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5 몬스터 웨이브 =========================================================================
100여 마리의 다이어 울프로부터 습격 받은 뒤 불릿은 잠을 청할 땐 항상 땅속에 공간을 만들어 자자고 흙덩이에게 부탁했다.
아직 하룻밤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흙덩이도 이번 습격을 통해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불릿의 영토도 위험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처럼 비를 피해 잠을 청하면서도 불릿을 손에서 놓지 않는 중이었다.
“새액-, 새액-.”
“손 좀 놓….”
“새액-.”
“…….”
흙덩이나 불릿 두 사람 모두 하급이던 시절엔 좁은 구덩이를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지금은 세 사람이 들어가도 넉넉할 정도로 넓은 굴을 땅속에 만들 수 있었다.
거기에 폭신한 흙으로 마무리까지 해놓으니 훌륭한 잠자리가 됐는데, 흙덩이는 그 넓은 장소에서 굳이 불릿의 팔을 베고 잠에 빠져들었다.
‘불안한 것인가.’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강해졌고, 불릿의 정령력이 우물에서 강처럼 많아졌다는 점을 인식하고서도 안심하지 못했다.
불릿이라고 마냥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녀를 품에 안고 있으면 그래도 한결 나았다.
사락, 사라락.
흙덩이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그는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올리비아와 유실리아는 날 피한 거겠지.’
중앙영지의 성이 아무리 넓다 해도 불릿과 부인들이 생활하는 장소는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은 불릿을 피해 다녔다는 의미밖에 없었다.
‘찾으려면 찾을 수도 있지만….’
그녀들이 자신을 피하는 이유가 모두 억지로 강행한 이번 여정 때문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러지 않았다.
강제적인 부부생활은 파탄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재판을 통해 간접경험을 했기 때문.
“하앙….”
움찔.
뜬금없는 신음에 상념이 깨어지자 불릿은 숨구멍을 통해 비춰지는 은은한 달빛을 통해 흙덩이를 쳐다보았다.
“거기…좋….”
“뭐?”
“……새액-.”
뭔가 중얼거리던 흙덩이는 불릿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을 이어갔다.
그러자 불릿도 단순한 잠꼬대라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후우, 아프진 않은 건가.”
찌륵찌륵…
쏴아아…
그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한꺼번에 몰아치는 것인지 이번 장맛비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간간히 비를 피한 풀벌레의 소리가 아니라면 이 고요함 속에 그대로 묻혀버릴 것 같았다.
“나도 자둬야겠지.”
빗소리를 들으니 낮 시간 동안 쌓였던 피로가 몰려옴을 느낀 불릿은 흙덩이와 함께 덮은 로브를 이불삼아 눈을 감았다.
“…….”
쏴아아아……
비가 내리고 있었다.
* * *
“크읍.”
푸…부욱!
“카학!”
억지로 밀어 넣는 창날에 오크는 부들부들 떨다가 축 늘어졌다.
그럼에도 안심이 되질 않아 가슴에 박은 창을 앞뒤로 삐걱이니 놈이 눈을 번쩍 뜬다.
“크아! 취, 취아악!!”
“죽어.”
으직, 찌지직-.
“취이익….”
살짝 빼낸 창날을 다시 들이밀며 심장을 후벼 파니 놈은 그제야 진정으로 죽음에 빠져들었다.
“후우우.”
불릿이 굽혔던 허리를 펴며 일어서자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 사이로 흘러내리는 땀을 흙덩이가 닦아주었다.
톡톡.
“괜찮아? 많이 힘들지?”
걱정 한가득인 그녀의 말투에 불릿은 피가 묻은 손으로 차마 그녀를 쓰다듬을 수 없어 괜히 무뚝뚝하게 답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보일 거다. 거의 2시간 단위로 마을이 이어져 있으니 지금보단 한결 낫겠지.”
마을이라고 해도 불릿이 처음 낙오됐던 산골 오지가 아닌, 바포 변경백에 등록된 정식 마을인지라 제대로 된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마을끼리의 연동도 잘 되어 론 타로 왕국에서의 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선진문화권인 것이다.
“흙덩이가 하면 되는데 왜 불릿이 고생해? 날 시켜, 나는 불릿꺼잖아.”
“…됐다, 이제 가도록 하지.”
“힝.”
