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6 드러나는 실체 =========================================================================
올리비아의 침실로 들어선 불릿은 평온한 표정으로 잠든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뚜벅, 뚜벅.
그러나 가까이 갈수록 음영이 드리워진 얼굴은 바싹 말라가는 식물을 연상시켰는데, 이불을 걷어보니 가슴을 제외한 나머지 부위는 살점이 없어 너무도 앙상했다.
“올리비아 불쌍해….”
그와 같이 들어온 흙덩이도 비쩍 곯은 올리비아를 보며 옥구슬 같은 눈물을 흘렸다.
또옥.
불릿은 사람들이 들어왔음에도 좀체 잠에서 깨어나질 않는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서 입을 열었다.
“흙덩아, 정령력은 상관없으니 아끼지 말고 퍼부어줘.”
“훌쩍, 알았어!”
콧등이 붉어진 흙덩이는 올리비아의 상체에 엎드리며 치유능력을 발동시켰다.
“이젠 괜찮아, 아프지 마….”
우우웅!
방금 전의 유실리아 때처럼 강렬한 빛이 뿜어지더니 순식간에 혈색이 돋는 올리비아의 모습.
그러나 심각한 영양실조 탓인지 쏙 들어간 볼과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몸은 돌아오지 않았다.
신성력에 의한 치유나 힐링, 리커버리와 같은 마법, 그리고 흙덩이와 같은 정령술로 인한 회복방법도 부족한 영양분만큼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효과가 있었는지 소란스러움에도 깨어나지 않던 올리비아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으으응….”
“정신이 드는가, 올리비아?”
“누구….”
“나다.”
짧고도 간결한 대답. 하지만 이것만으로 그녀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번쩍!
“헉! 불릿!?”
상체를 일으키려던 올리비아는 자신의 상체를 누르고 있는 존재로 인해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
“올리비아, 괜찮아? 이제 아프지 않아?”
“으윽, 예, 예쁜이야?”
“응, 나야! 흙덩이야! 히잉-.”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이 기뻤는지 흙덩이는 올리비아의 품에 얼굴을 묻고서 마구 비비적댔는데, 올리비아는 자신보다 더욱 심각한 상태였던 흙덩이가 찾아온 사실에 놀랐다가 이내 푸근한 표정을 지었다.
스윽, 스윽.
“착하다 착해, 우리 예쁜이 착해. 이 언니가 걱정돼서 찾아온 거야?”
“히잉, 올리비아, 히잉.”
“다행이에요, 마님.”
“아가씨께서 일어나셨어, 흑흑.”
불릿과 세 명의 부인들이 모두 모이게 되자 침대 한켠에서 조용히 대기하던 안나가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도련님.”
“안나, 올리비아를 돌보아줘서 고맙다.”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는걸요, 도련님.”
올리비아의 상태를 호전시킨 것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나는 평소의 발랄함 없이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안나는 잘못 없어, 내가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려도 다 받아줬는걸?”
“……안나.”
“네, 도련님.”
불릿은 올리비아에게 짧은 입맞춤을 해준 후 그녀를 불렀는데, 이어지는 말에는 안나도 몸을 비틀거렸다.
“내 분명히 흙덩이에게 이상한 걸 가르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비틀-.
“도, 도련님?”
안나가 당황하건 말건 불릿은 자신이 할 말을 이어갔다.
“어리다고, 어리단 말이다. 사람들이 얘를 이상한 아이로 보면 어쩌려고 그런 걸 가르치냔 말이다!”
“흙덩이 이상해?”
자신의 얘기가 나오자 흙덩이가 고개를 갸웃하니 불릿은 그런 흙덩이의 눈물자국을 지워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니, 그냥 안나가 잘못해서 혼내주던 중이야.”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는데?”
“사랑스러운 아이로 보겠지.”
“헤헤, 사랑해, 불릿.”
“나도.”
순식간에 벽에 걸린 그림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저마다 어색한 웃음을 띠었고, 이러한 와중에 안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휴우, 조금만 해야겠다.(?)’
포기할 생각은 없는 듯한 안나. 그녀는 흙덩이를 자극해 불릿이 후계생산에 힘쓰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도를 모르는 불릿은 말려들 듯 흙덩이와 오순도순 장난을 치다 퍼뜩 정신을 차리며 올리비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그게 말이지.”
“내 병문안 온 거 아니었어? 쳇.”
언뜻 삐진 듯한 모습의 올리비아였으나 그녀는 줄곧 미소를 감추지 않고 있었다.
“…이제 몸은 안 아프고?”
