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2 몬스터 웨이브 =========================================================================
‘이게 진정 옳은 선택인가? 흙덩이까지 위험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
군단의 군인들도 몸을 아끼지 않고 죽을지도 모르는 몬스터 웨이브를 막으러 간다.
몬스터 웨이브는 평소엔 견원지간인 각기 다른 종의 몬스터가 싸우지도 않고 뭉쳐서 오직 인간만을 노리는 악질적인 현상이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인간만 습격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인간은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만이 뭉쳐서 살기 때문에 놈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놈들이 거센 물결이 되기 전에 무너트려야 하는데….’
“흐에에엥….”
“작은아씨, 괜찮아요, 오라버니는 가지 않으실 거예요.”
“예쁜아, 어이구, 예쁜이….”
두 여인이 흙덩이를 달래는 모습을 보며 그의 동공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이제 갓 열 살인 아이에게 살육을 강요해?’
이전에야 몰라서 그랬다곤 하지만 가이아 여신에게서 흙덩이의 진실을 듣고 나니 뭔가 더욱 애착이 갔고, 함부로 죽인다는 행위를 펼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고위귀족,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에 어울리는 격을 갖춘 자였다.
“올리비아와 유실리아는 성에 남아라. 흙덩이와 나는 호위병대를 이끌고 놈들을 각개격파할 생각이다.”
벌떡!
“오빠아아!! 정말 미쳤어?! 애라고, 어리단 말이야!”
“…나도 안다.”
그의 결정에 올리비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콰당탕!
“흐에엥! 으아아앙!”
“작은아씨, 제 품에서 우세요.”
“끄으읍, 으븝, 으브븝….”
차마 우는 걸 말리진 못하겠고, 결국 유실리아는 흙덩이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묻어주며 스스로가 참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서로 말싸움을 벌이고 있는 불릿과 올리비아에게 안기지 못하자 흙덩이는 유실리아의 품에 파고들며 눈물로 그녀의 옷을 적시고 있었다.
“안 돼! 가지마! 갈 거면 차라리 날 죽이란 말이얏!!”
“올리비아! 무슨 그런 심한 말을 하나!”
“너 없으면 어떻게 살라고! 차라리 죽이란 말이야앗!!”
“……하아.”
짙은 한숨을 내쉬는 불릿. 상황이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을 하나가 없어지고 있을지 몰랐다.
이러한 말싸움은 하나도 도움이 안 되었지만,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맹세했으며 또 자신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해온 그녀들의 의견도 무시할 순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할 때, 불릿의 눈은 침잠하게 가라앉았고, 호흡은 느릿했다.
“흙덩이만 따라오고 너흰 성에 남는다. 이건 명령이다.”
그의 말에 화를 내던 올리비아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고, 흙덩이의 눈물로 옷을 적셔가던 유실리아도 두 눈을 감은 채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흙덩이는, 자지러지게 울다가 정신을 잃고 실신해버린 상태.
처음으로 그녀들의 의견을 묵살시킨 불릿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고 있었다.
* * *
3일 후, 회의가 다시 열릴 때까지 불릿은 흙덩이를 제외하곤 다른 부인들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들이 그를 피한다기 보다는 면목이 없었기에 불릿 스스로가 그녀들을 만나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이야 어떻게든 불릿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썼으나 밤일조차 피하는 마당이니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그가 흙덩이를 보는 것도 울다 지쳐 잠든 모습만 확인하고 방을 나서기만 했으니, 그의 마음은 여전히 무겁기 그지없었다.
“본령으로부터의 결과, 흑마법사의 개입 타당. 전투 시 주의요망.”
“으으음.”
“허어, 이게 무슨 일인지….”
아크 체인의 발표에 가신들은 저마다 탄식을 터뜨렸고, 군단을 점검하느라 참석하지 못했었던 레너드 자작은 오늘 회의에는 참가할 수 있었다.
“이번 몬스터 웨이브는 흑마법사와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전술도 그에 맞췄습니다. 지원병력의 지휘관으로는 바스톤에 겔럭서스 천인장, 바람이 머무는 곳에 페릭스 천인장이 각기 연계하기로 했습니다.”