흙덩이의 안타까워하는 소리에도 불릿은 오크의 시체에서 뽑아낸 창날을 닦아내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일부러 직접 손을 쓴 이유는 되도록 그녀가 나설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정령술로 시체를 땅속에 파묻은 후에 종종걸음으로 불릿을 따라붙었는데, 그래도 엊그제보단 반응이 한결 나았다.
그렇게 얼마간을 걷자 나무방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나타났다.
“멈춰라! 어디서 오는 길이냐!”
경고와 물음을 동시에 건네는 누군가에게 불릿은 순순히 손을 들고서 외쳤다.
“나는 C급 용병 ‘볼레트’라 한다! 바포 변경백을 돌아다니며 몬스터를 퇴치하고 있다!”
“요, 용병? 아, 이게 아니지, 정말이냐?!”
“…뭐하자는 건지, 그래! 정말이다!”
“불릿, 왜 볼레트라고 한 거야?”
“내가 본명을 밝히면 흙덩이랑 이렇게 못 다니는걸?”
무장을 한 마을주민들이 저들끼리 의견을 주고받는 사이 불릿은 흙덩이와 잡담을 했다.
“나는 그 이름 싫어. 불릿이 좋아.”
“이런 경우에 써먹으려고 주민들에게 알리지 않은 거니까 참아주렴.”
“체, 오빠 부탁이니까 들어주는 거야?”
“그래그래.”
여전히 흙덩이는 로브를 뒤집어쓴 상태로 얼굴의 대부분이 가려져 있었기에 그는 후드에 손을 집어넣어 그녀의 볼을 문질러주었다.
차가워진 볼이 불릿의 손길로 인해 따듯해지자 그녀는 그 손을 양손으로 잡고서 체온을 느꼈다.
“정 싫으면 그냥 호칭으로만 불러라. 내가 알아서 말할 테니까.”
“헤헤, 오빠야.”
그들이 행동규정을 정하는 사이 목책으로 만들어진 문이 열렸다.
드득, 드득, 드득-.
“어서 들어오시게!”
“알겠소! 흙덩아, 잠시만, 웃차.”
“꺅.”
‘이젠 제법 여자 같은 소리도 내는군.’
불릿에게 번쩍 들린 흙덩이는 바지를 착용했지만 로브가 흩날리자 괜히 치마처럼 아래를 가리려고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가 있는 힘껏 대지를 박차 달리니 금세 목책에 닿을 수 있었고, 불릿이 냉큼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남자들이 문을 닫았다.
드득, 드득, 드득. 탁!
바닥을 끌며 닫히던 문이 외부와 내부를 단절시키자 무기를 들고 그들을 겨누었다.
스르렁-.
“너흰 누구냐, 어디서 온 것이지?”
“C급 용병 볼레트, 중앙영지에서 왔소.”
“어떻게 둘이서 그곳을 뚫고 올 수 있었느냐?”
‘말이 많군.’
도와주면 도와주는 데로 도움이나 받을 것이지, 몬스터 웨이브에서 사람을 따져서 뭐한단 말인가?
그래도 신중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었기에 불릿은 물음에 대꾸해줬다.
“용병이 소수로 다니면 실력이 자신이 있어서이지 뭐가 있소? 여긴 도움이 필요 없나보군. 문 여시오, 갈 터이니.”
“자, 잠깐!”
“이 멍청이가, 왜 사람을 쏘아붙여?!”
“저 자식 끌어내! 얼른!”
나름 대표라고 앞에 나서서 그럴 듯하게 말했으나 불릿이 도로 되돌아가려하자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태세전환 하는 마을주민들.
“아이구, 볼레트 씨. 마음 푸시고 일단 저희 사정 좀 들어보시지요.”
“거기 아가씨도 위험하지 않으니 내려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희 나쁜 사람 아니에요? 해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서야 불릿은 아직도 흙덩이를 공주님안기로 품에 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선 살포시 땅에 내려주었다.
이에 아기처럼 곤히 안겨있던 흙덩이는 땅에 내려서고서도 불안한지 불릿의 팔에 매달리며 버럭 소리쳤다.
“오빠한테 함부로 대하고, 너희 다 나빠! 오빠, 여기서 나가자! 이 사람들 도와줄 필요 없어!”
그녀의 고함에 마을사람들은 사태파악을 했는지 안절부절 못했고, 불릿은 마을주민들이 자신의 지시를 잘 따라줄 것 같자 안심했다.
