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5 삼광(三光) 셰실리코프 =========================================================================
“기사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밥줄 놓으라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구려.”
기사가 대부분 귀족자제이기에 교양도 익히고, 예의범절도 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존재이유는 전투를 위해서였다.
그런 기사들 중에서도 수위를 달리는 셰실리코프에게 싸움은 슬픔을 낳는다니, 그러면 안 된다니 하면서 혼을 내는 것은 시비를 건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라….”
“아무튼, 나에게 신경 쓰지 마시오. 이 지루한 연회가 끝나기만 하면 두 번 다시 나와 볼 일은 없을 것이니. 그럼 이만.”
벌떡.
셰실리코프는 술에 취한 발걸음을 옮기며 비틀비틀, 자리를 이동했는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션샤인의 눈망울엔 아련함이 서리고 있었다.
“아…….”
짧은 탄식, 그것이 그와 그녀의 만남의 시작이었다.
* * *
그러한 만남 이후 셰실리코프와 션샤인은 이상할 정도로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무도회는 보통 열리게 되면 1주일간 지속되곤 했는데, 현재의 왕실에선 부담이 갈 수도 있는 비용이 소모되었으나 매번 참석해주는 션샤인으로 인해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면 싸게 일을 치른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셰실리코프는 얼굴을 비춰야했는데, 션샤인은 그런 그에게 스스로가 다가가 말을 걸곤 했다.
불미스런 일을 겪은 이후라서 그녀의 호위는 배로 불어나 있었으나 차마 셰실리코프에게 위협을 가하진 못했다.
아니, 그들 몇이 모인다고 해서 위협이나 될는지 의심이 갔다.
“아가씨, 삼광은 성격이 난폭한 것 같습니다. 가까이 해서 좋을 게 없는 인물이에요.”
시녀가 조심스레 그녀에게 조언을 올렸으나 언짢은 표정의 셰실리코프는 시녀의 말을 들으면서도 묵묵하게 자세만 잡고 있었다.
‘익스퍼트 중급 초입인 것 같군.’
소드익스퍼트 중급에 들어선 인물이 주변을 둘러싼 건장한 체구의 기사들이 아니라 바로 이 시녀라는 점에서 살짝 놀란 셰실리코프.
전날 자신의 살기에 짓눌렸기에 애송이인줄 알았거늘, 생각보다 많은 마나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실전을 겪은 적이 별로 없어 살기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발생하는 일이었으리라.
“기사님이 앞에 계시는데 그런 말씀은 실례세요…, 아. 저기, 기사님?”
“…하아, 그냥 날 좀 내버려두면 안 되겠소?”
“기사님의 성함을 제게 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기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례인 것 같아서요.”
“…….”
‘내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일이 실례란 말이다!’
하지만 성을 내기도 어려운 상황, 셰실리코프도 그녀가 투툰 후작이 애지중지하는 보물이란 것을 알게 되었기에 선뜻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결국 져주는 것은 남작도 못 되는 작위를 지닌 셰실리코프였다.
“…호는 삼광(三光), 이름은 셰실리코프요.”
“성은 어떻게 되세요?”
“그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소만.”
보통 성을 먼저 말해 이름대신 그것을 부르는 게 서로간의 예의였는데, 셰실리코프는 세간에 알려진 이름이 이것밖에 없었다.
불릿도 그를 부를 때는 이름만을 불렀으니 뭔가 숨기는 일이 있는 듯했다.
“그러지 마시고 알려주시면 고마울 것 같아요.”
“칫.”
“삼광이시여, 이분에게 함부로 대하신다면 뒷일은 저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교육을 제대로 받은 것인지 주변의 기사들은 묵묵히 주변을 경계할 뿐이었으나, 자신에게 향해지는 시선은 또렷이 느낄 수 있던 셰실리코프.
게다가 살기에 숨이 턱 막히던 모습이 바로 어제였거늘, 이 건방진 시녀는 겁도 없이 자신에게 또 다시 달려들고 있었다.
남자보다 아래라 여기던 계집이 계집을 모신다는 것이 웃겼으나 분명 투툰 후작의 분노를 감당하기란 버거운 것이었다.
