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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정령사-146화 (146/241)

00146  삼광(三光) 셰실리코프  =========================================================================

탁-, 탁-, 탁-.

다시 시작된 손가락리듬. 탁상을 두드리는 그의 손가락에 셰실리코프는 긴장된 모습으로 불릿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손이 멈춘다.

…탁.

“후작이 알게 되었군.”

“…어떤 일을 말씀이십니까?”

불릿의 말에 셰실리코프는 천천히 입을 떼었으나 애써 모르는 척하는 것이 역력해 보였다.

그가 현실을 부정하려하자 불릿은 확인사살을 해주고 있었다.

“아마 시녀라는 자에 의해서 보고가 올라갔겠지. 5공녀가 무도회의 1주일을 채우고 돌아갔나?”

“아닙니다. 하루를 남겨두고서 돌아갔습니다.”

“그럼 확실하군. 투툰 후작은 너와 그녀의 관계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감금당한 모양이다.”

쿠쿵!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에 셰실리코프는 무릎으로 기어와 불릿의 다리에 매달렸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녀가, 샤인이 감금되었다니요?!”

“…사랑을 하면 변한다더니, 자네 같은 냉한도 다르지 않나보군.”

“도와주십시오, 각하!”

“무엇을?”

처절하게 매달리는 셰실리코프에게 불릿은 다리가 그의 손에 의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셰실리코프는 그의 감정상태를 확인할 정도로 냉정하지 못했다.

“샤인을 구할 수 있도록! 부디, 부디…!!”

“자넨 착각하고 있군. 감금당했다곤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추측에 의한 것이고, 대외적으론 5공녀는 집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불릿이 감금당했다고 추측한 이유는 그녀가 무도회를 중간에 떠났기 때문이다.

언제나 가장 나중에, 모두가 떠날 때까지 사교장을 지키는 인물이 션샤인 폰 투툰이었었는데, 그녀가 관계까지 맺은 셰실리코프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함께 대동했던 시녀를 통해 알렸다는 점에서 공녀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추측한 것이다.

불릿은 자세를 바꿔 검지를 세워 자신의 광대를 지탱했는데, 약간 비스듬한 자세가 위에 군림하는 자의 여유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셰실리코프는 더욱 애가 탔다.

“그녀가 없으면 저는 이제 살 수가 없습니다!”

“겨우 1주일도 안 되는 만남이 평생을 좌우할 수 있다 생각하나?”

영주란 자신의 인생을 일부 희생해야하는 면도 있었기에 셰실리코프의 발언은 성급했다.

불릿만 하더라도 제일 높은 자리에 있었으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었으니까.

“샤인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흐음….”

잠시 고민하던 불릿, 그는 셰실리코프에게 근본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를 사랑하나?”

“예!”

“어느 정도로?”

“검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검으로 일어선 자가 검을 포기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 게다가 그에게 있어 지금 검을 포기한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자넨 나에게 무얼 해줄 수 있지?”

쿵!

불릿의 말에 셰실리코프는 바닥에 머리를 찧었는데, 카펫페 스멀스멀 피가 스며드는 것이 이마가 찢어진 모양이었다.

벌떡 고개를 든 셰실리코프의 얼굴은 흘러내리는 피로 흥건했으나 그 열기만큼은 어디로 가지 않았다.

“모든 것을!”

과거, 현재, 미래, 재산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것을 불릿에게 맡기겠다는 소리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묻지. 션샤인 폰 투툰과 결혼한다면 무얼 하고 싶나?”

“그것은….”

의외의 말에 거침없이 대답하던 셰실리코프는 주춤하는 듯했으나 이미 생각한 바가 있는지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아이를 낳고, 오순도순 살고 싶습니다.”

이번엔 외치는 것이 아닌 일상회화를 하듯 잔잔한 말투였다. 그래서 더욱 불릿의 가슴에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몇 초간을 눈을 감았던 불릿은 날카롭게 빛나는 눈을 번쩍 뜨고선 그에게 나직이 읊조렸다.

“투툰 후작의 공녀와 어울리려면 그와 맞는 격을 갖춰야겠지.”

“…….”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은 이미 절절하게 깨닫고 있는 셰실리코프였기에 침묵으로 대신 답변하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불릿의 말에는 그런 그라도 절로 놀라운 탄성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으니.

“그렇지 않나, 실라이온 남작?”

“아.”

