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4 삼광(三光) 셰실리코프 =========================================================================
잔잔하게 흐르는 악사들의 음악, 은은한 조명과 거기에 더불어 뷔페식의 다과는 담화를 즐길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있었다.
‘지루하군.’
셰실리코프는 그런 그들과는 별개로 한쪽 구석을 홀로 차지하고 있었다.
저들의 대화가 칼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또 다른 전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지루함은 떠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는 잔에는 와인이 담겨 있었으나 딱히 마시려는 것은 아니었고, 그냥 손이 허전해 구색만 갖춰둔 모양이었다.
“하아.”
얕은 한숨을 내쉬던 그는 찰랑이는 와인잔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인가….”
왕실에 선전포고를 가한 구울 백작은 주변의 군벌들에게 으름장을 가하며 끼어들지 말라 경고를 보내왔고, 이에 중립지역인 이곳도 안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안전상의 이유로 바포 변경백에선 그나마 구색을 갖추면서도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셰실리코프를 파견했던 것이다.
지금 이 자리를 채우는 귀족들 대부분이 왕실파라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사교모임은 끝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쯧,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애써 불안함을 감추고선 필사적으로 몇 안 되는 다른 파벌의 귀족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왕실파였으나 그들은 정보를 얻으려고 온 것이지 이미 망해버린 왕실파에겐 별로 관심이 없어보였다.
찰랑-.
그의 손길에 따라 흔들리는 와인잔에는 진홍빛의 와인에 근심어린 셰실리코프의 얼굴이 비춰지고 있었다.
“투툰 후작령의 션샤인 폰 투툰 5공녀께서 입장하십니다.”
웅성웅성.
금방이라도 파할 것 같았던 무도회의 분위기가 금세 달아오르며 소란스러워지자 고독을 씹고 있던 셰실리코프도 고개를 들어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드드드득-
“입장이오!”
거대한 문이 양쪽으로 열리며 화려하게 등장하는 여성, 그녀가 발을 디디는 곳엔 오직 투툰의 제 5공녀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그녀를 바라보는 가운데, 이 지루하면서 쓸모없는 무도회장을 유지하고 있던 진정한 이유가 밝혀지고 있었다.
우루루루!
“안녕하세요, 공녀님! 저는 구스타프의 차녀 베질리아라고 해요!”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왕실 친위대의 장녀 본 아르….”
“저는!”
“저도!”
미칠 듯이 몰려드는 레이디의 물결에도 상냥한 5공녀는 절대 그녀들을 물리는 일이 없었다.
“진정들 하시구요, 다들 즐기러 오신 거니까 다 같이 대화를 해보아요.”
파아앗-
“으윽, 눈부셔…!”
“결혼하고 싶다!”
“아아아, 친절도 하시어라!”
왕국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는 투툰 후작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신분임에도 그녀는 절대 오만함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몰락한 왕실파에게도 그 친절을 베풀어주고 있었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녀가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이 무도회는 바로 중지될 것이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 사교모임의 규모는 축소되어 그냥 다과회로 전락할 것이다.
“저기 저분은 처음오신 분 같은데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저분은….”
“누구지요, 저 신사 분은?”
“알렉산더 경, 저분을 아시나요?”
수많은 여성들 사이에서 몇 안 되는 남성인 알렉산더라 불린 기사가 있었는데, 그의 이마에는 살짝 땀이 맺히고 있었다.
“……꼭, 말해야 합니까?”
“아니, 알렉산더 경. 그 무슨 불경한 말이세요? 이분이 누군지 잊으신 건가요?”
눈매가 살짝 올라간 레이드의 가시 돋친 말에 알렉산더는 눈치를 보다가 궁금하다는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순수의 결정체가 자신을 보고 있었기에 결국 입을 열고야 말았다.
“후우, 저기 앉아있는 자는 바포 변경백 출신으로, 아마 여러분도 별호는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누구시기에 그리도 장황하게 말씀하시는 거죠?”
“그의 이름은 셰실리코프, 삼광(三光)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웅성웅성.
