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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정령사-172화 (172/241)

00172  죽음  =========================================================================

어둠, 그것은 인간 본연의 공포심을 부추기는 것.

한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짙은 어둠속이었으나 그는 이것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끝이로군.’

불릿은 살아남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낙담했다.

지난 10일간의 사투는 그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힘들었을지 몰랐다.

내부로 침투한 마기는 뼛속까지 스며들었고, 그것에 대항하는 것만으로도 정령력은 빠르게 소모되었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상급 정령사로 올라섰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그나마 있던 상급 정령사는 바람의 대리자 단 한 사람이었고 그녀도 최후의 결전에서 소멸되어 버렸다.

그녀조차 모래처럼 소멸됐던 것이 마기 때문인 것을, 내부 깊숙이 침투한 마기를 자신이 무슨 수로 제거하겠는가?

‘가신들이 실패한 모양이야.’

중간에 정신을 차리긴 했으나 들끓는 마기를 가두기 위해 일어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간간히 귓속으로 전해지는 대화엔 암울한 내용들뿐이어서 아예 정신을 딴 데로 돌려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으로, 방금 전 그녀들의 처절하고 애절한 음성을 들었으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남아있는 힘을 쥐어짜더라도 말 한마디 전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미안하다 올리비아, 유실리아, 그리고….’

잠시 생각이 멎는 불릿. 그는 언제나 해맑고 씩씩한, 그러면서 자신에게 애교로 보답해주는 그녀를 떠올렸다.

‘흙덩아, 정말 미안하다, 미안해….’

상급 정령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서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인간이 돼버린 흙덩이.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져 간신히 인간이 되었건만, 그래서 이어질 수 있게 되었건만 자신의 바보 같은 행동으로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그토록 조심한다고 다짐했건만, 놈들을 발견하게 되니 바로 달려들었어. 멍청하긴.’

조금 더 조심했어야 했다. 설령 흑마법사가 도주하더라도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예상정돈 했어야 했다.

그토록 조심하며 다니던 놈들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지하에 공동을 파놨을 리가 없었다.

자금이 모자라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불모의 황무지를 개간할 생각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땅의 정령사가 되어 흙덩이를 소환하고, 그래서 그녀와 함께 그곳을 향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인간이 되어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묻지도 않은 사실을 일러주지 않았더라면 지하에 놈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흥분한 상태로 방비도 없이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자신도 그곳에 뛰어들었다.

‘불속으로 뛰어든 나방과 같지.’

적어도 보호마법이라도 받았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으리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인방어마법을 받아서 육체와 정신을 보호하고, 정령사인 자신이 뒤에서 보조했더라면 쉽사리 끝낼 수 있었을지 몰랐다.

‘다 끝났다, 이젠 방법이 없어.’

빠르게 사라져가는 어둠,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점점 끊기고 있다는 사실에 불릿은 절망으로 가득했다.

‘올리비아도, 유실리아도 소중하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것은….’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기억들.

‘아아아…’

‘부울리잇…’

‘친밀, 친밀’

‘불릿이 좋아’

‘불릿은 이상하네에-?’

‘사랑하지 말라고 하지 말아줘….’

‘이제 나도 올리비아처럼 할 수 있어!’

‘사랑해, 불릿!’

‘안아줘…’

‘헤헤, 사랑해.’

‘사랑해!’

‘불릿의 아이를 낳고 싶어.’

주르륵.

정신으로 이루어진 세계였으므로 눈물이 흐를 리가 없었으나 그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발, 아무나 좋으니까 살려달라고!’

모든 것을 포기하며 자신만 바라보던 가녀린 소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마지막 생각이 끊기려던 찰나, 자신도 낼 수 없었던 정신세계에서 뚜렷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우리 아이가 그리도 좋으신가요?”

* * *

“으흐흑!”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아…아아악!!”

유실리아는 자신을 안아주던 불릿의 커다란 손을 매만졌고, 올리비아는 힘없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선 소리를 질러댔다.

바포가의 레이디가 보이기엔 다소 천박한 장면이었으나 그 누구도 그녀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이제야 기껏 살만해졌나 싶었더니 대영주란 위치에 있으면서도 가장 노력했던 인물이 돌연 죽어버렸다.

모두가 암담해하는 가운데, 누군가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이에 대꾸하였다.

스윽, 스윽.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군.”

“?!”

