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1 불모의 황무지 =========================================================================
짹, 짹짹-
“으음…….”
아침햇살과 싱그러운 새들의 울음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벙스 카텐은 눈도 뜨지 않고서 상체를 일으켰다.
스으윽.
“…….”
끔뻑끔뻑.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참이었는데, 얼마 잔 것 같지도 않거늘 벌써 아침이란 사실에 그는 스트레스를 받았다.
“하아아….”
그러나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고, 또 다시 누워서 잠들기엔 영지의 사정이 좋지 않았다.
아직도 그가 결제해야할 서류가 산처럼 쌓여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때, 문밖에서 일정한 리듬의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기침하셨습니까, 주인님.”
“흐아암. 어, 일어났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벌컥.
단숨에 문을 열어 재낀 인물은 집사복을 입은 중년인이었는데, 벙스 카텐과 마찬가지로 할 일이 많은 집사가 주인을 깨우러 오는 것은 조금 이상한 모습이었다.
촤악-!
집사는 곧바로 커튼을 열고선 그에게 아침인사를 올렸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주인님.”
“……더 자고 싶다.”
“일단 남작위에 오르고 나서 얘기하시지요.”
“베리츠, 각하께오서 오늘 도착하신다고 했던가?”
“아마 점심즈음에 도착하리라 예상됩니다.”
“이런, 서둘러야겠군.”
이불을 걷어붙인 벙스가 바닥에 발을 디디자 이제 막 쟁반에 간단한 요깃거리를 들고 들어오던 하녀와 마주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주인님.”
“어, 그래. 쟁반은 탁자에 놓고, 일단 나 옷 갈아입는 것부터 도와주라.”
“알겠습니다.”
벙스는 하녀의 도움을 받아 정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어색해보였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문제로, 그는 기사로 살아온 세월이 길었기에 영주라는 직위에 어울리는 예절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도 이곳에선 자신이 가장 높았고, 귀족도 거의 없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불릿이 방문하는 날, 그것도 잠깐 들렀다 가는 것이 아니라 장기간 머물며 바포 변경백의 중요한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그랬기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서 허겁지겁 급한 서류부터 처리한 것이 아니겠는가?
“주인님, 소매의 프릴장식은 뒤집는 것이 아닙니다.”
“아아, 그랬었지.”
손등을 덮을 정도로 긴 프릴장식은 기사로서 실용성을 중시하는 벙스 카텐에겐 너무도 불편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들은 이런 면에선 깐깐했기 때문에 참아내는 것도 하나의 미덕이다, 라고 대부분의 귀족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베리츠! 부족한 것 없이 준비했겠지?!”
불릿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고, 자신이 이만큼 해냈다는 것도 강조해야 했기에 벙스는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은 그가 바라던 대답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부족합니다. 아시잖습니까? 직스 자작이 얼마나 망쳐놓았는지를 말입니다.”
“아…….”
‘아’라는 말에는 여러 뜻이 담겨 있었는데, 살짝 달아오르려던 그의 기분을 단숨에 바닥까지 추락했다는 의미도 있었다.
“제길, 그래도 병사들에게 먹일 식량은 부족하지 않겠지?”
“……그걸 드시고 싶으십니까?”
“당연히 싫지. 그래도 배는 채워주잖은가?”
아직까지 식량부족이 해결되지 않아 카텐령은 무리하게 끌어올린 토지의 기력으로 인해 생산되는 작물들이 매우 맛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으니 맛없는 작물로 배를 채우고, 그나마 먹을 만한 구황작물로 입가심을 하는 중이었다.
“각하께 그런 오물(?)을 드릴 수는 없는데, 큰일 났군, 큰일 났어.”
워낙 정신이 없었기에 이런 부분까지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던 벙스였으나, 홀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없기에 집사와 같은 존재가 있는 것이리라.
베리츠는 이미 10여년이란 세월을 지금은 이미 죽어버린, 직스 자작을 모시면서 노하우를 축적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여유를 부리며 입을 열었다.
“대영주님께서도 그 부분에 대해선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시니 주인님을 탓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일로 경을 치신다면?”
