니까 흙덩이가 양보할게.”
“착하다, 츄.”
“으응, 쪽!”
상일지 자신의 욕망일지 모를 키스를 끝낸 불릿은 흙덩이와 함께 내성이 위치한 곳으로 걸음을 옮겨갔다.
* * *
내성으로 대피한 브룩 남작의 얼굴은 어두웠다. 2000에 달했던 병력 중 내성에 도착한 병력은 단 1500여명, 그나마도 부상자가 대다수였고 몸 성한 이들도 심신이 쇠약해져 있었다.
처음엔 조금씩 죽더라도 그럭저럭 막았지만 후퇴가 시작되니 걷잡을 수 없는 몬스터의 물량공세에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지금도 곳곳에선 곡소리와 함께 아직도 도착하지 못한 동료를 기다리는 병사와 기사들이 있었고, 경계를 서면서도 뛰쳐나가고 싶어 안달 난 모습이 성벽에 올라선 그의 시선에 사로잡혔다.
“참담하군.”
어찌나 나쁜 상황이었는지 그의 곁엔 아무도 없었고, 모두가 바삐 뛰어다니며 부상자와 난민, 그리고 물자를 옮기고 있었다.
그가 시선을 돌려 외성을 훑어보니 곳곳엔 파괴된 성벽의 틈으로 몬스터가 스멀스멀 기어들어왔고, 그 와중에 아군의 시체를 먹어치우는 놈들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크으으, 이런 개 같은 경우를 봤나.”
브룩 남작은 자신이 이런 처지에 놓였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다.
살면서 마물을 처음 본 것은 아니나, 다섯이나 뭉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급 마물 다섯이 모이니 이건 진짜 재앙이 따로 없었다.
“으으으….”
“흐아아아…….”
“다리, 내 다리….”
“엄마, 살려줘, 엄마!”
그리고 이러한 와중에 가장 무서운 것은 몬스터도, 마물도 아닌 바로 상처 입은 아군이었다.
그나마 신음만 내는 이들은 양반이었는데, 사지 중 일부가 없거나 죽어가는 이들이 내는 소리가 아군의 사기를 바닥까지 떨구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도 없는 것이 한두 명이 아니라 물경 수백에 이르렀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참패, 브룩 남작 인생을 통틀어 이런 끔찍하고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패배가 다시 찾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미치겠군…, 몬스터인가?”
그때, 소드익스퍼트 하급인 브룩 남작의 눈에 저 멀리서부터 접근해오는 자들이 보이고 있었다.
더 이상 서있는 자들이 없을 텐데 저 폐허에서 사람이라 추정되는 이들이 다가오고 있었고, 무엇보다 내성으로 달려들려는 몬스터들의 앞에 돌벽을 빼곡히 소환해 하급 마물이라 할지라도 쉬이 넘지 못할 경계선을 만들며 접근해오는 중이었다.
걸으면서 저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자들은 바포 변경백 내에선 오직 단 한 명밖에 없었기에 브룩 남작은 성문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문을 열어라! 각하께서 들어오신다! 당장 호위병력을 출진시키도록!”
* * *
무사히 성으로 입성한 불릿은 피곤했는지 꾸벅꾸벅 조는 흙덩이를 재워두고서 브룩 남작과 대면하고 있었다.
달칵.
“변변찮지만 이거라도 드시지요.”
그가 내미는 찻잔을 집어든 불릿은 맛을 보고서 입을 열었다.
“맛이 탁하군.”
“죄송합니다. 당장 하녀를 다그치겠….”
“내성에서 일하는 하녀가 당황할 정도면 많이 안 좋은 상황이겠지?”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단순히 하녀가 찻잎을 우려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으나 불릿은 그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왔다.
외부의 상황에 무지해야할 하녀가 동요할 정도로 전황은 그리 좋지 않았으니 브룩 남작은 자신에게 병력을 맡긴 불릿에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태.
그러니 그의 입에선 그저 사죄의 말밖에 나오질 않았다.
푹 숙인 브룩 남작의 고개에 불릿은 차가워진 몸을 데우고자 조용히 차를 음미했다.
