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5 불모의 황무지로 =========================================================================
자베르는 중앙영지 지부소속 지크테와 함께 방문하게 되었다.
지크테는 지부장은 아니었으나 사실 지부장의 자리에 앉은 이가 돌아다니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자베르가 발로 뛰어다니는 이유는 순전히 그의 친절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지크테와 함께 성으로 방문한 자베르는 지하공동에서 알아낸 사실들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저번에 주셨던 서적을 참고해 다각도로 분석해 봤습니다.”
“이걸 봐주시겠습니까, 백작님?”
스윽.
불릿은 지크테가 건네는 보고서를 읽다 한곳에 시선이 멈췄다.
“과거 흑마법사들이 남겨놓은 유적이 이곳에 있다고?”
툭.
그가 내려놓은 보고서엔 어떤 지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얼기설기 이어져있는 건물들은 중앙의 거대한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에 카텐령의 지부장인 라르벨로 자베르는 불릿의 물음에 대답해주었다.
“고대의 전설과 지하공동에 남겨진 비문, 그리고 72악마군주 중의 하나인 아스타로트의 서적을 토대로 알아낸 사실입니다.”
“…뭔가 미심쩍은데? 전쟁에서 패퇴한 마당에 이제 와서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건가?”
아무리 비장의 수라 하더라도 필요할 때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도 없는 법이다.
그러니 전쟁에서 패배한 흑마법사들이 유적을 이용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뒤늦게 발견하여 사용하지 못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곤 해도 기이할 정도로 불릿을 도발하는 놈들의 행각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저흰 어디까지나 발견된 물품과 고증. 그리고 그동안의 행적을 토대로 결과를 이끌어냈을 뿐입니다. 철저히 마법사의 고찰을 통해 이끌어낸 결과이니 오해마시길.”
“으음, 알겠네. 의심한 건 아니니 오해 마시게.”
“괜찮습니다. 백작님께서 예민하실 수밖에 없는 문제이니 저희도 빠진 곳이 없나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수고했네.”
다시 보고서를 손으로 집은 불릿은 읽으면서 그들에게 물음을 던졌다.
펄럭, 펄럭-.
“지도와 자료를 보니 불모의 황무지 중앙에 뭐가 있긴 있구먼.”
지도에는 72곳의 작은 원과 그것들을 이어주는 거대한 원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없는 불모의 황무지에 그러한 것들이 있었으면 진즉에 알아챘을 것이다.
“이전의 사건으로 보아 지하에 숨겨져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쯧, 누가 쥐새끼 아니랄까봐 어둡고 눅눅한 곳을 좋아하는군.”
이번 사건을 통해 불릿의 흑마법사에 대한 악감정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래서 그런지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좋은 표현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불릿의 기분이 안 좋아 보이자 자베르는 옆에 있는 지크테에게 눈치를 주었고, 그는 할 수 없이 자기가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지도를 보시면 작은 원이 72곳이지 않습니까?”
“많기도 하군. 대체 땅굴을 얼마나 파놓은 건지 모르겠군.”
이 지도가 사실이라면 불모의 황무지 전역은 흑마법사의 소굴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개간작업을 진행했으면 불릿은 크게 뒤통수를 맞았을 것이고, 그의 부인들도 그냥 그 자리에서 핏물이 됐으리라.
생각만 해도 오싹하고 열불이 나는 일이었기에 다시금 머리가 달아오르자 지크테가 재빨리 선수를 쳤다.
“그 작은 원들은 72악마군주를 의미하는 걸로, 가운데의 커다란 원으로 힘을 집중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그래서 마기가 방출되던 것인가?”
“그 부분에 대해선 작은아씨 덕분에 알아내기 한결 쉬웠습니다.”
불릿이 관심을 가지자 지크테를 밀어내고 자베르가 나섰는데, 지크테는 어려운 일만 자신이 도맡아하자 홀로 구시렁거렸다.
