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6 불모의 황무지 =========================================================================
샤라랑-
오늘도 흙덩이는 불릿에게서 뽑아낸(….) 힘으로 대지의 축복을 뿌리며 불모의 황무지에 개간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후우우.”
이젠 대지의 축복정도로는 정령력이 소모되는 것에 별다른 부담이 되진 않았지만, 날마다 밖으로 나와 더위에 노출되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불릿! 나 다했어!”
도도돗!
흙덩이는 냉큼 달려와 불릿에게 안겨왔는데, 먼지투성이가 된 그녀를 보며 불릿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일단 좀 닦도록 하지.”
“여기 있어요, 불릿님.”
그는 유실리아에게서 받아낸 손수건으로 흙덩이에게 묻은 먼지를 닦아내주었다.
스윽, 스윽.
“우웅, 앗!…, 거, 거기는 앙댓!”
“흠?”
계속 돌아다녔기에 원피스 차림의 흙덩이는 다리가 많이 더러워졌는데, 불릿이 그곳을 집중적으로 닦아내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인간이 된 이래 처음으로 거부감을 드러내는 그녀에게 불릿은 당혹감을 느꼈다.
그런 불릿의 얼굴을 본 흙덩이는 우물쭈물 대다가 수줍게 말을 꺼냈다.
“저, 저기 있잖아, 불릿? 나…, 그날인 것 같아….”
“……….”
“헛, 작은아씨. 생리주기를 외우지 않고 계셨어요?”
“불릿이 만져주고 알았어….”
여자가 가장 민감해지는 날인 그날이었기에 흙덩이는 불릿의 손길에도 흠칫, 몸을 떨었고 유실리아가 다가와 다독여주자 그녀에게 안기며 아랫배를 쥐었다.
“힝, 아파. 이거 싫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흙덩이에게 불릿은 조심스레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며 나직이 속삭였다.
“치유능력으로도 안 되니?”
“잠깐 괜찮았다가 다시 아파….”
흙덩이의 치유능력은 단발성이다보니 장시간 고통이 지속되는 생리엔 어쩔 수 없었나보다.
애초에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니고, 이것 또한 자연의 법칙이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안쓰러웠는지 불릿은 흙덩이를 공주님안기로 업어들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어차피 오늘분 개간작업은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자.”
“미안해, 불릿…. 근데 너무 아파….”
언제나 발랄하던 흙덩이가 자신의 품에 안겨선 아랫배를 감싸 쥐고 있자 불릿은 그녀에게 짧은 진공키스를 해주었다.
“츄르릅….”
뽀옹…
귀여운 소리를 내며 해방된 혀로 점점이 늘어지던 타액을 삼킨 흙덩이는 그대로 축 늘어졌다.
“나, 있잖아아…, 조금만 잘게….”
“잘 자렴, 우리 아가.”
“잘 자…….”
흙덩이가 새액, 새액 소리를 내며 잠들자 유실리아는 걱정 어린 말을 꺼냈다.
“마님이나 저는 익스퍼트에 도달했기 때문에 별다른 통증을 못 느꼈는데, 그래서 작은아씨께 조금 소홀했던 것 같아요. 죄송해요….”
그녀는 불릿의 품에 안긴 가녀리고 조그마한 소녀의 모습에 울상을 지었다.
흙덩이는 얼마나 힘들었던지 그렁그렁하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는데, 그 옥구슬을 불릿이 소매로 닦아주며 유실리아의 말에 대꾸했다.
“네 탓이 아니다. 아픈 것도 참고 일을 강행한 흙덩이에게 고맙고 미안할 뿐이지.”
“작은아씨는 어쩜 이렇게 곱고 착하실까요….”
사라락-.
이 무더위 속에서도 땀을 흘리지 않던 흙덩이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그것은 생리로 인한 통증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려주는 듯했다.
불릿은 이 가엾은 자신의 어린 소녀를 편히 해주고자 걸음을 옮겼다.
* * *
벙스 카텐의 저택으로 돌아온 불릿은 올리비아와 루나, 그리고 유실리아에게 흙덩이의 간호를 맡기고서 셰실리코프와 대면했다.
“…래서 인간의 것으로 여겨지는 족적을 발견했습니다.”
“그러한가….”
