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4 불모의 황무지 =========================================================================
충분히 흙덩이를 만끽한 불릿은 다시 자베르에게 물음을 건넸다.
“마검사라서 감사해야한다고 했나?”
“쩝쩝. 그렇습니다, 백작님.”
뭔가 입맛을 다시는 자베르였으나 애써 무시하는 불릿은 그의 말에 경청하기 시작했다.
“아마 저희가 걸린 암시는 마나의 종류로 구분했던 것 같습니다. 대표적으로 기사의 마나홀, 마법사의 써클, 그리고 정령사의 정령력말입니다.”
세 가지 다 마나의 한 종류로 분류되긴 했으나 용도에 따라 차이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저렇게 나눠놓았다.
“저희가 사용하는 마나를 무엇과 비유할 수 있는지 아십니까?”
“…비유할 만한 게 있는가?”
설명을 하다말고 질문을 걸어오는 자베르에게 불릿은 딱히 내놓을 만한 답을 떠올릴 수 없었다.
대체 세 종류의 마나를 무엇과 비유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떠올리기도 쉽지 않았는데, 자베르는 지식을 탐구하는 마법사답게 즉시 답을 내놓았다.
“우리가 사용하는 마나, 그것은 혈액형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혈액형? …피라니,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잘 들어보시지요. 사람의 혈액형은 A, B, O, 그리고 AB가 있습니다. A, B, O는 각기 개성을 갖고 있지만 A와 B는 하나로 합쳐질 수 있지요. 그것이 바로 AB형, 마나와 비유하자면 마법사와 검사지요.”
“……O는?”
“정령술이 다른 마나와 화합할 수 있다는 것은 역사적 사례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O로 비유한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비유이니 혈액형에 집착하지 마시길.”
뭔가 억지 같았으나 자신은 마땅히 떠올리지 못했기에 그러려니 했다.
“사실 혈액형이 중요한 것은 아니고, 지금 설명드리는 암시마법이 세 종류로 나뉜다는 것을 알려드리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놈들이 펼쳐놓은 암시마법은 A, B, O의 대표적 성질 3가지는 포함이 되어있었지만 A와 B가 혼합된 형태인 AB는 충돌이 이루어져 암시마법의 영향에 놓이지 않았다고 한다.
애초에 제노시스는 불릿이 귀환하기 전까지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인물이었기에 아무리 조사를 했다한들 여간 알아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마나회로가 다른 이들보다 한층 복잡한 제노시스였기에 암시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인데, 아마 그가 아니었더라면 그들은 땡볕아래 매우 지친 몸을 이끌고 전투를 치뤘을지 몰랐다.
마법이 더위는 가시게 해줄지 몰라도 체력소모까지 보충해주진 않았으니까.
“정말 귀신같이 펼쳐놓았군. 대체 언제쯤 그런 마법을 본인의 영토에 해놓은 것인지 짐작이 가나?”
만일 그렇다면 불릿이 암시에 걸린 것은 국경선 인근이라는 뜻인데, 그러한 마법이 영구적으로 펼쳐져있을 리는 없었으니 바로 얼마 전에 설치가 됐다는 뜻이다.
아니, 설치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누군가 마법을 발동했을지도 몰랐다.
둘 중 무엇이 된다고 한들 자신이 이를 모를 수가 없었기에 의문은 더해만 가고 있었기에 자베르를 쳐다보는 불릿이었다.
“개간작업을 시작하셨을 당시, 또는 자이언트 스콜피온이 습격했을 때, 그때를 제외하면 국경선 인근에서의 움직임은 없었으니 틈을 노린다면 그때일 것입니다.”
톡, 톡, 톡.
불릿은 자베르의 의견에 흙덩이의 배꼽부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고민에 사로잡혔다.
‘개간작업을 시작할 당시엔 진입하기도 전부터 말에서 내리자고 한 것은 나였다. 그러니 그때는 아닐 것이다.’
국경선 인근에 마법이 펼쳐졌다면 적어도 그곳의 근처에 있었어야 암시에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사전에 얘기된 것은 그곳이 아니었기에 불릿은 사건의 초점을 몬스터의 습격으로 돌렸다.
톡.
그는 원피스를 파고들며 흙덩이의 배꼽부위를 누르는 손가락도 잊은 채 입을 열었다.
“자이언트 스콜피온의 습격, 그때가 정확할 것이다.”
“백작님, 마법사인 제가 마법에 걸렸었기에 죄송하긴 하지만 신중히 떠올리셔야 합니다. 그래야 놈들이 무슨 수작을 벌이려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그들이 향하는 곳은 흑마법사가 숨어있다고 여겨지는 은거지, 그러나 지금까지 암시에 걸려 놈들의 수작대로 움직였다 친다면 위험한 함정에 빠질 수도 있던 것이다.
