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정령사-196화 (196/241)

00196  몬스터 웨이브  =========================================================================

한껏 거들먹거릴 줄 알았는데 불릿이 내일이라도 움직이겠다하자 촌장의 안색이 약간이나마 펴졌다.

“고맙수. 큰 기대는 안 하지만, 그래도 목숨 걸고 싸우겠다는데 아깐 우리가 너무한 것 같구려.”

“이런 시기에 소수로 돌아다니는 이를 경계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오. 비바람에 장시간 노출되어 체력이 떨어졌으니 식사와 보급품을 준비해줄 수 있겠소?”

“당연한 말을 하우. 의뢰비도 안 받는데 그 정도면 싸지. 여편네, 뭐해? 빨랑 준비하라고!”

“아유, 이 인간도 참…잠시만 기다려요, 식사준비 할 테니까.”

그렇게 부엌으로 사라진 촌장의 아내는 뭔가를 덜그럭거리더니 잠시 후 보글보글 스튜 끓는 소리와 냄새가 집안에 퍼져 나왔다.

“저는 잠시 마을사람들과 말 좀 하고 오겠수. 뭐라도 말을 해놔야 안심하는 놈들이거든.”

“그렇게 하시오.”

“잠자리는 마을회관으로 사용하는 곳이 있으니 거기로 괜찮겠소? 하룻밤만 묵는다면 크게 불편하진 않을 것인데.”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아무리 잘 손질해도 모자란 곳이 있기에 흙덩이를 생각하면 그러고 싶지 않았으나 남의 집에서 눈치를 보는 것도 불편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시오. 내일 중으로 떠날 것이니 보급품 준비도….”

“알겠다니까 그러오.”

촌장이 대뜸 말을 끊고서 나가려하자 불릿은 힐긋 자신의 커다란 로브를 뒤집어쓴 우스꽝스런 모습의 흙덩이를 바라보았다.

“여성용 로브도 한 벌 준비해주시오.”

“…? 알겠수, 구해는 보리다.”

이런 시골에 그런 게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구해보겠다고 말하며 집에서 나간 촌장.

흙덩이도 뜨뜻한 물을 다 마셨는지 다리를 휘저으며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나 이거 벗어도 돼?”

“음….”

확실히 불릿의 로브는 그녀가 입기엔 지나치게 컸고, 무엇보다 실내에서까지 젖은 로브를 입기엔 여러모로 불편하고 불쾌했다.

흙덩이의 외모가 워낙 눈에 띄어 가려놓았던 것이지만 지금 실내엔 촌장의 아내밖에 없으니 괜찮겠다 싶은 불릿은 벗는 것을 허락했다.

“의자에 잘 걸어둬라. 이따 챙겨가야 하니까.”

“헤헤, 알았어! 잇차.”

펄럭.

흙덩이가 로브를 벗어재끼자 음식을 나르던 촌장 부인이 화들짝 놀랐다.

“어머나 세상에! 어, 엄청 예쁜 아가씨였네?”

“응? 아줌마, 밥 줘. 배고파.”

“네네, 여기 있어요, 호호호. 아유, 귀여워라.”

달칵.

흙덩이가 마음에 들었는지 촌장 부인은 간단히 만든 스튜와 빵을 불릿이 아니라 그녀의 앞에 먼저 내려놓았다.

스윽스윽.

“쓰다듬지 마, 이건 친한 사람이랑만 하는 거랬어.”

탁.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머리를 쓰다듬는 촌장 부인의 손길에 흙덩이가 손을 쳐내자 민망해진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부엌으로 돌아갔다.

“호, 호호. 에그머니, 내 주책을 했네. 아가씨가 워낙 귀여워서…, 아, 잠시만 기다리세요, 당신 몫도 가져올 테니.”

“…천천히 하시오.”

“네네, 호호.”

다시 둘만 남자 불릿은 멀거니 음식을 바라보는 흙덩이에게 말을 걸었다.

“식기 전에 먹어라.”

“같이 먹을래.”

마치 ‘기다려!’라는 명령을 받든 강아지처럼 살랑살랑 머리카락을 흔드는 흙덩이에게 그는 촌장 부인의 손길을 거부했던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몸은 많이 아파하고 있다. 먼저 먹어둬.”

“그럼…헤헤. 얌.”

그리고 이런 둘의 모습을 음식을 가지러 부엌에 간다던 촌장 부인이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연인인가보네. 바깥양반이 따로 이부자리를 마련해줘서 다행이다, 호호.”

그녀는 이따 밤에 불릿과 흙덩이의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것이 약간 아쉬웠는지 홀로 망상을 시작하고 있었다.

