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정령사-179화 (179/241)

00179  드러나는 실체  =========================================================================

‘악마군주가 맞는지도 의심스럽지만.’

마계의 존재는 본디 투쟁과 살육을 즐기는 자들이었기에 강함을 인간의 기준으로 잡아선 안 되었다.

그래서 그토록 강한 마족이라 할지라도 악마군주가 아닐 가능성이 있었는데, 흑마법사들이 총력을 기울여 소환한 만큼 악마군주라는 추측에 신빙성이 기울었었다.

만약 악마군주가 아니라면 전멸한 결사대의 명성에 흠이 갈지도 몰랐다.

“악마에게 여신이라니, 진정 미쳤군.”

자세한 것은 몰랐으나 아스타로트는 남성체로 알려져 있었는데, 놈들의 추종자인 흑마법사가 대놓고 책 제목에 여신이라 적어놨으니 우습기 그지없었다.

다시 책을 뒤집어 살펴보니 아무것도 없던 백지에 무언가 흐릿한 잔상이 보이는 듯했다.

“음?”

펄럭.

스윽-.

백지인 페이지를 앞뒤로 들추며 확인했으나 이내 그 잔상은 사라져버렸고, 자신이 본 게 맞는지 의심스러운 상황.

그러나 불릿의 정신은 또렷했고 잘못 볼 이유도 없었다.

‘숨겨진 메시지인가?’

간혹 이런 식으로 백지에 무언가 특수한 방법을 사용하면 글자가 드러나는 경우가 있기에 불릿은 잔상이 드러났던 이유를 곰곰이 추측해봤다.

‘맨 처음 발견하고서 확인했을 땐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러나 책의 제목을 확인한 후 다시 봤을 땐 이상한 문자가 보였었지.’

불릿은 책을 들고서 뒤집은 후 일정시간 후에 다시 확인했으나 이번엔 글자가 드러나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일까….’

탁, 탁, 탁.

백지인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고민을 거듭하던 불릿은 책상에 백지인 페이지를 뒤집어두고 상념에 잠겼다.

“비밀기지, 책의 제목, 백지, 방금 내가 행한 행동….”

얼핏 문자가 드러났던 원인과 왜 이런 책에 메시지를 숨겨놨는지 연관성을 찾던 그는 답이 나오질 않자 다른 자들에게도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엎어뒀던 책을 다시 뒤집었다.

스륵.

“음? 글자가?”

다시 뒤집은 백지 페이지엔 선명한 글자가 드러나 있었는데, 대체 무슨 방법으로 이런 글이 드러나는지 알 수 없었던 불릿은 책상을 보고선 탄성을 터트렸다.

“허어. 물, 물에 반응했던 것이야.”

불모의 황무지엔 수분이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을 방문한 자들이 있다 치더라도 눅눅한 지하공동이 아닌 지상의 안전한 곳으로 옮긴 후 조사할 것이었기에 지금처럼 물기가 묻은 손으로 만지지 않았다면 글자가 드러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불릿의 손에 물기가 묻은 이유는 흙덩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옮겨진 것이리라.

“하지만 이런 방식이면 언젠간 밝혀질 텐데, 왜 굳이 이런 방식을 사용했을까.”

고민을 하면서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기에 불릿은 책을 들고서 지하공동의 중앙으로 발길을 돌렸다.

터벅터벅.

“불릿! 다 끝났어! 안아줘! 업어줘!”

그가 나타나자 흙덩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방방 뛰며 불릿의 품에 뛰어들었는데, 그의 손에 들려있는 책이 안기는 것을 방해하자 볼을 부풀렸다.

“뿌우, 그건 뭐야?”

“흙덩아, 잠시만. 자베르, 이리 오시게.”

불릿의 부름에 자베르는 서기관이 적어가던 문서의 내용을 확인하다말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용무는 끝나셨습니까?”

“서적도 몇 없고, 그나마 뒤져서 나온 것이 이것인데 뭔가 수상하네.”

“아스타로트…, 흑마법사가 72악마군주를 섬기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 뭔가 다른 내용이 들어있는 모양이군요.”