5공녀가 등장했을 때보다는 낮은 반응이었으나 전혀 관심을 못 받던 것과는 달리, 의외라는 소리와 함께 살짝 달아오르는 반응이 나타나고 있었다.
“삼광? 삼광 말씀이신가요?”
“엄청 유명한 기사님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에요….”
“저분이 누구시기에 그러시죠?”
이곳에 자리한 인물은 대부분 왕실파이기 때문에 루드밀라의 국민으로서 삼광을 모르는 이가 더 드물었다.
그러나 전쟁을 싫어하는 5공녀의 경우, 무력과는 담을 쌓은 사람이기에 그를 모르고 있었다.
“어머, 공녀님께선 삼광 셰실리코프님을 모르시나요?”
“제가 기사님들에 대해선 아는 게 적어서요….”
시무룩한 그녀의 반응에 주변의 모두가 호들갑을 떨었다.
“모르실 수도 있지요오, 그렇죠 여러분?”
“네.에. 모.르.실.수.도 있.지.요.아.하.하.”
“하.하.하.”
‘삼광을 모르시나? 엄청 유명한 분이신데??’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러세요! 투툰 공녀님에게 무안 주시지 말고 웃어요, 웃어!’
그리고 그들의 어색한 속삭임은 소드익스퍼트 상급에 오른 셰실리코프의 귓가엔 바로 코앞처럼 들리고 있었다.
‘국내의 정세에도 어둡다니, 뭐하는 년인지 모르겠군.’
셰실리코프는 전형적인 무력형 검사였기에 스스로의 검술에 자신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마초성향이 있었기에 여성을 얕보는 행동을 보이곤 했다.
“흥, 그래봐야 계집이지.”
‘각하의 반의 반도 못 따라오는 년에게 알랑방귀나 뀌는 것들.’
그는 승작제한을 받았으나 불릿에게 유감은 없었다. 오히려 복권한 이래 그가 보이던 반역자에 대한 행보를 보면 자신을 형벌에서 벗어나게 해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이 자리에 불만이 있기에 구시렁거리다 손에 든 와인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꿀꺽, 꿀꺽!”
한줄기 붉은 와인이 턱선을 타고 흘렀는데, 평소 술을 멀리하던 무인인 셰실리코프의 심정이 얼마나 불편한지를 알려주는 대목이었다.
화기애애함을 조성하려는 무도회장의 중심에서 호호하하 웃는 사람들의 속에서도 5공녀는 그가 신경 쓰였는지 그들을 헤치고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천천히 드세요, 그러다 체하시겠어요.”
“…남이사 어떻게 마시든 무슨 상관이오.”
위치가 어떻든 간에 여성은 남성보다 한 계단 아래라고 여기는 셰실리코프에게 있어 5공녀 또한 여러 여자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렇게 급하게 먹는 술은 금방 취하는 법이었고, 게다가 그는 평소 술을 멀리하는 인물이었기에 단련된 육체를 지녔어도 쉬이 취했다.
한층 거칠어진 그의 음주행위에 5공녀 션샤인 폰 투툰은 자연스럽게 뒤로 손바닥을 넘겼는데, 그녀를 따라온 시녀가 기품 있게 넘겨진 손바닥에 꽃이 자수된 손수건을 올려주었다.
션샤인은 셰실리코프가 흘린 와인을 닦아주었는데, 셰실리코프는 약간 취한 상태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손길에 움찔했다.
“뭐하는 짓이오?”
“의복이 젖으시니까요.”
“…손이 나갈 뻔했잖소.”
그가 움찔거린 이유, 그것은 순간 션샤인의 팔목을 비틀어버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기 때문이다.
평소 마시지 않던 술에 취한 상태이기에 그의 판단력은 흐려져 있었고,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도 반응이 느렸던 것이다.
무술의 무자도 모르는 5공녀가 상남자인 그의 손길에 무사할 리가 없었기에 그는 하마터면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공녀께서 왜 저분에게 다가가신 거지?”