“잘했어, 조수.”
“……?”
“앗, 이런 젠장.”
“???”
불릿은 미간이 찡그려지더니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조수라고 할 작정이었으면 품에 안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 오빠?”
그는 흙탕물에 질척이는 신발을 보다 한숨을 쉬었다.
“제기랄, 어떻게든 되겠지.”
차림새가 용병이니 생각하는 방식도 용병이 됐나보다.
그는 그렇게 첫 번째 순회지에 도착했다.
* * *
달칵.
“드시지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이 놓이자 불릿은 그것을 내려다보다 곁에 있는 흙덩이에게로 넘겼다.
스윽.
“추울 텐데 마셔라.”
“와! 후루룩-.”
실내임에도 여전히 후드를 벗지 않은 흙덩이에게 그것을 양보한 불릿은 그녀가 그것을 마시는 걸 지켜보다 자신에게도 한잔 더 달라도 부탁했다.
그러자 촌장의 아내로 보이는 이가 미안하다며 주전자에서 뜨끈한 물을 따라 불릿에게도 건네주었다.
“응? 오빠, 이거 그냥 물인데?”
“몸을 덮히라고 준 거니까 그냥 마셔라.”
“후루룩, 맛없어, 후루룩.”
얼핏 들으면 불평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그녀는 순수하게 아무 맛도 안 나는 맹물이라는 것을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듣는 입장에선 다르게 들리는 것이 말이란 것이었기에 콧수염 사내는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용병이라 하셨소만, 용병패를 볼 수 있겠수?”
“여깄소.”
미리 짜놨던 계획인지 불릿은 예전에 사용하던 패를 그에게 내밀었고, 촌장은 콧수염을 만지며 그와 패를 번갈아봤다.
“…맞는 것 같네. 여깄수.”
사실 일반인이 보기엔 뭐가 뭔지 잘 모르는 것이 용병패이므로 불릿이 가짜를 내줬어도 몰랐을 것이다.
그가 이런 행동을 한 이유엔 불릿이 얼마나 담력이 있는가, 없는가를 시험하려는 이유에서일 것이다.
확인절차가 끝나자 촌장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려 입을 열었다.
“금액에 대해선….”
“잠깐, 그 전에 할 말이 있소.”
“뭔데 그러우? 설마 돈에 관한….”
“중앙영지로부터 이미 선불로 받았으니 필요 없다는 내용이오.”
“…그렇수? 역시 대영주님은 뭐가 달라도 다르시구만!”
“잘됐네요, 여보.”
돈을 안 내도 된다는 말에 위험한 상황임에도 대번에 밝아지는 부부의 모습.
그들의 모습에서 불릿은 돈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보기 좋진 않군.’
만약 자신의 부인들이 돈에 허덕여 저런 추한 모습을 보인다면 불릿의 가슴은 미어질지 몰랐다.
높은 자리엔 책임도 따르지만 자신이 고위귀족이란 사실에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께 감사기도를 올린 불릿은 입을 열었다.
“피해상황은 어떻게 되오?”
몬스터 웨이브에서 아무런 피해도 없이 넘어갈 수는 없다.
그것은 철혈통치를 하는 란푸스 왕국이라 하여 다르지 않았고, 마탑에서도 미미하지만 사망자는 꾸준히 나오고 있었다.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기에 불릿의 물음에 시시덕거리던 부부는 단번에 얼굴이 굳었다.
“장맛비도 큰일인데 몬스터까지 나돌아 다니고 있으니 정말 큰일이우. 벌써 이삭이 많이 떨어졌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벌써 세 명이나 죽었어요, 무서워서 밖에 나가지도 못해요.”
근심 가득한 표정과 말이었기에 장내의 분위기는 바깥에서 몰아치는 비바람처럼 싸늘히 가라앉았다.
번화한 곳이면 몰라도 마을단위의 축제는 수확제처럼 커다란 축제가 아니면 벌이기 힘들었다.
먹고 살기 힘든 시골의 삶에서 유일한 낙인 수확제를 망칠지 모른다는 생각과 몬스터로부터의 불안감에 촌장의 얼굴은 좀체 펴지질 않았다.
“그래서 내가 온 것이오. 식량과 의복이나 넉넉히 준비해두시오. 내일 안에 주변을 정리해줄 테니.”
그리고 이런 백성의 고뇌를 두고 볼 불릿이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