* * *

“흙덩아! 주먹 쾅!”

“주먹 쾅!”

투확!

쾅!

“끼에엑!”

고블린은 단말마를 남긴 후 그대로 고꾸라졌는데, 예전처럼 몸에서 쏘아내는 것이 아닌 주변의 사물을 이용해 만들어내니 공격의 제한이 없어진 셈이었다.

어디서부터 공격이 들어올지 모르고, 그 공격이 가벼운 것도 아니니 눈 뜨고 암습당하는 격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공격을 끝내고 나니 주변은 또 다시 피로 물들어 있었다.

“…수고했다.”

“헤헤.”

스윽스윽.

일을 끝마치자 흙덩이에게 칭찬과 상(?)을 주는 불릿.

웬만해선 자신의 손만 더럽히고 싶었으나 이렇게 부락단위로 움직이는 경우엔 자신의 창술만으론 한계가 뚜렷했다.

게다가 간간히 섞여있는 중형급 이상의 몬스터는 그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후우, 그래도 꽤 많이 없앤 건가.”

2번째 마을에 들어서서는 잠시 비가 그쳐 로브를 벗고 있었다.

비록 햇살은 비추지 않았지만 몬스터가 어디서 습격해오는지 알 수 있었기에 한결 나았다.

질척질척.

“엑, 디러, 에비비.”

진흙이 되어버린 바닥에 흙덩이는 연신 발을 털었으나 그게 쉬이 떨어질 리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들은 아직 마수의 숲 인근에 위치한 바스톤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지난 1주일간 불릿과 흙덩이가 처리한 몬스터의 수만 물경 일천여 마리, 대부분이 고블린이나 오크, 놀 같은 하급 몬스터였으나 인간의 삶에 가장 위협적인 몬스터도 놈들이었기에 놈들이 모이기 전에 없앤 것은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몬스터는 인간보다 강한 육체를 지녔기에 모이면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스톤 인근에 도착하면 전서를 보내야겠군.’

레너드 자작의 영지는 구울 백작을 경계하느라 항상 삼엄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 마을들도 항시 전쟁에 대비해서인지 무장과 훈련 수준도 높았고, 이 때문에 불릿이 활약할 일은 생각보다 적었다.

그렇다곤 해도 마을 하나를 들를 때마다 적게는 50에서 많게는 수백 마리씩 처리하고 있으니 힘들지 않으면 사람도 아니었다.

“후우.”

“오빠, 힘들어?”

“…괜찮다.”

“정령력 많이 썼으면 그거 하자, 그거.(?)”

주인을 보채는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는 흙덩이에게 불릿은 핏물이 살짝 묻은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며 입을 열었다.

“우웅.”

“힘이야 넘쳐나니까 네 건강이나 신경 써라. …그리고 아무리 나라도 야외에서 하는 것은 꺼려진다.”

“그럼 마차에서 했던 건 뭐야?”

“…그건 야외가 아니다.”

“?”

“…….”

“응?”

“……….”

그녀가 뚫어져라 쳐다보자 결국 불릿은 헛기침을 하고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크흠, 올리비아와 유실리아의 마음도 풀어주지 못했는데 우리끼리만 즐기는 건 안 될 일이다.”

“아니야, 올리비아도 유실리아도 오빠 생각 엄청 많이 하는걸?”

터벅, 터벅.

“그게 무슨 말이니?”

둘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흙덩이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며 후드를 뒤집어썼다.

“오빠가 위험하면 나보고 지켜주라고 했어. 내가 죽더라도 오빠는 살려낼 거니까 걱정하지 마!”

우뚝.

말을 듣는 순간 불릿은 다음 여정에 대한 고민도 싹 날아가 버리며 딱딱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흙덩이를 바라보며 억지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게, 무슨, 말?”

“응? 올리비아가 말이야, 둘 중 한 사람이 죽을 위기에 빠지면 흙덩이가 지켜줘야 한데. 흙덩이는 오빠가 좋으니까 상관없어.”

“뭐가 상관없어!”

“히익, 왜, 왜 그래?”

푸드드득!

- 까악, 까악!

불릿의 고함에 흙덩이는 후드를 쓰던 그대로 움츠러들었고, 주변의 숲에도 목소리가 울린 것인지 까마귀 몇 마리가 푸드득 하늘로 날아올랐다.

우중충한 하늘 너머로 사라져가는 까마귀는 불길해 보였는데, 불릿은 몬스터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못한 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올리비아가 진정 너에게 그런 말을 했단 말이더냐?”