“그러나 혹시 몰라서 제가 따로 카질런 남작님의 영토에서 구매해온 식재료가 있으니 염려놓으시기를.”
같은 주군을 섬긴다고 하여 돈이 오고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베리츠 집사는 없는 자금을 쪼개고 쪼개서 불릿과 주요 가신들에게 먹일 식재료를 사왔었다.
“그리고 대영주님의 성품이시라면 모든 물자를 저희에게 바라진 않을 것입니다. 이곳을 살려놓으신 것도 대영주님이시니까요.”
카텐령은 이미 망했다고 표현해도 어색하지 않은 영지였으나, 불릿의 노력으로 숨통을 트여놓았다.
기껏 살려놓은 영지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행위를 현명한 군주인 불릿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서 식사를 마치시고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토벌과 개간을 동시에 진행한다고 하셨으니 못해도 300명은 주둔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부분은 사전에 이미 고지가 되어있었지만, 상기시켜주는 것만으로도 벙스의 행동은 재빨라졌다.
“우걱우걱, 꿀꺽, 꿀꺽!”
샌드위치를 단숨에 씹어 먹은 후 우유로 입가심을 한 벙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학! 맛없어!”
“그동안 맛이 없단 이유로 섭취하지 않으셨던 곡물류를 듬뿍 넣어봤습니다.”
“크으으…, 얼마나 넣었기에 고기맛이 하나도 안 난단 말인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얇게 슬라이스해서 2장을 넣었습니다.”
그토록 두툼했던 샌드위치 안에 맛없는 곡물은 한가득, 고기는 한줌도 안 되는 양이 들어갔다니 맛이 안 느껴질 만도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투정만 부릴 수는 없었기에 그는 외투를 두르고서 밖으로 향했다.
펄럭!
“중대 집합시키고, 대로부터 청소하기로 하지!”
예나 지금이나 높은 분이 오면 가장 고생하는 것은 아랫것들이었다.
* * *
한창 청소가 진행 중인 카텐령의 대로에서는 저 멀리서부터 이곳으로 접근해오는 무리를 발견한 병사들이 일제히 굳는 기이한 현상을 볼 수 있었다.
“비상! 비상! 최고사령관님이시다!”
“빨리 청소도구 치워!”
“카인 상위병님, 이 돌덩이는 어떡합니까?”
“네놈 대가리로 깨부수라하기 전에 어딘가 숨겨둬, 이 멍청아!”
“네, 넵! 알겠습니다!”
“서둘러라, 1에서 5중대까지 전부다 퍼뜩 뛰엇!”
불릿이 다가오는 행렬이 보이자 병장부터 시작해서 백인장까지, 지휘하는 위치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아랫것들을 달달 볶으며 성문의 앞에 나열하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 있는 것들, 똑바로 거수해라! 실수했다간 끝나고 성벽로 한바퀴 전력질주니까!”
“컥, 알겠습니다!”
“열심히 하겟씁니다!”
직스 자작, 지금은 카텐령으로 개명한 이곳은 바포 변경백의 다른 영지들에 비해 방위시설이 조금 허술했는데, 성벽도 낮은 편이고 성문이 위치한 출입구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목조로 건설되어 있었다.
그렇다곤 하나 그 길이까지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영지 전역을 둘러싼 성벽로의 위를 전력질주 한다는 것은 토할 때까지 뛰라는 말과 같았디 때문이다.
기겁한 병사들은 눈을 부릅뜨고선 불릿의 행렬이 다가오길 기다렸고, 그들이 도착하자 우렁차게 소리쳤다.
“불릿 폰 바포 백작각하께서 도착, 착, 케헥!”
“콜록콜록, 으으, 볼살 씹었다….”
망루에 서있던 병사 두 명을 제외하면 모든 병력이 한데 집합해 있었기에 유난히 눈에 띄는 두 명이었다.
한 명은 사례가 들렸고, 한 명은 자신의 볼살을 씹었는지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는데, 그들은 아래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전해져오자 몸을 흠칫했다.
“이 새끼들이…, 성벽로 5바퀴!!”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달아오른 백인장의 음성에 두 명의 병사들은 비명을 질러버렸다.
“으히익!!”