셰실리코프에게 묻는 듯한 말이었으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컸다.

지금은 잊혀진, 그의 성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남작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

이는 죄를 면해준다는 것과 동시에 봉해졌던 작위를 해제해주고, 승작과 함께 혼인을 성사시켜준다는 뜻이었다.

그는 불릿의 말을 들음과 동시에 감정이 차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말, 정말 감읍드리옵니다, 각하! 주군이시여어!!”

흐느낌이랄지, 기쁨일지 모를 말을 처절하게 내뱉으며 넙죽 엎드린 셰실리코프, 이제는 온전한 풀네임을 되찾은 실라이온 남작의 등을 보며 불릿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본인의 부인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야. 그렇지 않았으면 일말의 재고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사랑은 냉혈한 같던 셰실리코프만이 아닌, 대영주인 불릿의 마음도 움직였던 것이다.

철커덕-.

문이 열리면서 불릿이 방을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크레파토스와 유실리아는 그를 쳐다보았다.

“오늘 중으로 떠날 채비를 갖춘다.”

“…삼광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걱정이 깃든 크레파토스의 물음에 불릿은 흘깃 유실리아와 그를 바라보더니 한쪽 구석에 기대어 곤히 잠들어 있는 흙덩이를 공주님안기로 들어올렸다.

스윽.

“새액-, 새액-.”

그녀는 방에서 기다리다 심심했었는지 불릿이 대화를 나누던 곳까지 찾아왔었는데, 크레파토스와 유실리아에 의해 들어가지 못하다가 결국 복도에서 잠이 든 모양이다.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모포를 덮고 있는 것을 보니 둘이 보살펴주고 있던 모양인데, 불릿은 유실리아에게 고개를 까닥여주고선 중얼거리듯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아직 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자식을 장가보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군.”

그 후 그는 뚜벅뚜벅, 복도를 걸어가며 흙덩이를 품에 안고 침실로 향했다.

그가 멀어져가자 크레파토스는 우물쭈물 거리는 유실리아에게 명을 내렸다.

“어서 쫓아가보게, 모셔야하지 않겠는가?”

“…제가 저분과 어울릴 수 있을까요?”

처음으로 꺼내는 고민상담에 크레파토스는 짐짓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주름진 눈가가 순해지며 거칠어진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스윽스윽.

“…저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그래,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지.”

상하직위를 벗어나 오랜 관계가 겉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중앙영지에 들를 때마다 쑥쑥 크더니, 어느새 여인이 다 되어있구나.”

“놀리지 마세요.”

청순한 유실리아가 새침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것은 그녀가 일 년에 몇 번밖에 볼 수 없었던 크레파토스에게 보여주던 애정표현이었기에 나쁜 뜻이 담긴 것은 아니다.

그가 직스 자작령에서 위기에 빠졌을 때에도 지원을 오려던 것을 막은 것이 바로 크레파토스였는데, 그는 자신이 가족처럼 아끼는 유실리아가 다치지 않길 바랐던 것이다.

“자, 어서 가 보거라.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기회일지 모르겠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기회라니….”

“작은아씨도 잠든 마당에 사랑이야기로 각하께선 여자를 품고 싶으실 거다. 그때 네가 빈자리를 대신하면 어떻겠느냐?”

화아악…

크레파토스의 노골적인 말에 유실리아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으나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하,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저도요?”

“네가 어때서 그러느냐? 예쁘고, 사랑스럽고, 육체도 잘 단련했고 말이지.”

“그런 소리 마세요오….”

부끄러웠는지 말끝을 흐리는 유실리아였으나 크레파토스는 그녀의 등을 떠밀어주었다.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어서 각하께 가 보거라. 길어야 반나절 밖에 시간을 못 끌 것이야.”

반나절, 그것은 떠날 채비를 갖추라던 불릿의 명령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안에 불릿과 응응(?)을 해서 기정사실을 만들란 소리였다.

이젠 새빨갛게 달아오른 유실리아였으나 그녀 또한 같은 마음이었는지 조심조심 걸음을 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그럼 해, 해볼게요!”

“그래, 꼭 성공해서 내 품에 손자를 안겨주려무나.”

“……네…….”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는 목소리였으나 크레파토스도 마나를 다루는 익스퍼터였기에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유실리아를 떠나보낸 크레파토스는 중앙영지로 보금자리를 옮긴 자신의 가족을 떠올리며 셰실리코프가 위치한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 자식새끼들도 아직 안 가는 장가를 수양딸이 먼저 가게 생겼군.”

