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3 몬스터 웨이브 =========================================================================
불릿은 조용히 짐을 싸고 있었다. 그의 이번 여정은 영토의 사활을 걸고 있었기에 외부로는 알려지지 않은 비밀여행이었다.
결국 회장에서의 발언은 불릿의 승리로 돌아갔는데,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 그동안 의견을 조율하는데 힘썼던 그가 명령이란 빌미로 강제로 통과시켰다.
불릿이 왜 그런 결단을 내렸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가신들은 눈물을 머금고 그를 보내주어야 했고, 처음 선포했던 1주일이 다가오자 성문이 닫히기 전에 외부로 떠나려는 준비를 하는 불릿이었다.
기기긱…
몰래 열려던 것인지 천천히 틈을 벌려지던 출입구. 그러나 조용히 짐을 싸고 있던 불릿에겐 그만큼 크게 들리는 것도 없었다.
“들어와라.”
흠칫.
그의 말에 잠시 주춤주춤거리던 인영은 살포시 문을 닫고선 총총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부, 불릿….”
“흙덩이냐, 짐은 다 쌌고?”
“그게…….”
흙덩이는 불릿의 물음에도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는데, 흘깃 그 모습을 바라보던 불릿은 가죽가방의 끈을 단단히 묶고서 침상 옆에 내려놨다.
“왜 말이 없니?”
“…진짜 가는 거야? 우리 둘이서?”
평소라면 좋아서 폴짝 뛸 그녀였으나 반응이 영 신통찮았다.
흙덩이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불릿도 알았으나 그걸 꼬집을 만큼 그가 얼굴에 철판을 깔진 않았다.
결국 입을 여는 것은 방에 들어선 그녀였다.
“히잉, 가기 싫어.”
눈물을 글썽이는 맑은 눈망울에 슬픔이 어리자 불릿은 침상에 걸터앉고선 그녀를 품에 안아주었다.
토닥, 토닥.
“나도 싫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 여기서 자신의 안위만 생각한다면 군주라 불릴 자격이 없다.”
“군주 하지 마! 그냥 우리랑 살아, 응?”
침상에 걸터앉았어도 불릿보다 낮은 키의 흙덩이를 내려다보며 그의 안색은 살짝 어두워졌다.
“흙덩이 이제 알아! 불릿이 얼마나 위험한 짓을 했었는지! 왜 둘이서 가야해? 안 그래도 되잖아?”
“흙덩아, 둘이서 다녀야 흑마법사의 눈을 피할 수 있어. 어중간한 병력과 함께 해봤자 함정에 빠지기 쉬울 뿐이야.”
또르륵.
“올리비아랑 유실리아도 같이 가면 안 돼? 맨날 울어, 나도 울구, 슬퍼, 히잉….”
토닥, 토닥.
“…….”
차마 뭐라 해줄 말이 없었기에 토닥여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마 대륙에 남은 마지막 상급 정령사의 책임이 그를 밖으로 내몰았으나, 몬스터 웨이브를 막으려는 것에 대해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닐 것이다.
“미안하다. 너도 위험에서 빼놓고 싶었지만 네가 없으면 난 정령사도 뭣도 아니야. 미안해.”
그의 사과에 흙덩이는 이슬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도리도리했다.
“훌쩍, 아니야. 불릿 잘못이 아닌걸? 있지이, 흙덩이가 오빠의 힘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그땐 정말 슬펐을 거야, 그러면 오빠랑 이어주는 게 없잖아.”
“…쪽.”
“으응…, 낼름. 그래서어, 오빠는 내 오빠면서 부모님이야, 항상 나만 생각해주니까.”
‘아니야, 그녀도 너만 생각해준단다.’
지금도 지켜보고 있을 가이아 여신에게 슬픔 한가득 안겨주는 말이었으나 굳이 그걸 자신의 입밖으로 내밀 필요는 없었다.
아마 가이아 여신은 지금 이러한 불릿의 선택에 분노하고 있을지 몰랐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런 나를 용서해달라 말은 않겠소.’
정령사의 숙명, 그것은 정령과의 교감이 지나쳐 정신병에 잘 걸린다는 것이었다.
그 정도는 아니었으나 불릿은 흙덩이의 슬픔이 전해져와 가슴이 뭉클했다.
물컹물컹.
“…음.”
