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3 상처 입은 올리비아의 마음 =========================================================================
“얘들아, 우리 오빠야! 인사해!”
아이들이 바닥에 넙죽 엎드려서 벌벌 떨건 말건 흙덩이는 불릿을 자랑스럽다는 듯 소개했는데, 그런 그녀의 외침에 참을성이 없는 아이들 몇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흐떵이 누나네 형아야?”
“우리 오빠야! 엣헴!”
“오라버니, 저게 무슨 말이여요?”
아까 린이라 불린 여자아이가 부채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13살 정도의 남자아이가 조심스레 물음을 건넸다.
“혹시 흙덩이 누님이 작은아씨라 불리는 그분이신가요…?”
“응? 그런데, 왜? 너도 그렇게 부를 거야?”
“헉, 아닙니다! 폐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째쏭하니다!”
“죄송해요, 언니!”
덜덜덜-.
다시금 아이들이 넙죽 엎드리자 불릿이 한숨을 쉬며 흙덩이의 머리칼을 흩트려놓았다.
“흙덩아, 저 아이들하고 놀고 있었니?”
“재밌었어! 말도 잘 통하구, 재밌는 놀이도 많이 가르쳐줬어!”
“그렇구나, 그러면 친구들이겠네?”
“맞아! 흙덩이의 친구야!”
흙덩이는 저들이 왜 저렇게 엎드리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으나 누군가 그녀에게 알려준다면 슬픈 표정을 짓게 될지 몰랐다.
불릿은 그걸 방지하고자 그녀에게 서둘러 다음 행동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럼 친구들을 소개시켜주겠니? 저렇게 있으면 힘들지 않을까?”
“으응…, 이것도 놀이 아니었어?”
“아니야, 어서 일으켜주렴.”
“알았어!”
도도돗.
흙덩이는 불릿의 말에 냉큼 대꾸하고서 아이들을 향해 달려갔다.
“얘들아, 일어나! 우리 오빠가 소개시켜달래! 아이참, 그만 놀고 일어나라니까?”
“일어나도 되나…?”
“몰라, 허리아파. 난 일어날래.”
“오라버니, 일어나도 괜찮아요?”
아이들의 구시렁거림에 13살 남아는 심각하게 고민하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들 일어나서 자기소개하자. 대영주님이 기다리시잖아?”
그제야 아이들은 늙은이처럼 ‘어구구’나 ‘우햑’ 같은 앓는 소리를 뱉으며 바닥에서 일어섰다.
“헤헤, 린, 린! 이리와!”
“아앗, 어, 언니?”
린이라 불린 여아는 흙덩이의 손에 이끌려 불릿의 앞에 마주서게 됐는데 낯선 어른이라 그런지 우물쭈물 거렸다.
“아, 안녕하세요, 백작님?”
아이의 수줍은 인사에 불릿은 나머지 아이들을 다독이고 있는 올리비아와 유실리아를 훑어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아가랑 놀아줬다고?”
“아가요? 그렇게 어린애는 여기 없는데….”
‘아차.’
평소 흙덩이를 부르던 애칭이 튀어나오자 그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흠흠, 우리 흙덩이랑 놀아줬다고?”
“저기 큰언니랑 둘이서 그네타고 있길래 같이 놀았어요. 근데 작은언니는 밖에도 거의 나와 본 적이 없다하고, 친구도 없다 해서 불쌍했어요.”
“…그래?”
린의 말에 불릿은 해맑게 웃고 있는 흙덩이를 보다가 그녀의 복장에도 눈길이 갔다.
“흙덩아, 뭘 하고 놀았길래 꼴이 그 모양이더냐?”
“소꿉장난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고, 또 얼음땡이랑….”
먼지투성이가 된 흙덩이가 조막만한 손으로 이것저것을 세었다.
“흙덩아? 엉덩이 쪽에 그건 뭐니?”
“응? 아, 헤헤헤.”
불릿의 지적대로 그녀의 원피스 안의 둔부엔 무언가 잔뜩 묻었는지 바깥으로 보일 정도였는데, 그녀는 원피스를 번쩍 들고서 흙이 잔뜩 묻은 팬티를 보여주었다.
“꺅!”
“헉, 팬티다!”
“뭐, 뭐하는 짓이더냐!”
탁.
불릿이 그녀의 손을 낚아채자 흙덩이는 고개를 갸웃하다 다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어갔다.
“헤헤, 이건 있지, 앉아서 소꿉장난하다가 흙이 묻었나봐. 하지만 흙은 나쁜 게 아니야, 여기 흙은 건강한걸?”