크레파토스의 나이 어언 50, 소드익스퍼트의 기사답게 전장에 나갈 때마다 일을 치루어 어느덧 자식이 다섯이나 있었다.

하나같이 아들만 있는지라 후계걱정은 없었으나 하나같이 여자완 인연이 없었고, 자신이 가정에 소홀해서인지 누구하나 검술이라면 질색하는 기색만 보인다.

지금은 행정관이 되어 각자 독립했는데, 그래서 부인과 함께 적적한 삶을 꾸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족이 있음에도 외로움을 느끼던 크레파토스에게 유실리아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소녀였다.

그런 그녀가 이제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 대상이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라는 것에 뿌듯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각하라면 외면하지 않으시겠지.”

그는 고민을 털어버리고선 이마의 상처를 수습하고 있는 셰실리코프에게 말을 걸었다.

“삼광, 상처는 왜 생긴 것인가?”

“…크레파토스, 각하께서 허락해주셨소.”

안부를 묻는 물음에 답하진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셰실리코프였으나 크레파토스도 기꺼워했다.

“우리 바포 변경백에 연이어 겹경사가 벌어지니 참으로 기쁘기 그지없구려.”

“아직, 그녀와 혼인이 약속된 것은 아니오.”

불릿이 도와준다고 약속했으니 큰 시름을 덜 수는 있었으나 그렇다고 장애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투툰 후작을 설득하는 것이었는데,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딸이 남의 손에 더럽혀졌고, 그 인물이 하필이면 고작 준남작에 불과한 셰실리코프였으니 그의 분노가 자칫 잘못하면 바포 변경백 전역으로 번질지 몰랐다.

“각하라면 잘 해결해주실 것이네.”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편히 말하시오. 은혜도 모르는 파렴치한은 아니니까.”

“험험, 그럼 그렇게 하지.”

이제 서른 줄인 셰실리코프에게 말을 낮추는 것이 크레파토스도 편할 것이다.

그는 헛기침을 내뱉은 후 말을 이어갔다.

“내 아까는 화를 내긴 했으나 그건 어쩔 수 없던 문제네. 5공녀의 처녀를 빼앗은 것은 크나큰 실수야.”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성에 대해 관대한 편이라 할지라도 첫 경험은 매우 중요했다.

누구에게나 처음의 기억은 강렬한 것으로, 첫 경험을, 자신의 처음을 가져간 남자를 5공녀 션샤인 폰 투툰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여린 심성을 지닌 그녀라면 그와 이어지지 못해 시름시름 앓다가 상사병으로 죽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된다면 투툰 후작은 왕국에 위기가 닥치더라도 왕국의 방패를 맡고 있는 바포 변경백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리라.

“하지만, 그녀와 저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젠 그녀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단 말입니다!”

영지의 안전을 위해 박쥐처럼 행동했던 인물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에 크레파토스는 혀를 찼다.

“뜨거운 사랑도 좋지만 조금은 주변을 의식하게. 각하께선 마님과 작은아씨를 사랑하지 않아 그토록 참았던 줄 아는가?”

불릿이 올리비아와 흙덩이를 일부러 밀어내며 참아내던 모습은 가신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간격을 유지하면서도 젊어진 육체의 욕망을 꿋꿋하게 참아내던 불릿의 참을성을 셰실리코프는 조금 본받아야 할 것이다.

크레파토스의 발언에 그도 깨달았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면목 없습니다. 명색이 기사라는 자가 참지 못하고 그녀를 안았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제가 한 행동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고, 또 그 이전에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니 반드시 함께하고 싶습니다.”

무릇 남자가 자신의 여자를 챙기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크레파토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에 대꾸했다.

“그런가? 그럼 내 부탁도 들어주도록. 각하께서 오늘 안으로 떠날 채비를 갖추라 명하셨는데,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도록 하세.”

“어째서입니까? 빨리 진행해야 그녀를 볼 수 있을 텐데….”

금세 자신만 챙기는 셰실리코프의 말에 크레파토스가 혀를 찼다.

“쯧쯧, 유실리아에게도 기회를 줘야하지 않겠는가?”

“…?”

알 수 없는 말에 셰실리코프는 물음표를, 크레파토스는 뒷짐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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