그녀 스스로가 안겨오며 커다란 가슴이 짓눌리자 그 감촉이 짜르르 전해져왔다.
전해져 온 것은 마음이 아니라 그녀의 커다란 두 융기일지도.
어쨌든 힘들고 슬픈 것은 맞았기에 품에 안긴 그녀의 등을 찬찬히 쓸어내렸다.
스르륵, 틱, 스르륵, 틱.
쓸어내리는 손길 중간중간에 브라의 후크가 걸렸으나 애써 무시하는 불릿. 지금은 응응(?)을 할 때가 아니었으니까.
불릿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살며시 떼어내자 눈물로 얼룩진 흙덩이의 얼굴이 보였다.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선 그것을 닦아주며 입을 떼는 불릿.
“가이아 여신이 이르길, 흙덩아, 너를 사랑한다.”
“…헤헤, 훌쩍! 나도 사랑해, 불릿 오빠!”
와락!
콧물을 삼키며 강하게 안겨오는 흙덩이. 그녀는 가이아 여신이라는 말이 땅의 정령들이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라 생각했는지 불릿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했다.
차마 출생의 비밀을 알려줄 수 없었기에 그냥 넘어가는 불릿이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가이아 여신은 피눈물을 흘렸으리라.
“떠나기 전에 올리비아와 유실리아를 만나자.”
“…역시 안 가면 안 돼? 올리비아가 이건 너무 위험하대.”
“…….”
대답하기 껄끄러운 사안이었기에 불릿은 그저 손을 꼬옥 잡아주며 함께 방을 나설 뿐이었다.
“옥체 보중하시길, 각하.”
“알겠다. 영지를 잘 지키도록.”
“충.”
불릿은 차림새도 용병처럼 꾸린 상태로 등에 창대와 허리춤에 창날을 꽂아 넣고서 성문을 나섰다.
그의 곁엔 흙덩이가 불릿의 회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빗물에 불릿이 젖어들고 있자 걱정스러워 했다.
“안 추워? 이거 입을래?”
무슨 착오가 있었는지 흙덩이의 짐엔 우의나 로브가 들어있지 않았는데, 아마 가녀린 그녀가 들기엔 지금 매고 있는 가방만으로도 상당한 무게이기에 짐을 준비해주던 안나가 빼버린 것 같다.
투둑, 투두둑.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이 몸을 적셔왔으나 아직까진 괜찮은 수준이기에 불릿은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힝.”
“…….”
불릿이 아무 말도 없자 흙덩이는 그저 그의 뒤를 따라갈 뿐이었고, 점점 성이 조그맣게 보일 때까지도 그의 입에선 말이 나오질 않고 있었다.
* * *
“불릿….”
올리비아와 유실리아는 멀어져가는 불릿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가 자기들을 찾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떠나는 순간 그를 보면 반드시 붙잡을 것 같았기에 그녀들 스스로가 몸을 숨기고 있던 것이다.
높은 성벽의 위에서 떠나는 불릿과 흙덩이를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이윽고 점이 되어 사라진 그들이 보이기라도 하는지 한참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투두둑, 투둑.
쏴아아아아-
“마님, 들어가셔야 해요.”
이윽고 장대비가 억수처럼 쏟아지자 우산을 갖고 온 루나가 그것을 펼쳐 올리비아를 가려주었고, 뒤따라온 하녀는 유실리아를 씌워주었다.
“마님?”
루나의 물음에도 반응을 않던 올리비아는 높은 곳에 위치한 성벽의 특성상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비바람을 맞고 있었는데, 평소 불릿이 좋아하던 몸매가 드러나는 드레스가 촉촉이 젖어들어도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유실리아, 그를 이렇게 보내도 될까?”
바로 옆에 있어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있었으나 유실리아 또한 명색이 익스퍼터, 그녀의 목소리를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오라버니가 선택하신 일인걸요.”
“예쁜이가 불릿을 잘 지켜줄까?”
“그런 일이 일어나질 않길 바라야죠.”
그녀들도 흙덩이를 아끼긴 마찬가지였으나 결국 최종적으로 불릿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었기에 올리비아는 은밀하게 흙덩이를 만나 부탁을 했다.
‘만약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그땐 네가 불릿을 지켜줘.’
‘예상치 못한 일?’
‘만약, 진짜 만약이지만, 둘 중 하나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위기라면…, 그땐….’
