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2 불모의 황무지 =========================================================================
쪼옥, 츄르릅-, 쪼오옥!
- 으으응….
그들의 이러한 행위는 꽤나 길었으므로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호위병대를 비롯한 모든 인원이 들을 수 있었다.
“어떡합니까, 대장.”
이미 말에서 내린지 오래인 셰실리코프는 크레파토스에게 대장이라 부르며 의견을 물었는데, 이는 자신이 작위로는 위에 있더라도 병대의 책임자인 크레파토스를 존중한다는 의미였다.
이에 크레파토스는 이마의 주름을 한껏 접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는 척, 하고 팔짱을 끼더니 말을 내뱉었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지.”
“저도 그냥 물어본 거였습니다. 각하의 사랑을 방해할 순 없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씩 들썩이는 마차를 바라보던 셰실리코프를 향해 크레파토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랑을 시작했다고 하더니, 많이 변했군.”
“…샤인 덕분에 사람이 된 것이지요.”
“내 생각도 같네. 여성은 하나의 성별이기 이전에 어머니이기도 한 것이야. 자네 또한 여성에게서 태어난 것이니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
“그렇겠지요.”
“……자네 정말 많이 바뀌었군. 변명도 하질 않으니 말이야.”
크레파토스의 말에 셰실리코프는 어깨를 으쓱하고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주변을 좀 물려야하는 거 아닙니까? 각하께서 사랑을 나누시는 일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다른 자들에게 보일만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도 그렇군. 그럼 저기 멀거니 서있는 젊은 영주에게 가보도록하지.”
“흠, 저자가 벙스 카텐이라는 자로군요.”
자신과 엇비슷해 보이는 연령의 귀족이 시야에 닿자 셰실리코프는 한층 눈이 날카로워졌다.
“세스터스 백인장!”
다각, 다각.
크레파토스의 부름에 말을 타고서 다가온 세스터스는 아직도 주변을 경계하며 말에서 내리지 않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병사들이 피곤하겠지만 주변의 경계를 부탁하네.”
“으음.”
세스터스는 왜 이런 명령이 내려졌나 생각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 조금씩 흔들리며 야릇한 신음성이 흘러나오는 마차로 눈길이 꽂혔다.
“……딸일까요, 아들일까요?”
뜬금없는 세스터스의 물음에 크레파토스는 기사로서, 군인으로서가 아닌 한 명의 아버지로서 대답해주었다.
“딸이 귀엽지.”
“작은아씨가 힘내셨으면 좋겠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가 신호를 주십시오.”
그렇게 마차에서 벗어나 사주경계를 시작하는 토벌대의 병사들.
저번의 인원 그대로, 2개 중대가 따라왔기 때문에 단순히 마차 한 대를 보호하는 것치곤 지나친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탑승하고 있는 것이 바포 변경백의 모든 것이랄 수 있는 불릿과 부인들이었으니 결코 지나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들이 불릿의 응응(?)을 방해하지 않고자 노력하는 동안, 크레파토스와 세스터스는 카텐령의 영주, 벙스 카텐과 마주하게 되었다.
“오랜만이오. 세스터스 백인장, 크레파토스 호위대장.”
“저는 처음 뵈어요!”
“……?”
“루나,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이따 아가씨, 아차, 마님이지. 마님께 알려드리려구요. 들어도 되죠?”
며칠만 머무는 것도 아니고, 유실리아도 이젠 첩의 자리를 차지했기에 그녀들을 시중할 인물이 필요했었다.
그렇다고 많은 인물을 대동할 필요는 없었고, 카텐령에서 파견되는 하녀들을 통괄할 자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하녀 루나로 정해졌을 뿐이었다.
같은 하녀이긴 하더라도 루나는 중앙영지, 그것도 불릿의 성에서 일하는지라 끗발이 달랐다.
“그렇게 하시오. 그나저나, 이름이 루나였소?”