불릿이 아무리 잘 알더라도 마탑만큼 흑마법사를 잘 아는 것은 아니었기에 마탑지부장인 자베르는 단번에 다른 점이 있음을 눈치 챘고, 불릿도 이에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자신들이 신봉하는 악마군주에 대한 서적이 있는 것이 이상할 것은 아니나, 문자가 숨겨져 있는 백지 페이지가 발견되었네.”

“잠시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지. 아마 물이 닿으면 글자가 드러나는 방식인 것 같네.”

책을 넘겨받은 자베르는 ‘워터’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린 후 공중에 떠오른 물덩어리에 손가락을 찍어선 책에 백지페이지에 슥 발라보았다.

스스스-

그러자 문자가 드러났고, 그것을 읽어가던 자베르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백작님, 이 서적은 저희가 따로 조사해도 되겠습니까?”

“중요한 내용이라도 있는가?”

불릿은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룬어나 글자의 조합방식, 기호 등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기에 숨겨진 내용이 있다는 것만 확인해서 가져왔다.

그런데 자베르가 금세 뭔갈 알아낸 듯했으니 궁금함이 증폭될 만도 했다.

“섣부른 판단을 내릴 정도로 가볍지가 않아 지금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사안이 무겁다라…, 그러면 그리하게. 얼마나 걸리지?”

“못해도 1주일은 걸릴 것 같습니다.”

“그렇게나 오래 걸리는가?”

겨우 한 페이지에 걸친 내용이었는데 해석하는 데만 1주일이나 걸린다니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불릿.

이에 자베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떼었다.

“진정 이 내용이 맞는 것인지, 이것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여러 자료들과 비교를 하며 분석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습니다. 잘못하면 1주일을 넘길 수도 있지요.”

“이놈의 쥐새끼들이 무슨 꿍꿍이를 작당모의하길래…, 알겠네. 그럼 본인은 복귀하도록 하지.”

“벌써 복귀하시렵니까?”

며칠은 머물며 조사할 줄 알았던 불릿이기에 자베르가 의문을 드러내자 그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말을 내뱉었다.

“아무리 조심해도 이곳은 적진일세. 이런 곳에 본인이 오래 머물면 놈들에게 좋은 일을 해주는 것이 아니겠나?”

아직 비밀통로가 어디로 이어져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굳이 위험을 사서 초래할 필요는 없었기에 이번만큼은 병사들에게 조사하도록 내버려두는 불릿이었다.

본래 군주가 직접 발로 뛰어다니는 것이 이상한 것으로, 그동안 불릿이 돈 좀 아끼자고 했던 행동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목숨을 담보로 뼈저리게 배웠었다.

그가 복귀한다는 말에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의 가녀린 소녀, 흙덩이였다.

“와아! 집으로 돌아간다!”

“여기는 싫었니?”

“더럽고 냄새나고 어두워. 게다가 기분 나쁜 기운도 느껴져.”

“기분 나쁜…기운?”

“아마 마기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흙덩이와 대화를 주고받던 불릿은 자베르의 대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불모의 황무지에 스며들어 있던 마기가 이번 사건과 연관이 없는 것 같진 않군.”

“저희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통로가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어디에 어느 규모로 있는지는 모르지만요.”

그러면서 자베르는 책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여기에 힌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이고요.”

“자네는 여기서 머물 것인가?”

지하공동의 위에는 제노시스의 대대가 쳐놓은 막사가 즐비해 있었기에 그것을 가리킨 것인데, 의외로 자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쯤에나 돌아갈 생각입니다. 아직 더 둘러볼 것이 남아있어서 말입니다.”

“그렇군. 거기 셰실리코프 있는가?”

콰과과곽!

촤아악-!

“부르셨습니까, 각하!”

주변에서 보이지 않던 셰실리코프는 불릿의 부름에 바람처럼 달려왔는데, 그가 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한 상태라는 것을 감안하면 미칠 듯한 속도였다.

저번에 호되게 혼이 나고서 정신이 번쩍 든 것인지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빠릿빠릿한 셰실리코프였다.

“자베르 지부장이 조사를 한다하니 필요한 게 있으면 구해다줄 수 있도록.”

“충성! 알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됐고…서기관.”

“예, 대영주님.”

여태까지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서기관이 고개를 숙이며 대꾸하자 불릿이 그에게도 명령을 남겼다.

“자네는 복귀할 때 자베르 지부장과 함께 돌아오도록.”