“공녀께서 위험하진 않으실까요?”
“레이디, 삼광은 전장에서만 검을 휘두릅니다. 공녀의 심기를 거스를 순 없으니 일단 지켜봅시다.”
이 무도회는 어디까지 5공녀 션샤인을 위한 자리, 원래의 명목은 저 멀리 사라지고 없었기에 그녀가 원한다면 뭐라도 들어줘야 할 판이었다.
특히 참석인원 대부분이 왕실파였기에 루드밀라가 춘추전국시대에 돌입했으면서도 아직까지 국가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인 션샤인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었다.
왕실파의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삼광 셰실리코프의 심기는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다.
“내 의복이 젖던 말던 신경 쓰지 마시고 저리로 가서 노시오. 귀찮으니까.”
“네? 제가 귀찮으세요? 왜 그러시지요?”
진정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션샤인에게 셰실리코프는 속으로 숨기고 있던 감정까지 끄집어냈다.
“계집이 남자가 하는 말에 고분고분할 것이지, 어디서 말대답이더냐? 좋은 말로 할 때 저 연놈들처럼 소꿉장난이나 해라.”
“삼광이시여, 말이 지나치십니다. 이분은 투툰 후작각하의 제 5공녀가 되시는 분이올진데, 어찌 그런 천박한 말을….”
“하녀, 죽고 싶나?”
말이 거칠었기에 참다못한 하녀가 앞으로 나서며 그를 질책하자 삼광이 살기를 풀며 노려보았다.
덜덜덜-.
“커, 커억, 컥!”
하녀도 션샤인을 지키기 위해 실력이 보증된 인물 중 하나였는데, 셰실리코프의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숨이 턱 막히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런 하녀의 반응에 션샤인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척.
“그만하세요! 이러시면 안돼요!”
스윽…
공녀가 끼어들자마자 셰실리코프는 바로 살기를 거뒀는데, 그제야 자신이 취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히 말을 돌렸다.
“날 귀찮게 하지 마시오. 어차피 이번 무도회가 끝나면 다신 오지 않을 사람이니까.”
“허억, 허억, 아, 아가씨! 피하세요! 이자는 위험인물….”
“타냐도 문제예요! 제가 싸우지 말라고 했잖아요? 대체 왜 그러셨어요!”
하녀가 숨을 고른 후 션샤인을 뒤로 물리려하자 그녀는 타냐에게 또박또박 혼을 내었다.
“아, 아가씨?”
“그러지 마세요, 제발. 타냐가 다치면 제 맘은 미어진답니다.”
글썽글썽-
금방이라도 옥구슬 같은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션샤인의 맑은 눈망울에 타냐는 뭐라 말을 하려다가 관두고선 깊게 고개를 조아렸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아가씨.”
“저랑 약속한 거예요? 알았죠?”
“네.”
꼬옥.
션샤인은 그녀의 손을 힘주어 잡아주고선 따스한 말을 건네주었다.
그 후 션샤인의 타겟은 셰실리코프에게로 옮겨갔다.
“기사님도 그러시면 안 된답니다. 싸움은 슬픔만을 낳을 뿐이에요.”
“……허?”
셰실리코프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지만, 그의 눈은 동공이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금 이 여자가 뭐라고 하는 거지?’
관심이 필요 없는 자신에게 다가와선 쓸데없는 호의를 베풀고, 가라는 말에도 자꾸 귀찮게 굴었다.
그러다 건방진 하녀에게 한소리를 해주었는데, 미천한 계집을 대신해 그의 살기를 받아내려 했다.
자신도 놀랐을 텐데 그녀는 하녀를 먼저 생각해주었고, 그러면서 가해자인 자신에게 조언을 빙자한 혼을 내고 있었다.
이 어이없는 사태에 셰실리코프는 화가 나야할 텐데, 그보다는 조금 생소한 감정이 일어남을 느꼈다.
두근.
“……허?”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은데 와인에 취한 그의 입에선 그것밖에 나오질 않았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션샤인은 이름처럼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세상을 비춰주는 햇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