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7 몬스터 웨이브 =========================================================================
몬스터는 빠르게 정리되어 갔다. 몬스터 웨이브가 위협적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마물이 아닌 이상은 경지가 상승한 불릿과 흙덩이에겐 별다른 위협이 되지 못했고, 흙덩이도 계속되는 전투로 인해 무언가를 죽인다는 것에 적응되어 겁을 먹지 않았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다보니 장맛비도 조금씩 그쳐갔고, 불릿과 흙덩이의 여정도 2주차에 들어섰다.
와아아!
…쿵, …쿠궁
마수의 숲과 인접한 바스톤의 영지에 들어서던 불릿은 저 멀리서부터 함성과 함께 큰 굉음이 이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흙덩아, 방금 들었니?”
“잠깐만 기다려봐.”
흙덩이는 정령술을 발휘해 멀리서부터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를 파악에 나섰다.
우우웅-
강렬한 공명음이 일며 정령술이 시전되자 흙덩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감았던 눈을 떴다.
“사람이랑 괴물이랑 싸워.”
“어디서? 규모는 얼마나 되는데?”
“저어기, 브룩 아저씨네 집에서 사람 1809명이랑 몬스터 3500? 거기에 하급 마물 다섯 마리 있어.”
“…허, 너무 많은데?”
흙덩이가 귀엽게 손가락 다섯 개를 꼽아줬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상황은 매우 나빠 보였다.
하급 마물이 무려 다섯 마리란 소리는 마수의 숲에서 튀어나왔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아무리 몬스터 웨이브라지만 이렇게 공성규모로 쳐들어오다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황은 어떤데?”
“그냥 잘 싸워. 빨리 가던 길 가자, 이거 너무 지루해.”
흙덩이의 말만 들으면 그들만으로도 잘 막아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바스톤의 병력만이 아니라 중앙영지에서 파견된 겔럭서스 대대가 있기에 규모만 2000여명에 도달했다.
단순 병사만 있는 게 아니라 간부급인 십인장 이상부턴 전원이 기사였기에 중급을 넘어서는 몬스터라 할지라도 쉬이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마물이 너무 많다. 이상할 정도로 많아. 아무래도 확인해봐야겠어.”
몬스터 웨이브가 웨이브라 불리는 이유는 쉴 새 없이 들이닥치는 몬스터로 인해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래서 몬스터가 많을 수는 있지만 하급이라지만 마물끼리 충돌 없이 다섯 마리나 있다는 것은 이런 상황에선 백퍼센트 흑마법사의 개입을 뜻했다.
그런 변수가 있는 이상 원래라면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 할지라도 예상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불릿의 이러한 판단에 흙덩이의 눈망울에 물기가 서렸다.
“또 그러는 거야? 불릿은 우리의 말은 안 들어주는 거야?”
“윽….”
“나는 자기야가 위험에 빠지는 건 싫어…, 제발 흙덩이의 말도 들어줘.”
“흙덩아…….”
“자꾸 그러면, 사람들 앞에서 불릿이랑 섹스할거야.”
“푸우웁!”
역시나 영특한 흙덩이, 불릿이 난감해할 요소를 잊지 않고 기억하다가 써먹었다.
불릿은 그녀를 조용히 안아주려다 발을 삐끗하며 입에서 침이 뿜어져버렸다.
그리고 그 침은 흙덩이의 얼굴에 정통으로 묻었는데, 체면을 중시하는 그에게 있어 이만큼 당혹스런 일도 없었다.
“미, 미안하다, 뭔가 닦을 것이….”
“힛, 불릿냄새. 킁킁.”
“맡지 마!”
흙덩이가 침 냄새를 맡자 불릿은 아예 그녀의 얼굴을 핥아갔다.
“쭈르륵, 쫘압-.”
낼름낼름 혀로 핥으니 냄새가 날 법도 하건만, 흙덩이는 그저 좋다고 자신의 복숭앗빛 혀를 내밀며 그의 혀를 느꼈다.
“하악, 하악, 마, 마시쪄, 오래마니라 더 조아하!”
“큭, 이, 이쯤하자.”
“하악, 하악!”
그동안 금욕생활을 했기에 불릿도, 흙덩이도 폭발직전이었으나 올리비아와 유실리아의 화를 풀어주기 전까지는 안 하기로 한 게 불릿의 약속이었기에 결국 끝까지 가진 않았다.