“그리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곳에서 할 만한 일들을 모두 끝마쳤다 생각한 불릿은 옷차림을 점검하더니 흙덩이를 바라보았다.

“이 더러운 지역을 정화해야겠지. 흙덩아, 대지의 축복.”

“응!”

우우웅-!

치유능력과 마찬가지로 이전보다 훨씬 강한 파동이 발생되면서 발동되는 대지의 축복.

흙덩이가 공동을 돌아다니며 정령술을 발휘하자 주변에선 거무스름한 마기가 스멀스멀 증발했다.

- 끼아악!

- 으어어어……

흡사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마기가 중화되자 순간 불릿의 얼굴은 굳어버렸다.

“저게 무엇인가?”

마나에 민감한 마법사 자베르도 이 광경을 똑똑히 보았기에 안색이 밝지 않았다.

자베르는 디텍티브를 비롯한 여러 마법을 펼쳐 보인 후 불릿에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포 백작님, 누군가 저희를 감시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내 분명 철저히 조사하라고 하였을 텐데?”

그의 말에 불릿이 성을 내려하자 서둘러 답변을 내놓았다.

“아닙니다, 분명 탐지마법엔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작은아씨의 대지의 축복에 의해 정화가 이루어지면서 대지에 스며들어있던 무언가가 사라졌기에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흙덩이가?”

“예, 그렇습니다.”

자베르의 대답에 불릿은 요정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반짝이는 가루를 흩날리는 흙덩이를 바라보았다.

샤랑, 샤라랑-.

“……흙덩이가 없었더라면 어찌 됐을지 암담하군.”

“죄송하지만 내일 떠나려던 계획을 수정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남아있는 듯 하기에….”

멋대로 예정을 변경하는 자베르였으나 불릿도 불안요소를 남겨두긴 싫었기에 그의 말에 동의했다.

“어차피 군대를 남겨놓을 것이니 그리하게. 단, 이번에도 놓치는 게 있으면 자네가 마탑의 인물이라 하나 엄벌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야.”

“물론입니다. 마나의 이름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마법사의 근본이랄 수 있는 마나까지 걸고넘어지자 불릿의 안색이 다소 풀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 *

쾅!

“아악! 짜증나, 짜증나!”

육감적인 몸매의 여성이 히스테릭을 부리자 튼튼해 보이는 실내의 이곳저곳이 부서져나갔다.

투둑, 투두둑!

콰광! 쾅!

“씨익! 씨익!”

본디지를 입은 여성은 짜증을 부리는 모습조차 색기가 넘쳐흘렀는데, 여왕님 포스가 줄줄 흐르는 것이 그쪽계열(?)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분을 풀던 여성은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는 남성을 노려봤다.

“뭘 봐, 이 멍청아!”

“……왜 그러시오?”

“몰라서 물어? 그 정령사가 살아남았잖앗!”

“…그렇소?”

“이익, 이 바보멍청이 얼간이가!”

퍽!

짜증이 난 여성이 그의 옆구리에 주먹을 날렸으나 남성은 신형을 뒤틀을 뿐 별다른 표정변화가 없었다.

“쿨룩쿨룩.”

…아프긴 한 모양이다.

그의 무미건조한 반응에 여성은 또 다시 짜증을 폭발시켰다.

“6영웅 좋아하시네! 할 줄 아는 거라곤 테크닉도 없는 허리 흔들기가 고작인 주제에! 이 멍청이, 멍청이, 조루고자멍청이 병신아!!”

“…….”

그녀의 폭언폭설에도 남성의 초점은 여전히 흐릿했고, 스스로가 감정을 발산시킬 낌새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마치 벽을 상대로 대화하는 기분이 들자 여성은 화를 내던 것도 그만두고 홀로 짜증을 부렸다.

“흥, 좋아. 그래봤자 하찮은 인간들, 본때를 보여주지.”

그녀는 풍만한 가슴을 교차시키고 있는 가죽밴드를 엄지로 당겼다 툭 놓으면서 혀를 낼름거리니 본래의 도도한 색기가 풍기기 시작했다.

“그 정령사만 없애면 돼, 정령사만.”

뭔가 또 사악한 계획을 세우는 듯한 여성, 아스타로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