이대로 강행할지, 아니면 후퇴하여 나중을 도모할지는 지금 이 순간, 온전히 불릿의 몫이었다.
그때, 흙덩이가 눈을 떴다.
“우웅, 자기얌….”
“어, 응. 왜 그러니?”
시끄럽게 해서 흙덩이를 깨웠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부터 든 불릿이 그녀를 내려다보자 흙덩이가 그 커다란 눈망울을 끔뻑이며 입을 열었다.
“나 배꼽. 불릿이 콕하고 찌르고 있어. 쌀 것 같아.(?)”
“앗, 미, 미안하구나.”
“괜찮아. 아, 뗐네? 헤헤. 이제 안 마려워.”
배꼽을 압박하면 소변이 마려워지기에 흙덩이를 깨운 것은 불릿의 탓일 것이다.
아까 전에도 연약한 흙덩이를 땡볕에 노출시켜선 힘들게 걷게 했던 것 때문에 잠시 쉬게 했던 것인데, 그녀의 낮잠을 방해했으니 불릿은 자신의 가녀린 소녀가 깼다는 사실에 미안했다.
“좀 더 잘래?”
무슨 선택을 하든 아직까지 흙덩이가 나설 일은 없었기에 불릿이 상냥하게 묻자 그녀는 조막만한 손으로 자신의 배에 불릿의 손을 올려놓고서 긴 속눈썹을 닫았다.
“배 문질러줘….”
스르륵, 스르륵.
“이따가 깨워줄게, 잘 자.”
“새액…, 새액….”
원피스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손길에 만족했는지 한가득 미소를 머금고서 잠이 드는 흙덩이.
그녀가 잠이 들자 불릿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베르를 바라보았다.
“…자중하도록 하지.”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애정행각을 하는 것은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였기에 꺼낸 말인데, 자베르는 얕은 기침을 뱉더니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백작님이 40넘어 얻으신 소중한 아내분이신데 충분히 이해합니다.”
“주책 같나?”
말을 하면서도 배를 문지르는 손길을 멈추지 않는 것이 주책이라 하더라도 그만둘 것 같진 않았다.
“아내분들이 하나같이 아름다우신데 아무렴 어떻습니까? 그렇게 미모가 빼어나시면 그럴 만도 하지요. 영웅호색이라고 하잖습니까?”
“……그런 표현은 좀 그렇군. 마치 본인이 변태라도 되는 것 같잖은가.”
“…? 죄송하지만 아내분들의 나이가 다들 20도 안 되는 걸로 아는….”
“커험!…흙덩이는 본인도 모르네.”
“?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제 어엿한 성장기의 소녀이신데.”
자베르는 지부장이 될 정도로 눈썰미가 좋은 마법사, 저번보다 성장한 흙덩이의 육체를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노골적인 그의 말에 불릿은 차마 크게 외치지도 못한 채 흙덩이의 배만 슬슬 문지를 뿐이었다.
* * *
결국 불릿은 함정일 수 있다는 생각에 카텐령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시작할 당시부터 놈들의 수작에 놀아났다는 생각에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언제나 침착해야하는 군주의 입장이었기에 애써 화를 가라앉혔다.
‘제기랄, 확실히 이상하다 싶었다. 일열횡대로 예고도 없이 나타나는 몬스터라니? 습격이랄 것도 없었고, 인간의 군대도 아닌데 속도를 맞춰서 다가올 필요도 없었어.’
서식지역도 아닌, 아무것도 없어야할 불모의 황무지에 몬스터가 갑자기 나타날 수도 없는 것이다.
뭔가 습격을 하려면 기습적으로, 그리고 그것보다 훨씬 더 많고 위험한 놈들도 구성했어야 했다.
‘밤 스티드처럼.’
살아있는 마기의 폭탄인 밤 스티드는 마계의 생물이라는 점과 말이라는 특성을 지녀 빠르면서도 잘 죽지 않아 위험하기 그지없는 놈이었다.
그래서 불릿이 중대를 보호하려다 탈진해서 실신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한 번의 위기를 넘겼다고 조금 태연자약했던 면이 있었다.
사실 밤 스티드가 나타났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자신들은 어째서 말을 타지 않았는지를, 걷는 데에 열중했는지를.
‘그렇다고 병력을 더 부를 수도 없고.’
실체가 드러난 적이 나타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몬스터와 등급책정도 안 된 마물이 나타났을 뿐이다.
흑마법사의 소행으로 추정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기간 병력을 체류시킬 자금은 더 이상 없다.