“어휴, 누가 땅의 정령 아니랄까봐….”
“정확히는 정령이었다가 맞지 않을까요?”
“그거나 이거나.”
흙덩이가 부끄럼도 없이 치마를 휙휙 재껴대자 올리비아와 유실리아가 한소리를 했는데, 불릿은 괜히 자기가 부끄러워졌다.
“바, 방금 봤어?”
“와…, 빤쮸야 빤쮸.”
“이놈들! 눈을 아래로 내리지 못하겠느냐!”
“헉, 저 아찌는 또 왜 그래….”
흙덩이의 팬티에 대해 아이들이 수군거리자 순찰병이 다가와 아이들을 다그치자 불릿이 이를 제지했다.
“그만두게, 이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말일세.”
“하지만, 작은아씨를 욕되게 한 점, 용서받을 수가…!”
“욕되다니? 불릿, 나 욕보였어?”
화아악.
대부분의 아이들이 어리둥절하는 가운데 몇몇 조숙한 아이들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고, 유실리아가 서둘러 다가와 흙덩이의 발언을 막았다.
“작은아씨, 그런 말은 하시면 아니 되요. 부끄러운 말이랍니다.”
“씨이, 흙덩이가 말만 하면 다 하지 말래! 유실리아 미워!”
“자, 작은아씨….”
삐져서 팔짱을 낀 채 몸을 돌리는 흙덩이. 그러나 정신이 어리다고 육체도 어린 것은 아니었기에 F나 되는 커다란 그녀의 가슴이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출렁출렁.
“크흠! 흙덩아, 이리로.”
“응? 에헤헷! 불릿이 안아준다!”
흙덩이의 삐지는 시간은 불릿이 언제 안아주느냐에 따라 주기가 짧아졌는데, 그것은 불릿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는 흙덩이의 특징 때문이었다.
이에 그녀에게 미움 받을 뻔했던 유실리아는 한숨을 돌렸고, 올리비아는 울컥했다.
“야! 불릿이랑 둘이서 하는 데이트에 너네가 왜 끼어들어?!”
“데이트? 자기얌, 데이트가 뭐야?”
“…….”
불릿은 말없이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고,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선 더욱더 몸을 밀착시킬 뿐이었다.
“헤헤헤, 빨리 돌아가서 박히고 싶다.(?)”
“커헉…흐, 흙덩아!”
“아, 실수. 히힛.”
그러나 모든 이가 들었기에 파장은 적지 않았다.
“…박혀? 뭘??”
“얼음땡 하는 거야?”
“아냐, 술래잡기일 거야. 손으로 탁 치잖아.”
“그건 얼음땡도 맞잖아!”
“다 틀렸어, 정답은 모래집 만들기야. 구멍 뚫을 때 손하고 팔을 넣잖아?”
누가 놀이터에서 노는 어린아이들 아니랄까봐 저마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의견을 주고받을 때, 12살짜리 소녀와 13살짜리 소년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그렇고 그런 사이였구나….”
“어쩐지 가슴이 엄청 크더라니 벌써 그, 그런 짓을….”
아마 둘은 성교육을 받았는지 흙덩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고, 그들을 보호하던 순찰병들까지 헛기침을 뱉으며 고개를 돌리자 머리가 아파오는 불릿이었다.
“후우…, 되돌릴 수도 없고….”
“히히.”
여기서 흙덩이를 혼내기엔 불릿에게 그녀는 너무도 소중했고, 또 자신에게 해주는 일도 비중이 매우 컸다.
게다가 사랑한다는걸 사랑한다고 하는데 하지 말라는 것도 가혹한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나이는 저기서 얼굴을 붉히며 아이들을 통솔하는 소년보다도 적었으니, 잘 알지도 못하는 흙덩이에게 혼을 내는 것은 나쁜 어른의 표본일 것이다.
“예쁜아, 너 자꾸 그러면 내가 확! 불릿하고만 잔다?”
그래도 셋 중에선 가장 어른이라고 올리비아가 허리에 손을 척 얹고서 혼을 내자 흙덩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응? 졸리면 자. 나는 불릿하고 안 자고 할 건데?”
“헉…, 이, 이 요망한 꼬맹이가!”
결국 폭발한 올리비아가 정령일 때의 흙덩이를 부르던 호칭까지 꺼내며 성을 내자 흙덩이는 그녀의 손을 피해 달아다기 시작했다.
“아하하! 나 잡아봐라-!”
“거기서! 술래잡기 아니라고!”