“살려주세요!”
그리고 아직까지 입성하지 않은 불릿은 마차 안에서 고스란히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새로운 재담인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불릿? 한쪽은 실수했고, 그래서 혼나는 것 같아.”
“흙덩이가 그리 판단할 정도면 그냥 실수로군.”
“와-, 완전 바보멍청이들이잖아?”
“…마님, 부, 불릿님이 앞에 계세요…….”
불릿, 흙덩이, 올리비아, 유실리아 순으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유실리아가 불릿을 더 이상 각하라고 칭하지 않고 이름으로 부른다는 점이었다.
존대는 여전히 했지만 말이다.
“아잉, 불릿은 이런 나도 사랑스럽지?”
올리비아가 손가락으로 V를 그리며 눈에 옆으로 가져다대자 불릿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많이 답답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편히 행동해도 상관없을 것 같군.”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던 것인데 그의 다정한 대답에 올리비아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
“……항상 말은 달콤하게 해요, 쳇.”
올리비아가 얌전해지자 불릿은 이번엔 옆에 조신하게 앉아있는 유실리아의 손을 잡아주며 입을 열었다.
덥석.
“유실리아, 너도 말을 편히 해도 좋다. 올리비아처럼 해도 나는 상관 않는다.”
“불릿님….”
일방적인 고백을 진지하게 생각해주고, 결국 자신을 부인으로 받아준 불릿에게 유실리아는 언제나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기에 조심스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불릿님. 저는 어디까지나 첩, 마님과 작은아씨하고 같이 대하시면 아니 되세요. 그리고…, 부끄럽지만 나이차가 많이 나는지라…….”
“나이? 불릿 말야?”
올리비아의 옆에 앉아있던 흙덩이가 고개를 갸웃하자 올리비아가 대신 설명해주었다.
“저 응큼이는 말야, 나하고도 나이가 2배나 차이난다구? 그러니 유실리아하고는 당연히 그만큼 차이나겠지?”
올리비아의 설명이 이해가 안 갔는지 흙덩이가 물음을 건넸다.
“그럼 흙덩이는?”
“어…, 너? 그러고 보니 예쁜이는 나이가 몇이지?”
“…….”
불릿이 대꾸를 않자 그녀의 시선은 흙덩이에게로 향했고, 흙덩이는 천진난만하게 입을 열었다.
“몰라!”
“모른다고? 자기 나이도 모르는 애가 어딨어?”
“근데 몰라. 불릿이랑 만나기 전까지는 엄청 심심한 곳에 있었다는 것밖에 기억이 안 나.”
“…?? 불릿, 이게 무슨 소리야?”
흙덩이의 말은 쉬이 넘길 만한 것이 아닌지라 올리비아가 불릿에게 묻자 불릿은 수줍어하는 유실리아의 손을 쓰다듬어주며 대꾸를 해주었다.
“흐음, 나도 모른다.”
“???”
어이없는 답변에 올리비아가 입을 벌리고선 헤, 하니 바라보자 불릿은 추가적인 말을 이었다.
“알게 뭔가? 이젠 내 것인 것을.”
그러면서 살짝 상체를 숙여 앞에 위치한 흙덩이의 머리를 반대쪽 손으로 쓰다듬어주자 흙덩이는 매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어주었다.
“히힛, 맞아! 나는 불릿 거야! 불릿이 너어-무 좋아서, 항상 신나고 기뻐!”
“그리 말해주니 나도 기쁘다.”
“그리고….”
흙덩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릿의 볼을 두 손으로 잡고선 자신의 숨결을 그에게 불어넣었다.
“불릿이 해주는 날 ‘먹어주는’ 행위도 너무 기분이 좋아. 바로 이렇게.”
흙덩이는 그대로 불릿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가져가더니 복숭앗빛 혀로 그의 혀를 얽어매고선 그대로 빨아당겼다.
“쪼오옥-.”
“어머나….”
“앗, 치사하게!”
흙덩이의 흡입력에 빨려 들어간 불릿의 혀는 이전처럼 ‘뽀옹….’소리를 내며 그녀와 떨어지게 되었다.
“헤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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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12시 10분에 이어서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