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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정령사-171화 (171/241)

00171  죽음  =========================================================================

중천에 떠올랐던 해는 어느새 저물고 노을이 되었으며 그것이 깜깜한 밤으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제발 오지 않았으면 싶은 밤 12시가 가까워지자 그동안 접근을 불허했던 불릿의 침소에 중요 가신들이 모였다.

“…….”

“흑흑….”

“후우, 답답하군, 답답해.”

누군가는 침묵을, 누군가는 흐느낌을, 또 누군가는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며 지금 이 순간에도 괴로워하는 불릿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가장 괴로워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다름 아닌 불릿의 여자들이었다.

“불…릿….”

유실리아의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그가 누워있는 침상에 다가온 흙덩이는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슬픔을 드러냈다.

“왜…누워있어…, 응? 나랑 놀아야지…….”

병색이 완연한 흙덩이가 애처롭게 그의 품에 안겼으나 불릿은 그런 그녀를 안아주지 못했다.

그가 움직이질 않자 흙덩이는 불릿의 움직이지 않는 손을 억지로 쥐고서 자신의 머리에 올려놓았다.

스윽…, 스윽….

“쓰다듬어줘…, 만져줘…, 뽀뽀도 해줘….”

그러나 흙덩이는 그것만으로도 지쳤는지 손에 쥐고 있던 불릿의 손은 힘없이 침상으로 떨어졌다.

툭.

“정말…안 일어나…?

주륵-

웃음이 가득해야할 얼굴은 눈물로 젖어들기 시작했고,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올리비아가 성큼 다가왔다.

비틀, 비틀.

“마, 마님.”

그녀의 뒤로는 빼빼 마른 올리비아를 부축하고 있던 아일렌과 루나가 있었는데, 차마 앞으로 나서진 못했다.

이것이 불릿과 그녀들의 마지막일 수 있었기에.

힘겹게 스스로의 의지로 다가온 올리비아는 침상에 쓰러지듯 기대고선 인사불성 상태인 불릿의 가슴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퍽.

“일어나.”

퍽-, 퍽-

“일어나라고.”

얼마나 힘이 없었는지 솜방망이로 때리는 듯한 충격을 주었는데, 옆에서 흐느끼는 흙덩이를 보고서도 꾹 참아내던 가신들이 고개를 돌려버릴 정도였다.

“제발 일어나라고!”

퍽.

한껏 갈라진 성대와는 다르게 그를 내려치는 주먹엔 여전히 힘이 실리지 않았다.

자신의 힘도 감당하지 못해 올리비아가 옆으로 넘어지려하자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던 유실리아가 그녀를 잡았다.

덥석.

“마님….”

“유실리아, 불릿이 안 일어나. 빨리 깨워줘.”

유실리아는 자신에게 안기고서도 불릿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깨워달라는 그녀의 말에 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대답은 해주어야 했기에 울음을 미뤄두고 입을 열었다.

“마님, 불릿님의 가시는 길이에요. 체통을 지켜주세요.”

“아니야, 유실리아. 깨우면 일어날 거야. 넌 아직 안 해봤지? 빨리, 빨리 해봐, 빨리.”

‘그새 또 마르셨어.’

그토록 매력적이던 여성이 한순간에 망가지는 것을 목격한 유실리아는 올리비아를 똑바로 세웠다.

“마님…, 그럼 저도…저, 저도 불릿님에게 이별인사를 할….”

꾸욱.

“게요….”

그나마 불릿의 여자들 중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유실리아였으나 그녀라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 황급히 하녀들이 올리비아를 받아내려 했으나 올리비아가 발광했다.

“이거 놔! 볼 거야, 볼 거란 말이야아!!”

“어, 어쩌죠?”

“셋째부인님….”

격렬하게 저항하는 올리비아의 행동에 하녀들이 겁을 집어먹으며 유실리아를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불릿 대신 올리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스윽.

“마님, 그럼 함께 보시겠어요?”

“빨리 해봐, 어서! 그렇다고 뽀, 뽀뽀는 너무 오래하면 안 돼?”