그래서 자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모의 황무지를 개간하려던 것인데, 일이 꼬였다.
그가 탁자에서 기댄 채 고민하는 사이 뒤에서부터 올리비아가 불릿의 등을 감싸왔다.
스륵-
“뭐해, 자기?”
“…깼나?”
지금은 늦은 밤. 더 이상 뭔갈 하기엔 시간이 맞지 않았기에 간단히 회의를 마친 불릿은 다음날 다시 고민해보기로 하고 모두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전날 밤은 흙덩이와 유실리아, 두 사람과 응응(?)을 했기에 오늘은 올리비아와 합방한 것이다.
오밤중에 잠도 자질 않고 홀로 탁자에 기대 고민하는 불릿이 걱정됐는지 그녀는 얇은 실크드레스에 가슴이 짓눌리는데도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흑마법사 때문에 그래?”
“어영부영 돌아왔으니까, 신경이 쓰여.”
꼬리를 밟았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함정이었다. 아니, 언제 놈들의 수작에 걸려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정교한 함정이었기에 까딱하다간 당할 뻔했다.
그래서 분한 마음과 아직도 처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잠 못 이루던 것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올리비아마저 잠에서 깨버렸던 것이다.
“난 놈들을 잡아야 해. 동료들을 쥐새끼 때문에 잃어버렸어.”
영토로 돌아오면 소식을 찾아보겠다던 불릿이었으나 현실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그는 한 영토의 대영주였고, 그의 영토는 무너지기 직전까지 가있었다.
자신만 오매불망 기다리던 백성들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개인적인 감정을 최대한 억눌렀었는데, 점점 지쳐가는 자신을 보듬어준 세 명의 여인들에게 사르르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래서 모르는 척,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하며 스스로를 다독였었는데 이번 일을 통해 그게 되살아난 것이다.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이기에 수치스럽기도 하고, 동료를 벌써 잊었냐는 인간으로서의 죄악감도 있었다.
그래도 술에 취한 채 잠들긴 싫었기에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고민하던 도중이었는데….
“자기야, 자기는 너무 혼자서 고민하는 경향이 있어.”
“…내가?”
“응. 자기 탓이 아닌걸. 그런데도 혼자 괴로워하고, 아파해.”
불릿은 뒤에서 껴안은 채 고개를 어깨에 올린 올리비아의 볼을 쓰다듬으며 속삭임을 들었는데, 고요한 밤이라서 그런지 그녀의 말은 한층 달콤했다.
“이젠 우리가 있잖아, 응? 괴로운 일도, 슬픈 일도, 또 기쁜 일도. 함께 나눌 수 있는걸?”
“올리비아….”
“흐으응.”
올리비아는 비음을 흘리며 불릿을 더욱 꽉 껴안았는데,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녀의 두 융기가 불릿의 등을 더욱 꽉 조여 매고 있었다.
“비록 우리가 큰 힘은 못되어주더라도 고민은 들어줄 수 있잖아? 그러니까 혼자 고민하지 말고 말해줘, 듣고 싶은걸? 불릿의 고민.”
가족이라면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이기에, 그래서 더욱 소중한 것이 아닐까?
“너무 자책하지 마. 너는 언제나 힘내고 있고, 모두가 너를 존경하고 있어. 그리고….”
올리비아는 조용한 입맞춤을 떼며 그의 어깨에 걸친 얼굴을 불릿의 볼에 비볐다.
“이렇게…사랑해, 오빠.”
사랑한다고 해서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그걸 모른다. 알더라도 서운한 감정은 쌓이게 될 테고, 그것은 곧 파탄을 불러올지도 몰랐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첫 사랑이 불릿이라는 점에서 행운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자신의 감정을 숨기진 않았으니까.
그녀의 위로에 생각이 정리된 불릿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올리비아를 번쩍 안아들었다.
“앗!”
“사랑한다고 했나?”
이미 여러 번 말했고, 방금도 말했지만 여전히 입 밖으로 꺼내면 부끄러운 그 말에 올리비아는 손을 가슴에 모으고선 작게 끄덕였다.
“응…, 사랑해….”
“그럼 그 사랑에 보답해주어야겠군.”
그러면서 불릿은 침대로 올리비아를 던져놓았다.
풀썩-.
“꺅.”
스륵, 스르륵.
불릿은 상체부터 벗어재끼며 침대에 눕혀진 올리비아에게로 다가갔는데, 그의 눈에선 어떤 욕망이 번뜩이고 있었다.
“잘 생각 마라.”
……정령력을 정력(?)으로 사용하는 불릿이었다.
========== 작품 후기 ==========
내일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