“만일 작은아씨의 대지의 축복으로 마기가 정화되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더라면 다소 난항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자베르의 앞에서는 대지의 축복을 시전한 적이 없었기에 그러한 것인데, 개간작업이 중요하긴 하나 불릿과 흙덩이, 둘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기에 마법사가 대기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기에 그렇다.
“그래서 72악마군주의 힘을 충돌되지 않도록 사방에서 각기 받아들인 후, 중앙의 무언가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무언가가 생명체일지, 사물일지, 아니면 마법진일지 알 수는 없다는 거로군.”
“고대 흑마법사의 유적이라 했으니 뭐가 됐든 방치하면 위험이 증가된다는 것은 분명하지요.”
“본인이 직접 각개격파 한다면?”
이미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으면서도 또 다시 앞장서려는 불릿의 물음에 자베르는 고개를 저었다.
“단시일동안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기록에 따르면 불모의 황무지가 그리 된 것은 대지의 기운을 빼앗은 후 마기로 변환시키는 어떤 방법에 의해 그리 된 것입니다.”
“유적이 존재했을 시절부터 꾸준히 이어져오던 것이렷다?”
“단순히 한두 곳을 파괴한다고 해결되지도 않고, 남은 71곳을 찾아다니다간 때를 놓칠 게 분명합니다.”
그 기나긴 세월동안 모인 마기가 얼마나 어마어마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당장 72곳이나 되는 유적 중 하나일 뿐인 지하공동에서도 그러한 위기를 겪었는데, 다른 곳이라고 쉬울 리가 없었다.
놈들이 활동을 재개하는 것으로 보아 일이 벌어질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토벌, 아니. 전쟁을 준비해야합니다. 이젠 토벌이라는 틀에서 끝낼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사항이 아니게 됐습니다.”
“끄응.”
토벌이 가벼운 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토벌이 가벼워 보일 정도로 흑마법사의 꿍꿍이는 위험한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이러한 현장을 두 눈으로 목격한 자베르의 판단이 이러하니 불릿도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다.
“그게 마탑이 내리는 결론인가?”
“이미 얘기는 끝났습니다. 위에서도 아주 난리가 났더군요, 악마군주가 강림할지도 모른다고…헛.”
“지부장님, 무슨 소릴 하십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악마군주라니?”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은 자베르가 서둘러 말을 끊었으나 이미 불릿은 판단에 들어서고 있었으니 대꾸를 안 할 수 없게 되었다.
그저 그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식으로 말하려던 자베르는 결국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지크테, 자네는 나가있어 보게.”
“자베르 지부장님, 그건 외부인에게 말해서는 아니 될….”
“당사자일세, 그것도 죽기 직전까지 갔었던. 외부인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억지로 명분을 만드는 자베르였으나 그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현 대륙에서 불릿만큼 흑마법사의 잔당에 다가선 이도 없었고, 이만큼 발견해낸 실적을 가진 자도 없었기에 그렇다.
게다가 그는 현재 중급을 넘어 상급의 경지에 들어선 정령사이지 않은가?
…인간인지 정령인지 의심스런 흙덩이와 응응(?)을 통해 힘을 발휘하는 건 좀 이상했지만.
여하튼 정령술은 발휘할 수 있었으니 그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정령사이자 대영주였다.
발설하게 된 이상 숨긴다고 하여 숨길 수 없게 됐으니 차라리 속 시원하게 드러내고 도와주는 게 나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 자베르.
달칵.
지크테가 방에서 나가자 자베르는 숨을 길게 내쉰 후 말문을 열었다.
“지금부터 나오는 얘기는 절대, 절대 다른 분들에게 알려드려선 안 됩니다. 그것은 백작님의 부인분들도 포함됩니다.”
“본인의 아내들은 남이 아니질 않은가? 당장 그 자리에 없었던 부인이 단 한 명이라도 있는가?”