“나보단 네가 더 아파 보인다만.”
“예쁜이랑 했지?”
“……어쩔 수가….”
“됐어, 그거가지고 뭐라 하는 거 아니야. 잘했어.”
“…….”
“나한테 뭐 해줄 말 없어?”
하체를 이불로 가린 올리비아였으나 분명 다리도 살이 없어 뼈만 드러났을 것이다.
불릿은 그런 그녀에게 얼굴을 다가가며 속삭였다.
“사랑한다, 미쳐도 좋을 만큼.”
그 말에 붉게 상기되는 올리비아의 얼굴. 목까지 피가 몰리니 순간 그녀는 현기증을 느끼는지 비틀거렸다.
“아….”
덥썩.
“넌 내꺼다. 내 허락 없이 죽을 생각은 하지도 말도록.”
“자기야….”
‘가볍군.’
지나칠 정도로 가벼워진 올리비아의 등을 쓸어 만지던 불릿은 이윽고 그녀의 입술을 탐해갔다.
“흐읍, 흐으응…!”
“쪼옥, 낼름낼름-.”
흙덩이완 달리 이번 키스는 자신의 타액을 듬뿍 묻혀가며 부드럽게 쓸어갔는데, 그 이유는 영양실조로 인해 바싹 마른 입술과 혀를 적셔주려는 생각에서였다.
그의 생각대로 된 것인지 올리비아의 단내를 풍기던 입에선 시간이 지날수록 향긋한 체취가 나오기 시작했다.
“츄르릅-, 츄읍, 츄읍, 츄읍.”
사탕을 빨 듯 그녀의 혀를 당기던 불릿은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을 입술로 슥 스쳐지나간 후 천천히 멀어져갔다.
“하악, 하악…, 너, 너무 거친 거 아냐?”
올리비아가 내뱉는 물음에 불릿은 싱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매만졌다.
“체력이 많이 약해졌군. 내 위에 올라타서 쥐어짜던 여자라곤 생각되지 않아.”
펑.
그 말에 감정이 터져버렸는지 고개를 푹 숙인 올리비아가 침대에 도로 누웠다.
풀썩.
“하아아…, 이제 어디 안 가지? 죽는 거…아니지?”
그토록 사랑이 듬뿍 담긴 키스를 받았으면서도 불안했는지 불릿과 연결된 손을 놓지 않는 올리비아.
불릿은 그런 그녀의 불안감을 해소시켜주기 위해 콧등을 부딪히며 달콤한 말을 건네주었다.
“빨리 나아서 아기 만들기 해야지. 올리비아의 아이라면 난 열이고 스물이고 낳고 싶다.”
퍼어엉-!
이번엔 아예 활화산처럼 울그락불그락 변해버린 올리비아의 얼굴은 병자의 안색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변해버렸다.
정수리에선 푸쉬쉭 연기가 올라오는 착각이 느껴질 정도로 창피해하는 올리비아.
“내가 낳지, 자기가 낳나?…하지만 불릿이 원한다면 괜찮을지도…….”
하지만 거절의사는 내비치지 않는 올리비아. 그녀가 받아들이는 듯하자 불릿은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농담이다.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너희와 사랑하고 싶거든.”
‘몸을 회복해야 마나로 자궁구를 둘러싸지.’
그러면서 불릿은 흙덩이에게도 정령력을 통한 피임법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나와 정령력으로 몸을 보호하듯, 정자 또한 공격(?)을 통해 수정시키니까.
* * *
불릿이 부인들과 만나는 시간이 길어져 점심때가 되어서야 가신들과의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신 불릿 폰 바포 백작께서 입장하십니다.”
평소라면 간략하게 소개하거나 생략했을 입장사에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이우우스 1급 행정관의 말에 자리에 착석해있던 모두가 일어섰다.
드륵, 드르륵.
처척.
전날 불릿의 임종을 보기 위해 모였던 대부분의 가신들이 참석한 회의이기에 회의실은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모두가 우렁차게 인사를 건넸다.
“만세만세 만만세!”
“바포 변경백이여 영원하라!”
“백작각하, 만세!”
“만세!”
저택이 떠나갈 정도로 우렁찬 외침에 그와 함께 입실하던 흙덩이가 귀를 틀어막았다.
“귀 아파, 머리 아파, 배 아파.(?)”
“배는 왜….”
불릿의 물음에 답한 것은 유실리아였다.
“오늘이 작은아씨의 그날이시거든요.”
“뭣?”
“히잉, 쿡쿡 쑤셔.”