올리비아의 충혈 된 눈을 보자니 울컥 치솟는 마음을 억누르기 어려웠으나 유실리아는 잘도 참아내며 불안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네에-, 그럴게요, 조금만, 조금만 할게요. 마님….”

사력을 다해 감정을 억누른 유실리아가 불릿에게 다가가니 흙덩이는 우는 것만으로도 체력이 방전됐는지 신음을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으으…, 부울리잇….”

유실리아는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그토록 아꼈던 작은아씨와 함께하라는 마음에 흙덩이를 번쩍 들어 올려선 불릿과 함께 이불 속으로 넣어주었다.

“부인, 그러시는 것은….”

의사와 함께 자베르가 다가와 이를 말리려 했으나 유실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부디 내버려두세요. 추억마저 없으면 어떻게 살아가나요?”

애틋한 그녀의 음성에 레이디의 눈물에 약한 남성들은 흑마법사를 욕하기도 했고, 공적인 자리임에도 손수건을 꺼내 코나 눈을 닦기도 했다.

이젠 작은 충격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불릿이었으나 자베르는 끝내 유실리아를 말리지 못했다.

어차피 이젠 더 이상 방법도 없었으니까.

자베르까지 물러나자 군단장인 레너드 자작까지 말리지 않고 지켜보는 가운데 유실리아가 불릿과의 마지막 이별인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스윽.

의자에 앉은 유실리아는 흙덩이나 올리비아와는 다르게 침착하게 말을 뱉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네요.”

“…….”

대답을 원하고 한 것은 아니지만, 굳게 닫힌 눈꺼풀과 입은 적을 막기 위한 성문처럼도 보였다.

흔들리던 유실리아의 눈동자는 간신히 제자리를 찾으며 독백을 이어갔다.

“기억하시나요, 제가 떼를 쓰던 그때를?”

그 말을 시작으로 유실리아는 불릿과의 갖가지 추억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이야기, 식사하던 모습이 멋있었다는 이야기,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는 게 그토록 늠름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

묵묵히 자신의 추억을 꺼내놓는 유실리아의 잔잔한 음성에 몇몇 가신은 차마 견디지를 못하고 방을 뛰쳐나갔다.

“제기랄, 도저히 못 보겠군!”

“나중에 알려주시오. 지금은, 지금은 받아들이기가 힘드오.”

벌컥!

그들이 방을 나서자 약간 비좁았던 침실은 여유공간이 생겨 후끈해지던 열기가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실리아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를 흘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행복했지요? 서로 좋아한 것, 맞지요?”

떨리는 음성, 유실리아도 더 이상은 울음을 참기가 힘들었는지 떨어져 내리는 액체의 양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

투둑, 툭.

“같이 소풍가고 싶었는데, 아직 웨딩드레스도 못 입어봤는데, 불릿님의 턱시도차림도 참 멋있을 것 같았는데, 그런데….”

투두두둑, 뚜둑, 툭!

이젠 홍수가 되어버린 눈물은 멈출 수가 없었다. 유실리아도 감당이 안 되는 감정이 폭발해버린 것이다.

“사랑했잖아요, 좋아했잖아요! 밤마다 속삭여주던 사랑하단 말은 왜 못하시고 누워만 계세요!”

양손을 가슴에 꼭 그러모으며 애절하게 빌었으나 불릿은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마님도, 작은아씨도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제발, 제발 다시 한 번 말해주세요….”

유실리아는 불릿의 곁에 나란히 누워 잠들어버린 흙덩이의 이마를 넘겨주었다.

“저는 몰라도 작은아씨를 홀로 남겨두셔선 안 되잖아요…? 당신 없이 이 가엾고 연약한 분이 어찌 살아가나요….”

“자기야…, 자기야….”

자신의 말에 반응해 정신을 잃은 상황에서도 불릿을 찾아대는 흙덩이를 보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흑흑, 여보! 사랑한다고 다시 한 번 말해주세요! 당신 없이 작은아씨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라고요!”

“…….”

그럼에도 불릿은 일어나지 못했고, 결국 새벽 1시가 되어서 의사가 그들의 틈에 끼어들었다.

“자네가 먼저 진찰해보게.”

“알겠습니다.”

의사는 자베르에게 양해를 구한 후 불릿에게 다가갔다.