야영을 할 때도 봤었지만 직접 대화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이름을 묻는 셰실리코프였고, 그런 그에게 루나는 치마를 살짝 들추며 나긋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셔요, 바람이 머무는 곳의 영주님. 저는 대영주님의 저택에서 근무하는 올리비아 마님의 전속하녀 루나라고 한답니다.”
“…반갑소, 루나. 셰실리코프라 부르시오.”
“어머, 저에게 관심이 있으신가요?”
삼광 셰실리코프의 성은 실라이온 퓨처 실피드. 셰실리코프는 어디까지나 이름이었기에 친한 사람이나 상급자가 아니고선 쉽사리 부를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 막 첫 대화를 뗀 상대에게, 그것도 여성에게 이름을 부르는 것을 허락했다는 것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고도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에 셰실리코프는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는 말을 내뱉는다.
“나의 성인 실라이온 퓨처 실피드는 웬만한 일이 아니고선 거의 사용하지 않소. 그리고 이름보다도 호(號)가 더 유명하니 오해 마시오.”
“셰실리코프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으니 이상한 바람을 집어넣지 말거라.”
“와, 우리 영토에도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네요?”
셋이서 옹기종기 대화를 나누니 자연스럽게 도태된 벙스 카텐이 중얼거렸다.
“여름인데 무슨 봄바람이라고….”
그러나 그의 독백은 이들에게 들리지 않았고, 벙스 카텐은 복장을 다듬고선 목청을 높였다.
“아무래도 각하께오서 환영식을 맞이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어찌 진행하면 좋겠소?”
아직까지 마차가 흔들리고 있었기에 크레파토스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각하께선 의외로 부끄럼이 많으시니 병력을 물리는 게 낫겠소.”
예전의 불릿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불릿은 그 나이대의 모습을 점차 찾아가는 중인지라 감정에 솔직한 장면이 종종 보이고 있었다.
“게다가 레이디에게 창피를 줄 순 없지 않소?”
여기서 말하는 레이디란 올리비아, 흙덩이, 유실리아 삼인방을 가리켰다.
하긴, 성문 초입의 마차 안에서 응응(?)을 하고 있으니 부끄러울 법도 했다.
“문제는 없겠소이까?”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하고 싶었던 벙스 카텐은 거듭 질문을 가했고, 이번 질문엔 세스터스가 답해주었다.
“그쪽에서 주둔할 수 있는 준비만 해놓았다면 바로 다음날부터라도 일을 진행할 수 있소. 이의 있는가?”
불릿이 만든 군단의 군율에 따라 딱딱하게 말하는 세스터스에게 벙스 카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 500명이 주둔할 수 있도록 넉넉히 준비를 해놓았으며 거처에 관해선 어차피 빈집이 많기에 일부 구역을 통째로 쓰기로 결정했소.”
직스 자작의 만행으로 인해 많은 인구가 빠져나갔고, 그래서 카텐령에는 아직도 빈집이 널려있었다.
현재 카텐령의 병력 총 현황이 500이 안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빈집이 차오를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번 토벌대는 저번과 동일한 222명이오. 하위병부터 병장까지 200, 십인장 20명, 백인장 세스터스 외 호위병대장 포함 총 222명. 그리고 최고사령관각하와 안주인님들 셋. 하녀 루나까지 포함하면 총인원 227명이오…아, 삼광이 있었구려. 1명 추가해서 228명이오.”
“저번에 하급 마물을 훌륭히 처리하셨으니 그에 대해선 별 말을 않겠소만, 내 분명 땅을 개간한다고 들었었는데 말이오.”
땅을 갈아엎고 일구는 일은 의외로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처음 손을 대는 땅이라면 흙속에 숨어있던 돌과 자갈을 골라내야 하고, 충분히 갈아엎은 후 비료를 섞어 토지에 영양분을 심어줘야 한다.
그 외에도 작물이 죽지 않도록 물도 뿌려줘야 하고, 애초에 농사라는 게 씨앗만 뿌려놓는다고 자라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러니 이를 관리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병력만 딸랑 왔으니 어쩌자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각하께서 머리가 참 좋다는 것이오.”