불릿처럼 죽기 직전까지 갔던 흙덩이야 당연하다치고, 정신이 붕괴되어갔던 올리비아나 그나마 의젓했던 유실리아도 사건의 현장을 생생히 목격했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불릿을 위하는 여자들인데 그를 배신할 리도 없었다.
그의 강한 믿음에도 자베르는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이를 부정했다.
“절대 안 됩니다. 이것은 누굴 믿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비밀을 알게 된 분들의 신변이 위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위험? 어째서 그러한가? 아니, 놈들이 본인을 노리는 것 같은 행적은 이미 여러 번 드러나지 않았나?”
“그럴 거라 예상하는 것과 그렇다라는 것의 차이는 백작님이 그 누구보다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
자베르의 대답에 불릿은 일순 입을 닫아버렸다.
그의 말대로 예상이나 추측과는 별개로 확정, 또는 당사자가 되는 것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법으로 따지면 알고 한 것과 모르고 한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르고 한다면 범죄를 저질러도 정상참작이나 없는 일로 해줄 수 있지만,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한 사람은 어떤 변명을 대도 형벌을 피할 수 없다.
이해가 잘 안 된다면 술 처먹고 범죄 저지르는 것과 맨정신에 저지르는 것으로 구분하면 된다.
…잉, 이게 아닌데.(?)
“그대의 말도 옳네, 그러나 흙덩이는 본인과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정도는 알아야하지 않겠나?”
흙덩이는 불릿과 한 몸이라 할 수 있는 존재다. 그녀가 없으면 불릿은 제대로 능력을 발휘할 수 없고, 흙덩이는 불릿이 없으면 정령력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둘이 합체(?)를 하는 것이기에 이 문제만큼은 피해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자베르도 불릿과 흙덩이의 관계를 일부 알고 있었기에 한숨을 내쉬며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좋습니다. 대신, 다른 부인들께는 알려주시지 마시기를. 아, 특히 작은아씨는 죄송하지만 발설하실 수 있는 여지가 있기에 단단히 주의를 주십시오.”
그녀는 누가 봐도 어린아이처럼 행동했기에, 실제로도 어린아이지만.
여하튼 그렇기에 자신도 모르게 툭툭 위험한 발언(?)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불릿도 이 부분에 대해선 동의하는 바이기에 불쾌해지 않고 넘어갔다.
“이를 말인가? 내 잘 일러둘 터이니 걱정하지 말도록. …헌데 말이야, 이게 마탑에서 지원을 해준다는 것인지 아니면 마탑에서 흑마법사를 상대한다는 것인지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나?”
어 다르고 아 다르다고, 전쟁의 주관을 누가하느냐에 따라 불릿의 부담이 줄어든다.
만약 마탑에서 지원을 해주는 형식이라면 전장의 전면에는 불릿의 군대가 앞장서야 하고, 그 반대라면 불릿이 지원하는 형국이니 보다 적은 피해로 진행이 가능할 것이다.
“본인은 결사대가 전멸할 정도로 격렬한 전투를 겪었네. 본래 본인이 결사대에 들어설 정도는 아니지 않았는가?”
“…예, 그렇지요.”
중급 정령사라고 하지만 어떤 미친놈이 백작이자 대영주인 불릿을 결사대에 집어넣자고 한 것인지 자베르는 속으로 욕을 했다.
그게 말이 안 되는 것이었지만, 말이 되게 만든 주변의 패자(霸者)들과 란푸스 왕국, 그리고 연합체.
억지로 참가했고 수많은 위기를 겪은 후 영토는 무너지기 직전까지 갔었으니 이용당하기 싫은 불릿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그렇다곤 하나 자베르는 수많은 마탑의 지부중의 하나를 맡고 있었을 뿐이니 말에 힘이 없었다.
“상층부에선 전쟁에 나서주는 분들에 한해 지원을 해주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대신 흑마법사의 유적에 대해선 저희가 책임지고 조사하기로….”
스윽.
불릿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고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으르렁거렸다.
“자네 지금 장난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