매우 잔혹한 말이었으나 흙덩이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내가 지킬게! 흙덩이를 믿어!’
그녀 자신도 매일같이 눈물바다를 일으키는 주제에 당돌하게도 불릿을 지키겠단 말에 올리비아는 그녀를 안았고, 애써 밝은 모습을 보이려던 흙덩이는 그녀와 같이 울음보를 터트렸었다.
“난 나쁜 년이야. 그 아이를 희생시키려는 생각을 하다니.”
자신을 자책하는 말에 유실리아는 마땅한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그녀 또한 흙덩이의 희생을 바라는 이였으니까.
“불릿과 사랑을 나눈 뒤로 처음으로 밉다는 생각을 했어.”
“마님!”
“아냐, 루나. 이건 불릿이 잘못한 일이야. 너도 이 점에선 할 말은 없을걸?”
“…….”
루나가 불릿의 험담을 하니 이를 만류하려 했으나 그녀 또한 이번 일에 한해선 불릿이 잘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기에 할 말을 잃었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얼굴도 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불릿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지 않으면 그녀들은 인간도 아니리라.
“유실리아, 너도 참고 있었지만 실은 오빠가 밉지?”
“저는, 저는….”
차마 말을 못 잇는 유실리아였으나 비바람을 맞던 올리비아는 이미 시야엔 보이지 않는 불릿과 흙덩이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얼굴도 비추지 않은 거잖아.”
“미워요, 원망스러워요. 언제나 작은아씨만 챙기는 오라버니가요.”
쏴아아-.
점점 세차게 내리는 비바람을 맞으며 유실리아가 입을 떼자 올리비아는 더 이상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지 않았다.
빙글.
“들어가자, 이러다 몸 상할라.”
“…네, 마님.”
그녀는 내성으로 들어가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은 굳건히 서있는 성벽을 때리며 뜨거워진 대지를 차게 식혀갔다.
쿠르릉……
천둥을 동반한 장맛비였다.
* * *
터벅, 터벅.
“헤엑, 헤엑.”
정령력을 사용하지 않고 걷자 흙덩이는 불릿의 발걸음을 따라가기 벅차했고, 본격적으로 몬스터와 드잡이질을 하려했던 불릿은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여기서 조금 쉬도록 하자.”
“후에에!”
털썩.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흙덩이는 나무에 기대앉았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은 온통 냄새를 풀풀 풍기는 땀으로 범벅이었다.
그런 땀조차도 좋은 냄새가 났으니, 과연 여신의 딸이라 할만 했다.
‘무슨 생각을.’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버린 불릿은 자신도 비를 피해 흙덩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힘들어?”
“헤엑, 헤엑, 힘들어, 헤엑.”
연신 땀을 흘리는 그녀가 안쓰러웠는지 불릿은 건강이 걱정됨에도 차가운 빗방울을 느끼게 해주고자 로브의 두건을 벗겨주었다.
스륵.
토도독, 툭.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의 틈으로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자 흙덩이는 그것을 맞으며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아, 시원하다! 불릿, 이거 답답해.”
그녀는 로브를 손으로 쥐어뜯으며 불편함을 토로했는데, 불릿은 흙덩이의 적셔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방울을 털어냈다.
“어쩔 수 없다. 비에 직접적으로 닿으면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니까.”
그 외에도 흙덩이의 약한 아기피부는 나뭇가지나 풀잎에 긁히면 쉬이 상할 수 있기에 이를 방지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치유능력이 있기야 하지만, 미리 방지할 수 있는 일임에도 그것에 의지한다면 정작 중요한 때에 사고가 발생하는 법이다.
불릿의 충고에 흙덩이는 불만스러웠는지 볼을 부풀리면서도 그가 건네주는 수통을 받아 잘도 물을 마셔댔다.
“꼴깍, 꼴깍-.”
흙덩이가 물을 마시며 쉬는 사이 그는 지도를 펼쳐 현재위치를 알아보았다.
“성으로 대피하지 못할 만한 곳이….”
그가 다니려던 곳은 외성까지 대피하지 못한 마을주민들을 구하려는 것이다.
아직까지 중앙영지에서 그렇게 멀리 나오진 못했으나 지금은 몬스터가 준동하는 시대, 몬스터 웨이브까지 겹치면서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