“아하하하! 하하하하하!”
갑자기 노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어리둥절해하던 아이들도 다시 뛰어놀기 시작했다.
“와아! 흙덩이 누나 잡아라!”
“아냐, 바보야. 저기 엄청 예쁜 언니가 술래라고.”
“피해! 짜바!”
“와아아!”
시끌벅적해진 놀이터에 불릿은 순찰병에게 눈짓을 주어 원래의 임무를 수행토록 했고, 그는 한쪽에 마련된 벤치에 앉았다.
털썩.
“후우, 이러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풀썩, 턱.
불릿이 앉자 올리비아와 유실리아도 그를 기준으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이것도 나름 좋지 않아?”
“…나쁘다곤 안 했다.”
“저런 아이를 갖고 싶어요….”
유실리아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거기에서 불릿과의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를 연상한 것 같았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불릿에게로 향하자 불릿은 유실리아의 손을 잡아주었다.
스윽.
“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갖고 싶은가?”
그의 물음에 유실리아는 볼에 홍조를 띄우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릿님의 아이라면… 언제든….”
“으흠, 나 좀 봐주시겠어?”
“어머.”
“왜 그러는가, 올리비아?”
불릿이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쪽!”
그녀는 기다란 속눈썹을 불릿의 속눈썹과 닿게 한 뒤 물러나며 말했다.
“유실리아랑 하지 말라는 건 아니지만, 처음은 나라고? 게다가 지금은 데이트 중이란 거 잊은 건 아니지?”
예상치 못하게 흙덩이와 유실리아 두 명과 마주치게 됐으나 어찌됐건 마실을 나온 이유는 올리비아를 위해서였다.
불릿이 이곳을 보여준 이유도 올리비아의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하고 앞으로 저런 아이들을 키우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낸 것이었으니, 흙덩이가 소중하다 한들 지금은 그녀에게 집중해야할 것이다.
“나도 전쟁 중에 아이를 낳고 싶진 않다. …뭐, 너희가 낳고 싶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퍽.
“어휴, 짓궂게 굴지 마!”
“하하.”
“불릿님도 차암….”
올리비아가 힘이 실리지 않은 손으로 가슴을 때리자 불릿은 그저 웃었고, 유실리아는 홍조가 오른 얼굴을 유지한 채 그의 손을 더욱더 꼭 잡을 뿐이었다.
“내가 빠진 줄도 모르고 잘도 노네.”
“아이들이잖아요.”
“예쁜이는 애가 아니잖아?”
유실리아와 대화를 주고받던 올리비아. 그녀의 말대로 흙덩이와 아이들은 그녀가 중간에 빠져나온 것도 모른 채 누가 술래인지도 모를 놀이를 유지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불릿이 직관을 발휘해 주변을 살펴보니 각기 12살, 13살로 보이는 소녀소년이 술래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른스럽군.’
자기들도 한창 놀고 싶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동생,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욕구를 참고서 술래역할을 하는 소년과 소녀를 보니 불릿의 눈빛은 침중해졌다.
‘아이라….’
갖고는 싶다. 올리비아, 유실리아, 그리고 흙덩이와의 소중한 사랑의 결실을.
하지만 지금은 모든 일의 원흉인 또 다시 등장한 때이고, 당분간은 격렬하고 뜨거운 응응(?)을 하고 싶었기에 나중으로 미루었다.
올리비아도 그걸 이해하고 참는 듯했고, 흙덩이도 불릿의 생각을 받아주었다.
유실리아는 그거완 상관없이 무조건 불릿의 아이를 낳고 싶어했지만.
어찌됐건 지금은 아직 혼인도 하지 않았고, 신혼기분도 내고 싶었다.
“흠, 너희들이 마나를 다룰 줄 알아서 참으로 다행이다.”
“에? 갑자기 무슨 말이야?”
“…확실히 많은 인재들이 죽긴 했네요.”
불릿의 말에 올리비아가 의문을 드러냈고, 유실리아는 약간 우울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러나 불릿은 그게 아니라는 듯 양팔을 벌려 그녀들을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만들고선 이어서 속삭였다.
“그거 말고, 마음껏 싸도 마나로 자궁구를 둘러싸면 피임이 되잖아?”
“미쳤어, 미쳤어! 애들도 있는데 무슨 그런 말을 해!”
“저는 피임하고 싶지 않지만….”
자기들끼리 키득이며 대화를 나누는 연인들의 훈훈한 광경 속에 흙덩이는 제 또래의(?) 아이들과 뛰어놀며 즐거워했다.
“아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