그들은 흑마법사의 소행이라 여겨지던 자이언트 스콜피온의 습격 이후로 200여명인 부대를 둘로 쪼개 한쪽은 개간작업을 진행하는 흙덩이를 보호하고, 하나는 놈들에 대한 수색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높은 수준을 보유한 셰실리코프 덕분에 드디어 놈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불릿의 반응은 영 신통찮았다.
“각하, 어디 편찮으십니까?”
“…‘본인’은 괜찮네.”
무더위 속에서 진행되는 일들인지라 그의 건강이 걱정되어 안부를 물었던 것인데, 불릿의 대답에서 셰실리코프는 눈을 번뜩이며 재차 물어왔다.
“그렇군요. ‘각하’께선 괜찮으시지만 부인들 중의 누군가는 아프신 모양이군요.”
“…가끔 자네가 검사가 맞는지 의심된다네.”
“높은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선 지식도 함양해야 하는 법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셰실리코프가 똑똑하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의 고민을 눈치 채게 되자 불릿은 숨길 것 없이 털어놓았다.
“사실은 흙덩이가 아프이.”
“어디가 편찮으신 거랍니까? 말씀만 하시면 제가 당장이라도 달려가 필요한 물품을 구해오….”
“생리라고 하네.”
“…….”
이런 문제에 대해선 머리회전이 잘 돌아가는 셰실리코프도 답을 내놓지 못하는지 일순 말이 멈춰버렸다.
남자에게 있어 여자들의 그날은 공감도 안 되고 뭔지 모를 이상한 현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불릿에겐 그저 흙덩이가 아픈 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면 불쌍해서 애처로워 보일 뿐이다.
흙덩이가 아프자 불릿의 기분도 덩달아 다운돼 보였고, 그래서 셰실리코프는 보고를 끝마치려 했다.
“그럼 이대로 수색을 진행하면서 놈들의 꼬리를 밟아보겠습니다.”
“…그래, 그리해주게. 그럼 본인은 이만 흙덩이에게 가보도록하지.”
“안부 전해주시기를.”
셰실리코프의 말에 불릿은 고개를 끄덕인 후 장소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불릿의 등을 바라보며 셰실리코프도 자연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나의 햇살도 아프진 않을까?”
뜨거운 여름, 사랑에 빠진 청춘남녀(?)들이 고민하는 계절이었다.
* * *
“끄응, 끄으응….”
방안에 누워있는 흙덩이가 연신 신음성을 흘리자 그녀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려주던 루나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우리 작은아씨 불쌍해서 어떡해요? 제가 대신 아플 수도 없고….”
“생리란 게 원래 이렇게 아픈 거였나? 조금 불편한 걸로 알았는데.”
올리비아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녀는 어려서부터 가문의 검술을 익혔기 때문에 생리가 오더라도 약간의 불쾌감을 느끼긴 했어도 저렇게 앓아누울 정도로 아픈 적은 없었다.
원래 생리란 게 여자라고 해도 누구는 멀쩡히 돌아다니고, 누구는 몇 날 며칠 동안 아파 죽으려고 하는 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덜컥.
그때, 불릿은 문도 두드리지 않고 방으로 들어서더니 곧장 그녀들에게 물었다.
“아직도 아픈가?”
“오셨어요, 불릿님.”
유실리아가 반겨주자 불릿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선 흙덩이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털썩.
“…많이 힘들어 보이는구나.”
“끄응, 흐으윽….”
불릿이 왔음에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에 흙덩이의 감긴 눈에서 맑은 눈물이 옆으로 흘러내렸고, 옆에 서있던 루나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다.
“왜 이러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인간이 된지 얼마 안 돼서 고통엔 익숙하지 않은 게 아닐까?”
올리비아의 말대로 흙덩이는 인간이 된지 채 반년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쾌락(?)은 알고 있어도 고통은 겪을 일이 거의 없었기에 이토록 괴로워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일견 타당한 의견이었기에 불릿은 고개를 끄덕이고선 가슴에 가지런히 모인 흙덩이의 두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흐윽…, 부, 불릿이야…?”
“그래, 나다.”
“흙덩이 너무 힘들어….”
아까보다도 악화되어 보이는 그녀의 상태에 불릿은 땀에 젖은 머리를 어루만져주며 흙덩이를 달래주었다.
“괜찮아, 다 지나갈 거야.”