겔럭서스와 페릭스는 농담도 곧잘 주고받는 사이였기에 아예 서쪽지역을 맡으라고 하여 두 명이나 그곳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천인장 두 사람이면 서쪽의 준동을 막을 수 있으리라.
“이어서 카텐령의 지원에는 불모의 황무지로 인해 어떤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할지 몰라 마법에도 능통한 제노시스 천인장을 파견키로 결정했습니다.”
사각사각사각.
그리고 이들 병력을 뒤에서부터 지원해주는 행정관들도 업무를 위해 열심히 적어가고 있었다.
“그랩 자작의 영지였던 1, 2구역은 이우우스 행정관만으론 전투수행에 무리가 있어 벤젼스 휘하의 대대가 출진합니다.”
벤젼스는 신생 라체나의 단장으로 추대된 몸. 비록 아직 마땅한 활약을 할 정도로 단원들이 성장하지 않아 눈에 띄진 않았으나, 그 스스로도 소드익스퍼트 상급이기에 홀로 2개 영지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불모의 황무지가 미지수의 경우를 가지고 있다지만 아직까진 대대적인 몬스터의 활동이 나타나지 않은 곳이고, 동쪽에 위치한 카질런 남작이나 베니스 남작은 연륜도 있고 영토도 잘 돌아가고 있었으니 자기들끼리 잘 지켜내리라 믿었다.
이렇게 총 5곳에 4명의 천인장을 지원 보내니 5천 명이라는 거대한 군단이 순식간에 그냥 잘나가는 영지급의 수준으로 변해버렸다.
그래도 중앙영지의 군단은 루드밀라 전역과 비교해도 정예로 구분됐으니 수비만 생각한다면 괜찮았다.
“다음으론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노장 크레파토스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모두가 그를 주목했고, 그는 목을 가다듬은 후 레너드 자작의 뒤를 이었다.
“험험, 모두가 염려하는 것은 잘 알겠으나 이들이 수비를 하는 동안 몬스터가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 상급 정령사이신 각하의 힘으로 몬스터 웨이브가 끝날 때까지 순회를 하실 거요.”
스윽.
스윽스윽.
역시나 불릿이 나선다는 말에 여기저기서 손이 들리자 불릿을 쳐다본 사무예드는 그의 미미한 끄덕임에 한 인물을 지정했다.
“몬스터는 인간과 다릅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예상하기 까다롭고 무엇보다 홍수처럼 밀고 들오는 놈들은 매우 위험합니다.”
“다음.”
“아직 후계도 낳지 않으셨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다음.”
“각하를 호위할 병력이 부족합니다. 마물이라도 나타나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
“다음.”
“다음.”
이어지는 말들은 줄줄이 그의 걱정과 안위, 또는 후계가 정해지지도 않은 마당에 위험한 전장에 나서선 안 된다는 소리였다.
불릿도 대영주의 직위에 있는 이가 너무 자주 나서고, 또 죽음과 자주 직면해 영토에 불안을 심어준 것은 옳지 못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력이 모자라고, 하급이면 몰라도 중급 마물이라도 나타나면 기사가 섞여있는 군대라 할지라도 피해가 매우 클 것이다.
게다가…
“흑마법사가 개입했다. 자네들만으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건….”
“저희 바포 변경백의 병사와 기사들은 우수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을 믿어주시지요, 대영주님!”
“대영주님!”
“각하!”
불릿의 부인들이 그러했듯 이들도 갖은 이유를 들먹이며 그의 출정을 막았는데, 그러나 이들이 내세운 이유엔 크나큰 약점이 있었다.
“그 우수한 병력이 와치라 불리는 마계의 악령에게 제대로 반항도 못하고 무력히 당했다. 거기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던 것은 본인과 흙덩이뿐이야.”
“그래도…….”
“…….”
대부분의 입을 닫게 만드는 발언이었으나 모두가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병력이 다소 희생당하더라도 각하의 옥체가 더욱 중합니다!”
“브라투질라 고문관.”
불릿의 부름에도 브라투질라는 말을 끊지 않았다.
“제발 저희를 생각해주십쇼, 대영주님! 과거 각하께오서 결사대로 향하셨을 때와 행방불명이란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번번이 실신하시는 것과 이번엔 죽었다 살아나신 경우까지, 대체 저희는 언제까지 가슴 졸이며 살아야 합니까!”