“그게 무슨 말이오?”
“각하께오서 대지의 축복을 내린 땅에 농사를 지을 인물들을 이곳 카텐령에서 고용하면 되지 않겠소?”
크레파토스의 말에 벙스는 그동안 그의 골을 아프게 만듦과 동시에 해결할 수 없었던, 뼈아픈 문제가 단숨에 해결될 조짐이 보이자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개간된 영토는 우리 카텐령에서 맡아도 된단 말이오?”
“바포 변경백의 땅은 포화상태이기에 농사지을 곳이 없어서 여러모로 실업률을 줄이기 힘들었소. 그러니 이번 불모의 황무지 개간은 그것을 단방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될 것이오.”
크레파토스 또한 직스 자작령, 그러니까 카텐령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었기에 이곳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예전 직스 자작령은 다른 영토에 비해 군사비용이 적게 들어 부유한 편에 속했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군인을 많이 고용할 필요가 없었기에 주민들은 각자 살길을 찾아봐야 했었다.
평민들의 대부분이 농사를 생업으로 삼았는데, 그것도 아니면 병사가 되거나 용병, 또는 소수의 인물만이 상인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직스 자작령이 잘 살았던 이유는 단순히 군사비가 많이 필요하지 않았기에 세금이 적었던 것뿐이었다.
“땅도 많이 생기고, 작은아씨의 정령술로 토질을 증진시킨다면 자연스럽게 모래바람도 줄어들 테니 이에 영향 받는 카텐령도 좋아질 것이오.”
바포 변경백의 땅이 안 좋았던 이유는 주변에 마기가 흘러나오는 마수의 숲이라던가 모래바람이 날리는 불모의 황무지 등이 있어서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토지 자체가 척박했으니 정령술이 아니었으면 답이 없는 곳이었다.
“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오. 불모의 황무지를 개간한다면 이곳으로 이사오는 주민들도 생길 테니 일손도 생기고 더 좋겠군.”
벙스 카텐의 가장 큰 고민은 영지에 일자리가 없다는 것과 그와 반대로 일손이 적다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적재적소에 배치해야할 인재가 없다는 의미였는데, 이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정착하게 된다면 그들에게 맞는 일을 맡길 수 있으리라.
사람만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니었고, 적다고 해서 관리하기 쉬운 것도 아니었다.
언제나 적당히,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영주야말로 관리의 프로페셔널일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죄다 떠나서 조금 걱정이긴 했소. 지금이야 일할 수 있다지만 조금만 더 지나면 저들도 골골댈 테니 말이오.”
“자자, 어두운 이야기는 그쯤으로 하고, 각하께서 아직 식사 전이시니 안내해주실 수 있겠소?”
“이미 다 준비를 해두었소이다.”
세스터스의 물음에 벙스는 기다렸다는 듯 대꾸를 하였고, 대략적인 사업얘기가 끝나자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모셔야할 대상인 불릿에게로 향했다.
덜컹, 덜컹덜컹-.
- 흐으으응!!
“……각하께서 무슨 만드라고라라도 드셨소?”
“어머, 어머. 우리 마님하고 작은아씨 좋으시겠네…, 유실리아가 부럽당.”
이번엔 벙스 카텐이 물어오자 크레파토스와 세스터는 잠시 말을 잊었고, 루나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면서도 슬쩍 손가락을 벌려 흔들리면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는 마차를 훔쳐보았다.
“그러고 보니 하녀장님께서 우리 대영주님 몸보신 좀 하시라고 간식을 싸주셨네요.”
“간식으로 몸보신이 가능한가?”
이젠 흰머리가 머리숱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크레파토스였기에 나이가 나이인 만큼 몸보신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나머지 두 남성도 루나를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아예 손바닥을 내리고선 흔들흔들, 보이지 않음에도 부끄러움이 전해지는 마차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달콤한 꿀에 절인 더덕 꿀강정이요. 남자한테도 좋은데 여자한테도 좋은, 아, 참 좋은데, 말로 설명하기가 좀 그러네요,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