그러면서 흙덩이의 안색이 나빠지자 불릿은 들어서던 것을 멈추고 흙덩이를 데리고 냉큼 밖으로 나갔다.
쾅!
“……?”
“어…, 뭘까요?”
“왜 갑자기 밖으로 나가시지?”
환호하며 그를 반겨주던 가신들은 어리둥절해했고, 유실리아도 영문을 몰라 제자리를 지키는 사이, 10분쯤 지나자 다시 들어오는 불릿.
끼이이…
“흠흠.”
조심스레 들어오는 불릿의 곁엔 어쩐지 얼굴이 붉어진 흙덩이가 엉기적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작은아씨?”
마침 기다리고 있던 유실리아가 흙덩이에게 물음을 건네자 흙덩이는 아랫배를 감싸며 울상을 지었다.
“불릿이 막 흙덩이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선 긁었어. 하얀 오줌 퓻퓻한 거 꺼내는데, 정령력으로 뭘 둘러싸라는데 몰라서 물으니까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서 닿은 곳에 막았어. 어렵고 힘들어, 히잉….”
휘이잉-
“…….”
“……….”
“작은…아씨? 불릿님?”
“…크흠.”
“방금 내가 잘못들은 건가?”
“쉿, 조용히 하게.”
“하지만….”
이상한 대화에 가신들이 웅성대자 불릿은 얼굴이 벌게져선 흙덩이에게 바싹 들이댔다.
“흙덩아, 제발 좀. 사람들 앞에선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그치만, 이상한 걸? 이거, 기분 좋은 거, 아기 만드는 거라던데 왜 빼내? 흙덩이랑 만들기 싫어?”
울먹거리는 흙덩이의 반응에 불릿은 급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주었다.
“그게 아니야, 아직 흙덩이는 어려서 나중에 만들고 싶어서 그래. 아기가 생기면 흙덩이랑 지금처럼 사랑하기 힘들어지는 걸?”
“아기 생기면 많이 못해?”
자신을 올려다보며 물기가 맺힌 눈을 드러내는 흙덩이에게 불릿이 작게 속삭였다.
“당연하지. 아기에게 신경도 써줘야 하고, 아기가 생긴 기간에는 거의 못 할걸?”
“그럼 나 아기 안 가질래. 올리비아하고 유실리아 있으니까 흙덩이 안 해도 되지?”
“어머, 작은아씨….”
유실리아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불릿은 시선을 돌렸다가 흙덩이에게로 다시 향했다.
“오빠의 아기 가지기 싫어?”
그의 물음에 흙덩이가 도리질을 쳤다.
“으응, 아니. 하지만 흙덩이한테 사랑 많이 못해주면 서럽고 슬퍼. 나중에 가지면 안 돼?”
“안되긴, 흙덩이는 나중에 가지자, 나중에.”
“헤헤, 역시 불릿이 최고야! 오빠 사랑해! 쪽!”
“으음.”
이런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지금 이 자리에서라도 당장 일을 치르고 싶었으나, 회의를 미루기엔 이미 밤새도록 한 상태이고 무엇보다 가신들이 쭉 지켜보는 상태였다.
이 이상의 애정행각은 공연음란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흙덩이와의 사랑놀이를 남들 앞에서 보여주긴 싫었기에 불릿은 입맞춤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 불릿이 자리에 앉자 미처 준비되지 않았는지 의자가 부족하자 흙덩이는 유실리아에게 의자를 양보하고 자신은 불릿의 무릎에 앉았다.
포옥-.
“헤헤, 여기는 흙덩이의 자리야!”
그 옆에 유실리아가 조신하게 치마를 접으며 앉았는데, 어쩐지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렇다고 그녀까지 무릎에 앉힐 수는 없었기에 불릿은 유실리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유실리아, 이따 밤에 보자.”
“네, 네?”
“흙덩이가 양보했으니 다음은 너야.”
화아악-.
“네, 네에…, 후훗.”
셋째부인이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항상 주눅들어있던 유실리아는 불릿의 말이 기뻤는지 수줍게 웃은 후 고개를 끄덕이며 흙덩이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녀의 인사를 받은 흙덩이는 마냥 좋은 듯 다리를 파닥이다 불릿의 품에 등을 파묻었고 말이다.
“헤헤.”
“대영주님, 후계를 생산하는 문제도 시급하긴 하오나 일단 회의를 끝내고 하심이 좋으실 것 같습니다.”
보다 못한 이우우스가 나서자 불릿도 기침을 뱉으며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큼큼, 지금부터 흑마법사 토벌에 대한 주제로 회의를 시작하겠다.”
모든 일의 원흉, 흑마법사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