“일해야 하는데…, 불릿 괴롭히는 나쁜 사람들 잡아야 하는데….”
흙덩이가 없으면 불릿은 정령사로서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지금은 중급의 경지에 올라섰기에 정령력을 외부로 발출, 상대를 압박하거나 신체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지만 그걸 가지고 정령사라고 부르기엔 무리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흙덩이는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걱정되어 불릿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졸리고…, 힘들어…, 근데 아파서 잠이 안와…, 불릿…, 나 어떡해…?”
이제 곧 저녁이 다 되가는데도 흙덩이의 상태는 갈수록 악화되어 갔는데, 아무래도 가볍게 볼 사항이 아니었던지라 불릿은 그녀의 땀을 닦아주던 루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루나, 지금 당장 가서 마탑지부장을 불러오라고 하도록.”
“네, 대영주님.”
루나는 이유도 묻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가 마탑의 지부장을 부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달칵.
문이 닫히자 불릿은 힘겨워하는 흙덩이의 눈꺼풀에 키스를 해주고선 입을 열었다.
“곧 마법사가 와서 치료를 해줄 테니 조금만 참아보렴.”
“불릿만 믿을게…, 헤…헤….”
불릿의 손길에 안심했는지 흙덩이는 억지로 눈을 감았고, 금방이라도 깨어날 것처럼 불안정한 잠에 빠져들었다.
“에휴, 큰일이다 큰일. 우리 예쁜이 안쓰러워서 어떡해.”
“혹, 병이라도 걸리신 건 아니겠죠?”
올리비아와 유실리아의 대화에 불릿이 끼어들었다.
“당분간 흙덩이는 쉬도록 내버려두자. 그동안 너무 무리했던 것 같다.”
흙덩이는 인간이 된지 얼마 안 되어서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적었다.
그러니 어디까지가 한계선인지 모를 테였고, 어차피 더 이상의 개간은 진행해봤자 지켜내는 것도 감당이 안 되었기에 작물을 길러보며 흑마법사에 대한 수색을 진행하면 될 터였다.
“토벌대만으로 되겠어? 흙덩이가 없으면 자기는 힘이 제약되잖아.”
흙덩이가 인간이 되었음에도 불릿과 둘의 관계는 여전히 끈끈한 무언가로 이어져 있었다.
계약관계는 아니었으나 무언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마치 영혼이 이어진 듯한 상태였기에 더 이상 정령이 아닌 흙덩이가 불릿의 정령력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들은 신생 라체나의 일원으로 선택받을 만큼 정예중의 정예다. 전쟁에서 패배한 잔당을 수색하는 임무에 무리는 없다고 판단된다.”
현재 토벌대에는 종기사로 내정된 병사들과 정규기사로 내정된 십인장들이 있다.
그들과 더불어 기존 라체나의 기사들은 선임기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번 토벌만 끝나면 당장이라도 창설할 수 있을 것이다.
“불릿이 그렇다면야…, 그럼 우리는 뭐할까?”
올리비아의 물음은 흙덩이의 곁을 지킬지, 아니면 불릿의 곁에서 토벌대에 합류할지를 의미한 것인데, 둘 중 하나도 소홀할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불릿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저택에도 하녀는 있지만, 올리비아나 유실리아가 아니면 흙덩이가 불안해할 것이다.’
몸이 아프면 즐겁다가도 서러워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었다.
게다가 흙덩이는 이제 막 인간으로서의 삶을 배워가는 중이었으니, 이런 물가에 내놓은 듯한 아이를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홀로 내버려두는 것은 해선 안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불릿은 그녀들에게 답을 내주었다.
“부인들은 흙덩이의 곁을 지키시오. 흙덩이에겐 무엇보다 가족의 사랑이 필요하니 말이오.”
장난할 생각이 없었는지 근엄하게 말하는 불릿에게 유실리아가 반박했다.
“하지만, 그럼 불릿님의 호위는 누가 맡나요? 그동안 제가 수발을 들었기에 다른 자들의 손길(?)은 몸에 맞지 않으실 텐데….”
자신을 걱정해주는 유실리아의 말에 얼굴을 굳히고서 대꾸하는 불릿.
“…너희까지 아프면 내가 버티질 못한다. 땡볕아래에서 고생하지 말고 흙덩이를 보살펴줘. 부탁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