쿵…, 쿵…
바깥에선 여전히 하급 마물이 돌아다니고 있는지 예의 굉음이 울려 퍼졌고, 급박한 뜀박질과 함성이 둘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각하, 병력의 충원이 시급합니다.”
내성은 외성보다 둘레가 짧기에 수비에 용이한 면이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몬스터에 비해 사람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으니 단순 수비만으론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 없었다.
평범한 성인남성이 오크 1마리를 상대하려면 혼자선 턱도 없었다.
오크의 강인한 체력, 굵직한 팔뚝, 그리고 저돌적인 자세.
지금처럼 광폭화까지 걸린 마당에 수적 열세까지 있으니 병사들이 1:1로 맞상대를 하더라도 밀리기만 했다.
“불가하다.”
“각하, 바스톤이 밀리면 변경백 전역으로 몬스터가 난입할 것입니다.”
“다른 곳이라고 해서 지원병력이 올 정도는 아니다.”
이미 각 지역에 모든 병력을 분산시킨 뒤다. 바포 변경백에서 가장 중하다 여겨지는 중앙영지조차도 일천의 대대만으로 수비하는 중이었는데 그 어디서 지원을 받겠는가?
하지만 지금 바스톤의 상황은 정말 시급했기에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시간도 없었다.
브룩 남작은 자신이 답을 찾지 못하자 불릿을 애타게 바라보았고, 그는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본인이 상대하겠다.”
“아무리 급해도 각하께서 나서시는 일은 절대 안 될 일입니다.”
애타게 불릿을 바라보던 브룩 남작이었으나 그는 정색하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무어라? 지금 본인의 말을 부정했는가?”
“각하께오선 최근 성급한 판단을 내리신 예가 너무도 많습니다. 옥체를 보전하시지요.”
‘역시 이번에도 덜미를 잡히는군.’
젊어진 육체는 그에게 활력을 선사했으나 냉철했던 판단을 앗아간 결과도 낳았다.
그 덕분인지 가신들에게 인기와 더불어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효과도 있었지만 반대로 무슨 일이 있으면 이전엔 나오지 않았던 사족을 다는 이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게 다 목숨을 등한시하며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다 그들의 가슴을 졸이게 만들었었기 때문.
그렇기에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브룩 남작은 그를 전열에 세우기 싫었다.
“걱정 말라. 이전의 내가 아닐지니.”
“…무언가 방법이 있습니까?”
불릿이 상급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발표는 했으나 아직 그 모습을 확인한 자들은 몇 없었다.
당사자인 불릿만 하더라도 이번 여정에서 몇 번이나 깜짝 놀랐던가?
지금까지 사용한 정령력만 하더라도 흙덩이를 사흘밤낮으로 놓지 않고 응응(….)을 해야만 할 정도로 방대한 양을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양을 소모하고도 단순히 키스나 손을 잡는 등의 접촉만으로 해결이 됐으니 그의 경지가 얼마큼 진일보했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불릿은 살짝 자신감이 차있는 상태였다.
“내일이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설명은 없으신 겁니까?”
믿으라는 말만으로는 브룩 남작을 물리기 어려웠기에 불릿은 좀 더 그와 내일 있을 반격에서 사용할 병력운용과 전술에 대해 토의하기 시작했다.
“본인과 흙덩이가 일반 몬스터를 없애면 그 자리에 공백이 생길 것이다. 자네는 그때 천인장을 이끌고 그 빈자리를 차지해 놈들이 성을 둘러싸지 못하도록 막아서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어느 정도의 규모로 공격하시는지 알려주시지 않으시면 섣불리 나설 수 없습니다.”
불릿이 군단의 최고사령관이라 하지만 브룩 남작은 현장에서 직접 뛰던 검사였다.
그러니 현장을 보는 눈도, 몬스터를 보는 시각도 달랐기에 철저한 자료가 필요했다.
정보 없이 나서는 길엔 언제나 죽음이 따랐으니까.
이쯤 되자 불릿도 마냥 믿으라는 소리만 내뱉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