그의 진찰을 위해 가신들이 세 여인을 불릿에게서 떼어놓았는데, 그 과정에서 한바탕 눈물바다가 일어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의사가 청진기를 몸 곳곳에 가져다보고 손으로 주물주물, 나중엔 바늘까지 꺼내 몸을 찔러보았는데 무슨 실험이라도 하는 듯했다.

자신의 할 일이 끝났는지 의사가 도구를 챙긴 후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새벽 1시 21분, 사망하셨습니다.”

“아니야아!!”

“그럴 리가 없어요, 사실 수는 있다고 하셨잖아요?!”

미쳐가면서 죽거나 그냥 죽거나 라고 했지만 올리비아는 그 부분은 생각도 하지 못한 듯했고, 유실리아는 그 점을 떠올렸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비켜보게, 이번엔 내가 확인해보도록 하지.”

“죄송합니다.”

의사는 주섬주섬 도구를 챙긴 후 가신들 틈으로 섞여들었는데, 그녀들을 볼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도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게 주업인 자인지라 아무것도 못했다는 점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리라.

자베르는 의자에 앉자마자 치료마법부터 펼쳐보였다.

“힐링, 리커버리.”

발동과 동시에 요정의 날개가루가 스며들 듯 불릿에게 흡수되는 마나.

그러나 반응은 여전히 없었고 그는 곧이어 다른 마법도 펼쳐보았다.

“큐어. 큐어 포이즌, 하트 비트.”

쿵, 쿵.

하트 비트라는 마법은 심정지가 이루어진 자에게 사용하는 기술이다.

골수까지 스며든 마기로 인해 가망은 거의 없었으나, 일단 목숨이라도 이어놓으면서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었기에 자베르는 필사적으로 마법을 펼쳤다.

쿵, 쿵, 쿵.

억지로 심장을 뛰게 만들자 창백해져가던 불릿의 피부에 생기가 감도는 듯했다.

쿵, 쿵…, 쿵……

쿵…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법이 멈추자마자 빠르게 창백해지는 피부를 보며 자베르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젠장.”

짧은 욕설을 내뱉은 그는 불릿의 몸에 마나를 흘려보냈다.

스으응…

자칫 마기를 자극할 수 있는 위험한 방법이었으나 이것을 제외하곤 더 이상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도박이라 여기며 마나를 주입했다.

스으으… 우우웅…

현재 대륙의 마법사와 정령사의 수준이 한 단계씩 하락했다고 하지만 그는 한 지역의 지부를 담당하는 마법사.

5단계로 이루어지는 등급 중에서 극소수만이 얻을 수 있는 플래티넘 다음가는 실력자인 골드급의 마법사였다.

게다가 같은 골드급이라도 한수 수준 높은 게이트웨이학파의 출신인지라 그의 마법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그런 자베르의 마법에도 불릿의 몸은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고, 결국 마나를 퍼붓던 자베르도 손을 떼었다.

“제기랄, 젠장, 빌어먹을.”

불릿이 죽으면 단순히 한 명이 죽는 선에서 끝나는 게 아닌, 영토 전역으로 혼란이 확산되어 바포 변경백은 제 2의 혼란기를 겪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직스 자작과 같은 반역자가 나오거나 구심점을 잃은 가신들은 서로 연동하지 않고 자신의 영역에 틀어박혀 점점 힘을 잃어가리라.

직스 자작, 지금은 카텐령이 된 이곳에 오래 머물고 있는 자베르도 얼굴을 알고 지내던 주민들이 거지꼴이 되던 것에 마음아파 했기에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안 된다.

“…새벽 1시 21분 사망, 마탑지부 자베르가 승인하는 바이오.”

의사의 말에 동의하는 자베르. 그러자 하녀들에게 부축을 받고 있던 올리비아와 유실리아가 뛰쳐나왔다.

“불릿, 불릿!”

“이리 가실 수는 없잖아요!”

유실리아도 담담하고자 했으나 감정이란 것을 냉정히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대영주인 불릿도 힘든 바였다.

그녀들이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사이, 옆쪽의 방에 옮겨진 흙덩이의 감겨진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주르륵.

“불…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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