“……실라이온, 셰실리코프 실라이온 퓨쳐 실피드요. 이제 알았으면 그만 가시오, 부탁이니까.”
“처음 듣는 성이시네요. 혹시 이름의 구성에 대해서 알려주실 수도 있으신가요?”
생글생글, 보는 이가 절로 미소 짓게 되는 따스한 얼굴의 그녀에게 셰실리코프는 한숨을 푸욱, 내쉰 후 말을 잇는다.
“시조께서 바람의 정령사셨는데, 실라이온은 당시 바포가로부터 성을 부여받을 때의 경지를 뜻하고 퓨쳐는 달성해야 할 숙원을, 실피드는 목표요.”
바포가가 정령술로 일어섰다면 그들을 주변에서 보필하는 가신들 또한 정령술을 하사받거나 익히고 있던 경우가 많았다.
셰실리코프의 숨겨진 성은 현재에 정체되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 정령왕이라고도 불리는 최상급 정령 실피드까지 닿으라는 의미였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에 와선 하급 정령의 소환에도 실패하는 입장이었다.
소환과 계약은 다른 문제였기에 소환조차 못하는 자신에게 좌절해 부모에게서 받은 이름만을 남긴 채 성을 숨겼던 것이다.
‘제기랄, 떠올리기 싫었는데.’
현재에 이르러선 대륙 전역의 수준이 낮아졌고, 그나마 중급이라도 유지하는 가문은 바포가가 유일했다.
나머지는 홀로 중급에 올라서더라도 후손이 그에 미치질 못했으니, 바포가가 왜 변경백의 군림자인지 알 수 있던 대목이었다.
가신들 중에는 셰실리코프와 비슷한 자들이 많았는데, 한때 정령사였다는 증거인 성을 사용하기가 부끄럽기도 하고, 성에서 정령사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기에 암살자의 표적이 되기도 해서 숨기게 되었다.
“어머나, 그럼 제가 어떻게 불러드리면 될까요?”
그의 표정이 썩은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천진한 5공녀의 말에 셰실리코프는 말을 툭하니 내뱉었다.
“그냥 이름으로 부르시오. 이제 정령사도 아니고, 그래서 검의 길을 걸은 것이니까.”
시조가 정령사인 가문에서 소드익스퍼트 상급이 탄생하긴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는 홀로 그것을 해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준남작의 작위에도 성(姓)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성(城, castle)을 유지할 수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말에 션샤인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아, 아가씨!”
사라락-.
곱게 빚은 그녀의 머리칼이 흘러내리며 드레스의 가슴골이 엿보였으나, 그녀는 그러한 점에 아랑곳 않고 셰실리코프에게 사과를 구했다.
“죄송해요, 제가 상처를 드린 걸까요?”
“…아니오. 지금에 와선 오히려 이게 내 적성에 맞는다 생각하니까.”
분명 소드익스퍼트 상급이 중급 정령사보다 강한 편에 속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령사와 검사의 일대일 대결에서나 그렇고, 그 외를 제외하자면 중급 정령사의 쓸모가 훨씬 더 많았다.
게다가 바포가는 대대로 정령사인 가문이었기에 특유의 노하우와 비술이 있어 여타 정령사들보다 더 강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불릿은 대영주의 위치였고 자신은 그에게 영토의 관리를 부여받은 영주였으니 할 수 있는 일도 적었다.
한때 불릿보단 게슐린 그랩 자작이 낫다 생각하여 그에게 붙었던 일도 있었으나, 결과는 보란 듯이 불릿의 압승이었다.
결국 마스터의 경지가 되지 않는 이상은 자신은 일개 검사일 뿐이란 사실이다.
“…강하시네요, 정말로.”
반짝반짝.
“웃…, 따, 딱히? 그렇지도 않소만….”
“존경스러워요, 자신이 스스로 길을 개척해서 나아가신다니 말이에요.”
사르륵…
그러면서 그녀는 드레스자락을 짚고선 그가 앉아있는 소파의 옆자리로 옮겨가 밀착을 했다.
“아가씨, 그 이상은 후작님께서….”
“좀 더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셰실리코프님.”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심이 담긴 그녀의 눈동자에 평소 여자를 얕보던 셰실리코프는 점차 마음이 흔들림을 느끼고 있었다.