“…….”
“게다가 이젠 홑몸도 아니잖습니까! 부인들은 어쩌시려고 그리 몸을 함부로 굴리십니까!”
“브라투질라, 감히 각하께 언성을 높이는가?”
레너드 자작이 그를 노려봤으나 그 순간 불릿이 팔을 들며 이를 제지했다.
“그만, 타당한 이유다.”
“하지만, 각하….”
“자, 내 어찌 모를까? 본인도 대영주란 위치가 쉽게 흔들려선 안 됨을 알고 있다. 솔직히 돈 좀 아껴보겠다고 그동안 하지 않아도 될 위험을 겪기도 했지.”
불릿이 사담을 예로 빗대며 입을 열자 열변을 토하던 브라투질라도 자리에 앉고, 그에게 분노를 보이던 레너드 자작도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모두가 집중하기 시작하자 불릿은 마저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병사들도 누군가에겐 훌륭한 아비이고, 하나뿐인 아들이며 누군가와 대신할 수 없는 남편이기도 하지. 그런 그들을 이렇게 위험한 때에 밖으로 내몰면서 나만 편해지긴 조금 그렇더군.”
“하오나….”
누군가 중얼거리며 항변하려하자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이번 사태가 흑마법사의 수작이란 것이 밝혀졌는데도 정령사란 자가 고귀함 운운하며 자리만 지킨다면 그건 그것대로 우습지 않은가? 감히 본인의 영토에서, 우리의 땅을 침범하는 쥐새끼들을 상대로 말이야.”
고오오-
불릿의 분노에 반응했는지 그의 육체에서 정령력이 뿜어져 나와 주변을 장악하자 딱히 수련을 하지 않은 행정관들은 물론이고, 소드익스퍼트 상급인 레너드 자작조차 심한 압박감을 느꼈다.
“윽.”
‘이건 뭐지? 설마 각하께오서 진실로….’
다들 상급 정령사, 상급 정령사라며 불릿을 치켜세워주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부였다.
현 시대에 상급 정령사는 5영웅이던 바람의 정령사가 유일했고, 지금은 그녀마저도 죽어버렸다.
몇 세기동안 중급 정령사만 배출하고 있던 바포가였으니 가신들은 당연히 그도 중급인 줄 알았는데, 이러한 압박감을 느끼자 문득 불릿이 대단해 보였다.
“가, 각하, 일단 이것부터 푸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가신들의 얼굴이 말이 아닙니다.”
“음? 이런, 나도 모르게 그만.”
감정의 발산에 따라 자연스럽게 뒤따라온 정령력으로 인해 가신들이 힘들어하자 재빨리 위압을 풀었다.
가신들의 반응을 보자 당사자인 불릿도 당황스러움이 드러났다.
‘조절이 힘들군.’
이게 상급의 경지가 맞는지 모르겠으나, 죽음과 직면했을 때 가이아 여신과의 대면에서 변화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순도 높은 정령력이라거나 흙덩이를 통해 발현하는 정령술의 수준이 그리도 높진 않았으리라.
그래도 덕분에 자신이 어떤 경지에 있는지를 몸으로 체득할 수 있게 해주었으니 이를 이용해야 할 것이다.
“이전과는 다르다. 본인의 경지가 한 단계 진보했으니 놈들이 당할지언정 본인이 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휴우, 하지만 물량공세엔 아무리 높은 경지라 하더라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병력을 나눌 수 없지 않습니까?”
크레파토스의 호위대는 기본이 기마병, 말에서 내리면 전력이 감소해서 소수의 이점을 살릴 수 없게 된다.
남은 천여 명의 대대인원도 중앙영지를 지켜야 했으니 그를 호위하며 이동할 만한 병력이 없었다.
이에 불릿은 고민하는가 싶더니 자신의 의견을 내놨다.
“크레파토스, 계획 변경이다. 호위병대는 따라오지 말라.”
“각하…?”
눈을 감으며 상석에 몸을 파묻던 불릿은 속삭이듯 작게 말을 내뱉었다.
“본인과 흙덩이, 두 사람만이 따로 다닐 것이다.”
그의 발언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던 회장을 다시 뜨겁게 달구는 요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