그래도 이상한 스킨십으로 인해 흙덩이의 마음은 조금 풀렸는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그, 그래도 안 돼!”
“조금만, 응? 조금만-.”
“히잉, 안 되는데…올리비아가 말리라고 했는데….”
여기서 또 다시 등장하는 올리비아. 그녀만 생각하면 왜 흙덩이에게 희생 운운한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불릿에게 있어선 올리비아나 흙덩이나, 또 유실리아나 세 명 다 소중한 여자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유실리아가 또 혼낼 텐데, 오빠가 대신 혼나줄 거야?”
“물론이지, 절대 흙덩이가 혼나지 않도록 해줄게.”
흙덩이가 아무리 영특하다 한들 실제나이는 겨우 10살, 정신연령은 그보다 더 어릴지도 몰랐다.
그러니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불릿의 부탁에 서서히 마음의 저울이 기울고 있었다.
“헤헤, 그러면 멀리서 도와주자.”
“멀리서…?”
“응. 이제 멀리서도 괜찮잖아?”
“그렇긴 한데….”
“싫어?”
‘이게 아닌데….’
불릿이 원했던 것은 직접 현장으로 달려가 지휘를 하는 것이었다.
흙덩이가 이토록 강해졌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게 됐으니 젊은 피가 끓어 활약하고픈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서 그렇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굳이 위험을 자처할 필요도 없었기에 멀리서 도와주고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의 도움을 주고 있는지 알려주면 될 터였다.
그가 직접적으로 나선 이유는 각 지역의 영주들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하는 소규모 마을들의 구원을 위해서였으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불릿은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쏴라!”
목에 긴 자상이 인상적인 사내가 검을 내리며 외치자 성벽에서 대기 중이던 궁수들은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발사!”
슈슈슈슈슉!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을 정도의 화살이 몬스터 군단을 향해 떨어지자 미칠 듯이 달려오던 몬스터가 대거 바닥에 엎어졌다.
“크르륵.”
“끼엑!”
“쿠취, 쿠취-.”
하지만 이러한 마구잡이식 공격에 쓰러지는 것은 대부분 놀이나 고블린처럼 방어력이 낮은 놈들로, 가죽이 질기고 근육으로 똘똘 뭉친 오크와 트롤, 오우거 같은 경우는 화살을 부러뜨리며 성벽을 기어올랐다.
- 크워어!
몬스터들이 화살받이가 되는 사이, 뒤에서는 거대한 동체의 괴물이 덩치만큼 커다란 손으로 주변의 몬스터를 휩쓸었다.
콰과과과-
“구롸롹….”
“끼, 께엑!”
거의 짖이겨지듯 손아귀에 뭉쳐든 몬스터들은 거대한 괴물이 공을 던지듯 던지자 파공성을 내며 성벽에 부딪혔다.
쾅!!
“으아악!”
“무, 무너진다!”
살덩어리와 돌이 부딪혔는데 그토록 단단한 성벽이 무너질 정도로 거대 동체의 괴물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 크와! 크와와!
쿵, 쿵, 쿵!
한쪽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놈은 만족스러웠는지 가슴을 두드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몬스터들도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니 한층 위축된 인간들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겔럭서스 천인장, 대체 저 마물들을 어찌하면 좋은가?”
내성에 숨어있어도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을 텐데도 브룩 남작은 그 스스로가 호전적인 인물이었기에 온몸에 상처를 달고서도 외성으로 나와 직접 진두지휘를 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활약에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지금처럼 괴력을 이용해 캐터펄트처럼 성벽을 파괴하는 하급 마물들의 무시무시한 공격엔 당해내기 버거웠다.
“일단 주변의 몬스터들을 치워야….”
“누가 그걸 몰라서 묻는가? 다가갈 수가 없으니 이러고 있는 게 아닌가.”
“……죄송합니다.”
“답답하군, 답답해! 이렇게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가!”
겔럭서스는 영주인 브룩 남작의 휘하로 지원을 온 것이기에 그의 명령에 따라야 했다.
허나 겔럭서스는 이전까진 라체나의 일반 단원이었기에 스스로 판단하는 일에 약한 면모가 있었기에 무언가 조언을 주기엔 모자람이 있었다.