* * *
“…….”
“……….”
“……?”
한참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불릿은 그대로 얘기가 멈추자 입을 열어 셰실리코프에게 말을 건넸다.
“왜 더 말을 잇지 않는가? 아직 더 있을 법한데.”
“그것이….”
뭔가 말하기를 꺼려하는 모습, 그러나 불릿은 단호할 땐 단호한 단호박(?)이었기에 근엄하게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본인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도움은 바라지도 말아야할 것….”
“샤인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눈을 질끈 감고서 소리치는 셰실리코프에게 불릿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그러나 그는 선택을 내려야하는 위치에 있는 존재, 이러한 정신적 공황은 순식간에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게 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지?”
“…아마, 맞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미친….”
그리고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크레파토스가 순간 난입했다.
“이런 후레자식을 보았나! 감히 공녀의 몸에 손을 대?!”
지금까지 둘을 이어주자고 주장하던 것과는 다르게 불같이 화를 내는 노장의 모습에 불릿과 유실리아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저렇게 격한 감정의 표출은 과거 직스 자작령에서 그를 제압했을 때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으니 지금 그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알 수 있었다.
팔까지 걷어붙이며 무릎 꿇은 셰실리코프를 후려치려던 것을 불릿이 간발의 차로 막았다.
척.
“그만, 거기까지 하도록.”
“…각하, 제가 실수를 하였습니다. 설마 공녀에게 손을 대고서 이딴 헛소리를 지껄였을 줄은…, 죽여주시옵소서!”
노장의 허리가 거의 구십도로 꺾이자 불릿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 그의 허리를 펴주었다.
“그만하래도…그래서 뒷말을 생략한 것이로군.”
“죄송합니다, 각하! 하지만, 하지만 제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실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개잡것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냐!”
다시금 크레파토스의 불같은 성미가 터져나오려하자 불릿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유실리아를 쳐다보았다.
“유실리아, 크레파토스를 데리고 나가도록.”
“하지만, 각하의 안전이….”
“둘만 남아있고 싶다. 이래가지곤 대화가 성립되질 않으니 나가보도록.”
“…알겠습니다, 각하. 가시죠, 호위대장님.”
“크으으….”
크레파토스는 화를 억누르기가 힘든 모습이었으나 딸처럼 여긴다는 유실리아의 손길에 따라 억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이…
달칵.
둘만이 남게 되자 불릿은 자리에 털썩 앉고선 이마를 짚었다.
“후우, 확실히 크레파토스의 말이 틀리진 않군.”
“각하…….”
“한가지 묻지. 그녀와 억지로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겠지?”
불릿의 물음에 셰실리코프는 고개를 번쩍 들고선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절대, 절대 아닙니다! 제 호를 걸고서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셰실리코프의 호는 삼광(三光), 그것은 홀로 검술을 연마하며 일궈낸 경지에 스스로가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명예라고 부를 수 있는 호를 내거는 것을 보니 그가 거짓을 하는 걸로 보이진 않았으나 불릿은 그것만으로 그를 판단하기란 이르다 여겼다.
“5공녀는 지금 어디에 있지?”
드디어 불릿이 5공녀에 대해서 묻기 시작하자 셰실리코프의 얼굴은 한층 밝아진 모습이었다.
“옛! 샤인은 지금 투툰 후작의 부름을 받고 거처로 돌아간 상태입니다!”
“…부름을 받다? 어찌하여?”
투툰 후작이 그녀를 총애하긴 하나 직접 명령을 내리며 부를 정도로 중요한 일을 맡기진 않는다.
그나마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각종 사교모임에 참석해 분란을 조정하는 정도인데, 불릿이 알기론 투툰 후작이 자식을 불러들이는 일은 거의 없던 것이다.
불안감이 엄습하는 가운데 불릿은 셰실리코프에게서 터져나오는 말에 골을 싸매게 되었다.
“그녀와 관계를 맺은 다음날 급한 일이 있어 돌아간다고 그녀의 호위를 맡던 시녀가 말하더군요.”
============================ 작품 후기 ============================
저녁 6시에는 3편, 밤 12시 10분에는 1편이 올라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