흠칫!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올리비아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몸이 굳어버렸다.

유실리아도 있을 수 없는 온기에 부르르 떨더니 그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인다.

“아무리 나라도 가신들 앞에서 대놓고는 못하는데 말이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농이었으나 흐려진 올리비아의 시야에는 평소 믿지도 않던 신에게 그토록 빌던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는 소리는 나하고 있을 때만 해도 되지 않나?(…?)”

부르르…, 부르르-!

왈칵!

올리비아는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불릿!! 불릿, 불릿!!”

“몸이 많이 상했군. 늦어서 미안하다.”

불릿, 죽은 줄 알았던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던 것이다!

이 믿기지 않는 광경에 주변의 가신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우르르르!

“각하! 이 무슨?!”

“살아나, 살아났?? 자베르, 의사!”

“뭐당가냐!(?)”

“귀신아 싸우자!(??)”

급히 의사와 마법사를 부르는 가신들, 그러나 의사와 자베르는 이미 진찰을 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허어…, 백작님, 잠시 동공을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유실리아가 잡고 있는 손목을 낚아챈 의사가 맥박을 확인한 후 의사를 묻자 불릿이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하게. 할 일이 많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스윽.

스으윽-.

불릿의 옥체에 손을 가져다댄 의사가 손가락을 이리저리 흔들며 무언가를 확인하고, 청진기로 심박까지 확인한 후 물러나며 허탈해했다.

“허허, 이 무슨…, 분명 내 진찰은 틀리지 않았건만.”

“저리 비키게! 음, 턴 언데드!”

화악!

“이 무슨 짓인가, 자베르!”

“당장 이 마법사를 포박하라!”

침실주인의 허락도 없이 공격마법을 발동하는 자베르를 가신들이 둘러싸자 이를 불릿이 급히 제지했다.

“그만 됐네. 자베르, 자네는 본인이 흑마법사의 수작에 놀아난 것은 아닌가 의심했던 거겠지?”

“…후우, 죄송합니다. 아무 이상도 없군요.”

턴 언데드는 죽은 자를 무로 되돌리는 기술, 그러니 만약 불릿이 흑마법사의 마법으로 좀비나 구울처럼 되살아난 것이라면 먼지로 화해 사라졌을 것이다.

자베르의 검증까지 끝나자 잠시 물러나 있던 올리비아와 유실리아가 와락 품에 안겨들었다.

“나쁜 놈, 나쁜 놈!”

“왜 이제야 일어나셨어요, 왜에…흐윽!”

퍽, 퍽.

올리비아가 주먹을 연신 내려쳤으나 힘이 하나도 실려있지 않았기에 아프지 않아야 했으나, 불릿은 아파했다.

“미안하다.”

“나쁜 놈, 나쁜놈!…하지만, 사랑하는 사람….”

툭….

그녀의 주먹질은 아래로 떨어지더니 이내 불릿의 품에 안겨 흐느끼기 시작했다.

“으흐흑!”

“흐윽, 흐윽….”

이미 심각할 정도로 체력이 저하된 올리비아였기에 더 이상 울었다간 이번엔 그녀가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결국 아일렌이 앞으로 나서 그녀의 현황을 불릿에게 알려주었다.

“각하, 회복되신 것은 축하드릴 일이오나 마님의 용태가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그래 보이는군.”

올리비아를 품에 안아보니 확연히 알 수 있는 그녀의 건강상태. 얼마나 말랐는지 그의 작은 손길에도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유실리아는 그나마 조금 나아보였으나 그녀 또한 무너지기 직전인 상태.

이에 불릿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올리비아, 진정이 좀 됐소?”

그의 말에 올리비아도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비쩍 마른 몰골임에도 그녀의 미모는 어딜 가지 않았으나 너무도 애처로워 보여 절로 손이 갔다.

불릿의 머리와 등허리까지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올리비아는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대꾸했다.

“이 정도로 괜찮을 리가 없잖아….”

“기껏 본인이 회복됐는데 이번엔 당신이 쓰러지면 내 억장이 무너지오.”

스르륵, 스르륵.

그는 올리비아의 비쩍 마른 등허리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다 그녀의 가슴부근을 한번 쿡 찔렀다.

“앗.”

“그러다 가슴의 살까지 빠지겠다,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알잖아?”

“…바보.”