“오빠 무섭게 왜 그래, 그냥 올리비아는 불릿이 걱정돼서….”

“빠드드득! 유실리아는?”

이를 악물며 씹어뱉듯 묻는 불릿의 물음에 흙덩이는 눈에 습기가 어리고 있었다.

“부, 불릿을 잘 챙겨주라고만 했어…왜 그래, 흐에엥-.”

결국 흙덩이의 울음보가 터졌고, 그녀는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연신 눈물을 훔쳐내었다.

“으아앙-, 나, 난 그저, 으앙! 불릿이 걱정됐을 뿐인데 왜 자꾸 화만 내! 엉엉엉!”

“큭….”

그녀의 울음소리에 불릿은 머리가 아픈지 손으로 이마를 짚고서 비틀거렸다.

간신히 나무를 짚고서 몸의 흔들림을 멈출 수 있었는데, 그는 맹렬히 뇌를 돌리고 있었다.

‘내가 대체 왜 이러지?’

몬스터 퇴치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불릿과 흙덩이, 누구하나 다치지 않았고 아프지도 않았다.

이 상태로라면 수확제까지 무사히 일을 끝내고 몬스터 웨이브는 9년 전보다 더욱 얕은 정도로 종료될 것이다.

헌데 불릿은 이 여정을 이루어내고 진행하는 동안 연신 짜증과 불안, 그리고 화를 내었다.

싫다는 흙덩이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도 자신이고, 올리비아와 유실리아를 뿌리치고 온 것도 자신이었다.

무엇보다 흙덩이의 공포를 알면서도 살육을 강요했으면서 대체 뭘 잘했다고 언성을 높였던 것일까?

“우와앙! 흐에엥-.”

그녀는 몸만 컸지 정신연령은 어리다. 실제의 나이가 그러하니 세상을 배운지 2년도 안 돼서 아는 것도 적다.

흙덩이는 그저 올리비아에게 전해들은 말을 알려줬을 뿐인데, 자신은 왜…

“미안하다, 흙덩아. 내가 잘못했어.”

“우아앙, 불리잇! 미워, 미워!”

불릿의 품에 안긴 흙덩이가 그의 가슴에 연신 얼굴을 비비며 하는 말에 그의 마음은 미어지는 듯했다.

“…내가 이상해. 왜 너한테 이러는지,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지 모르겠어.”

“바보바보!”

그래도 흙덩이는 불릿의 가슴을 두드리는 행위조차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있어 인생의 전부는 불릿으로 시작하고 끝나니까.

자신의 서운한 감정을 토로할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불릿의 가슴은 하늘에서 비가 내려도 가뭄의 논처럼 쩍쩍 갈라졌다.

후두둑.

솨아아……

철벅-, 철벅-.

챱, 챱, 챱.

“…….”

“…….”

대화는 없었다. 혹시나 몰라서 사용하지 않은 정령력도 이젠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흙덩이에게 불릿은 그 어떤 제지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그렇게 걸어가던 두 사람은 다시 등장한 몬스터로 인해 대화가 트였다.

“흙덩아, 주먹 콰….”

“죽음의 대지!”

푸슈슈슈슈슉!

“쿠어엌, 컥!”

항문을 관통한 거대한 송곳에 오우거는 비틀거리다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쿠웅!

“끼, 끼익!”

“취이익! 취악!”

화들짝 놀란 소형 몬스터들은 왕 역할을 하던 오우거가 단방에 죽어버리자 펄쩍 뛰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흙덩이는 놓치지 않았고, 2미터가 넘는 지옥송곳을 한번에 100여개 이상 솟구치게 만드는 죽음의 대지를 연거푸 3번 펼치며 주변을 초토화시켰다.

질처억-.

비가 내리는데도 곤죽이 된 몬스터의 시체가 씻겨지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있는 무리였는데도 흙덩이의 정령술에 놈들은 마땅한 활약도 벌이지 못하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불릿이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어, 그게, 흙덩아?”

“씨익, 씨익…불렀어?”

“아니, 그게 말이야, 혹시 화가 났나 싶어서….”

흙덩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기에 불릿이 조심스레 묻자 그녀는 빗물을 맞으면서도 머리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전혀, 화 안 났어. 내가 왜? 흙덩이가 어째서?”

“그, 그러냐….”

“오빠도 참, 흙덩이가 화.가.날.리.가.없.잖.아?”

“아하하하….”

불릿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는 가운데 흙덩이도 따라 웃었다.

“헤헷!”

끼이이…

쿠웅-!

“…….”

웃는 흙덩이의 뒤로 나무가 쓰러지자 불릿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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