주변 모든 영지가 이곳과 비슷한 상황이었기에 도움요청을 하기도 난감한 상황, 브룩 남작은 가슴만 두드리고 있었다.
“안 되겠다, 내가 직접 나서야겠어.”
“브룩 남작님, 죄송하지만 남작님께서 나서신다 하더라도 놈들을 모두 일망타진하긴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이대로 당하다 끝나잔 말인가? 우리의 뒤에 영지민이 있는데?”
브룩 남작은 비록 소드익스퍼트 하급에 불과했지만 검술을 비롯한 무예가 뛰어났고, 무엇보다 임기응변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 그가 지휘하는 영지군은 자신과 같이 마수의 숲과 인접한 곳에 영지를 가진 셰실리코프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감당할 수 없게 물량공세와 강한 공격력을 지닌 마물을 상대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대응방법 자체가 없으니 이건 비단 그의 탓만은 아니리라.
“제 모자람은 저 스스로가 가장 잘 압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휘관이신 남작님이 없다면 대체 누가 버틸 수 있단 말입니까?”
기사들은 병사들과는 수준이 다른 고등군사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을 실전에서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이는 적었고, 지금처럼 전력과 무력에서 밀리고 지형지물이 무의미해지면 물러설 수도 없는 몬스터 웨이브의 특성상 어쩔 수가 없다.
“대체 어찌하면 좋을지….”
으아아악!
콰르르륵-.
그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또 다른 곳의 성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성벽에서 추락하는 병사들의 최후는 낙사 또는 몬스터에게 먹히는 경우밖에 없었다.
이 끔찍한 광경이 눈에 익은 브룩 남작이었으나 인상이 찌푸려짐은 인간 본연의 감정일 것이다.
“외성을 포기하고 내성으로 집결시킨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많은 인원을 포기해야 합니다.”
“모두를 포기하는 것보단 낫다.”
“남작님.”
“전군 내성으로 후퇴하라!”
“…큭, 전군 내성으로 후퇴! 반복한다, 내성으로 후퇴!!”
단호한 브룩 남작의 결단에 겔럭서스가 복창하자 주변의 백인장이, 그리고 그 밑의 십인장과 다시 그 밑의 병장들이 미친 듯이 외쳤다.
“후퇴! 후퇴하라!”
“씨발, 빨리 뒤로 가라고! 내가 막…끄르러어억!”
“나 좀 살려줘! 같이 가란 말이야 개새끼들아!”
후퇴명령이 떨어지자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어 인간측은 수세에서 여우에 쫓기는 토끼 꼴이 되었고, 한솥밥을 먹던 동료가 눈앞에서 사지가 분시되는 꼴에 기겁하며 서로를 밀치는 형국까지 등장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고, 이것이 정녕 루드밀라 왕국의 병사들 중에서 정예로 손꼽히는 자들이 맞는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던 불릿의 얼굴은 딱딱함을 넘어 분노로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파르르르-.
“이, 이, 이이익…!”
“오빠, 참아! 참아! 나서면 안 돼, 흙덩이가 못 지켜줘!”
아무리 흙덩이라도 물경 3천을 넘어가는 몬스터 대군 앞에서 불릿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만약 그녀의 방어를 뚫고 몬스터가 다가온다면 그때부턴 순식간에 뒷걸음질 치다 그대로 먹힐 것이다.
그것도 산채로 말이다.
흙덩이의 음성이 뇌리에 꽂히자 분노로 얼룩져가던 불릿의 머리는 조금 맑아지는 듯했다.
“후욱, 후욱…. 그래, 참아야지.”
그는 애써 침착함을 되찾고선 그녀에게 부탁을 했다.
“군대가 후퇴할 수 있도록 곳곳에 돌벽을 설치해주고 지옥구덩이와 지옥송곳도 사용해줘.”
“주먹 쾅은?”
“느려, 게다가 정령력 소모도 심하고. 일단 시킨 것부터, 어서.”
“응, 알았어!”
불릿은 그녀가 정령력을 끌어 모으기 쉽게 흙덩이의 등 뒤로 다가가서 양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움찔.
그의 손길이 닿자 흙덩이는 몸을 달싹였으나 이내 집중하여 하나라도 더 많은 인간을 살리기 위해 힘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