어느새 그녀는 울음을 그치고 얼굴을 붉히고 있었는데, 다정한 그의 품에 안기자 긴장이 풀렸는지 스르르 눈이 감기고 있었다.

“한숨 자고 아침에 보자.”

“…어디 가지 마….”

“쉿, 일단 몸부터 회복해.”

“…사랑해.”

“나도.”

쪽.

짧은 입맞춤을 끝으로 올리비아는 그에게 기댄 채로 잠들어버렸고, 불릿은 그녀를 자신의 침상에 재우고서 유실리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생이 많았다. 네가 그녀들을 돌보았겠구나.”

“아니에요, 불릿님.”

유실리아는 애써 슬픔과 기쁨을 감추려고 손수 눈물을 훔쳤는데, 불릿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선 자신의 소매로 대신 닦아주었다.

스윽-

“예쁜 얼굴이 다 망가졌군. 이런 경우는 첫날밤을 제외하곤 처음인가?”

화아악-

“모, 몰라요….”

불릿의 농에 유실리아가 고개를 푹 숙였는데, 그것은 처녀상실의 고통 때문에 찡그러졌던 그녀의 표정을 말했기 때문이다.

항상 불릿의 앞에서는 예뻐 보이고 싶었던 유실리아이기에 이런 그의 농은 감당하기 버거웠다.

그래도 10일 만에, 그것도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되살아났으니 조금이라도 보기 위해 힐끔힐끔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이에 불릿은 자신의 얼굴을 훔쳐보는 유실리아의 다른 것을 훔쳤다.

“츕-, 츄릅, 쪼옥….”

“으응, 으으응….”

혀를 간질이다 입안 깊숙한 곳으로 침투하는 불릿의 숨결에 취한 유실리아는 잠시 정신이 멍해졌는데, 불릿은 살며시 입술을 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

퍼어엉…

“아아아…….”

유실리아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저앉으려하자 불릿은 그녀 또한 올리비아와 같이 나란히 침상에 눕히고서 말을 건넸다.

“잠시 자고 있어. 내일은 할 일이 많을 테니까.”

“하지만, 조금 더 불릿님을 보고 싶어요.”

자신의 말이라면 토를 달지 않던 유실리아가 어리광을 부리자 그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

“지금은 내가 더 건강하니까 한숨 푹 자둬. 내일 밤은 자고 싶어도 못 잘 테니까.”

펑!

얼굴이 새빨개진 유실리아는 가신들이 쳐다보고 있음을 깨닫고 이불을 눈밑까지 끌어올리고선 작게 속닥였다.

“…작은아씨께도 해주세요, 지금 많이 아프신 것 같아요.”

“물론이지.”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유실리아도 스르르 잠에 빠져들고, 불릿의 침실엔 두 여인이 곤히 수면에 들어섰다.

그녀들이 잠드는 것을 확인한 불릿은 숙였던 허리를 펴며 주변의 가신들과 하녀들에게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가신들은 지금 이 시간부로 흑마법사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주변 영지들로부터 협조를 구한다. 토벌령 발동 전까지는 자세한 사항을 알려주지 말 것이며, 협조를 거부하는 자들은 흑마법사의 끄나풀은 아닐지 경계해야할 것이다.”

불릿이 왜 목소리를 낮추는 것인지 아는 가신들이었기에 모두 한 마음이 되어 고개만 끄덕였고, 불릿도 이어서 말을 했다.

“밴 있는가?”

“여기 있습니다, 주인님.”

“도련님, 흑흑흑!”

바로 튀어나온 늙은이는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는데, 언제나 침착함을 고수하던 그라곤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밴의 옆에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하녀장인 안나가 다가와서 손수건을 적시고 있었다.

“안나는 올리비아와 유실리아를 간호하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이야기할 터이니 가신들이 머물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라.”

“예, 주인님.”

“알겠어요, 흑흑.”

순식간에 명령을 내린 불릿이 서둘러 방문을 나서자 가신들이 우르르 따라나서려 했으나 불릿이 이를 거부했다.

“자네들은 잠이나 자두게, 내일부턴 바쁠 것이니. 나는 흙덩이에게 갈 테니 따라오지 말고.”

“…예?”

“그 무슨, 홀로 내버려두실 수 없습니다!”

또 다시 불릿에게 사고라도 일어날까봐 걱정되어 나서려하자 불릿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다시 거부했다.

“흙덩이도 몸을 회복해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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