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3 삼광(三光) 셰실리코프 =========================================================================
“각하, 각하? 괜찮으십니까?”
크레파토스의 물음에 멍하니 있던 불릿이 바로 대꾸하였다.
“안 했어, 안 했다고.”
“? 무엇을 말이옵니까?”
“…아무것도 아닐세.”
불릿은 그에게 재차 답하고선 저번처럼 대지의 축복을 내리는 흙덩이를 지켜보았다.
마치 요정처럼 춤추듯 돌아다니며 땅의 기운을 북돋는 흙덩이를 보자면 싱숭생숭한 마음이 절로 치유되는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정령도 요정의 한 종류로 분류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자료수집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내일이면 다음 지역으로 이동해도 될 것 같습니다.”
마수의 숲과 인접해서 그런지 아래지역의 바스톤이나, 위쪽 셰실리코프의 남작령이나 비슷한 토질을 지녔다.
참고로 삼광 셰실리코프가 준남작임에도 남작령의 영주로 취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부족한 배경을 검술실력으로 메꾸었기 때문이다.
“유실리아는 보이질 않는군요.”
그녀는 호위의 임무를 띠었으므로 언제나 불릿, 또는 흙덩이의 시야가 닿는 곳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유사시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그들을 지켜줄 수 없었기에.
그런데 오늘은 어찌된 영문이지 호위병대 책임자인 크레파토스의 눈에도 보이질 않고 있었다.
이에 불릿은 난감한 듯 주춤하다 입을 열었다.
“오늘은 본인이 휴식을 취하라 명했네.”
“사유를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비록 유실리아가 크레파토스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진 않았으나 그가 살아온 세월만 하더라도 근 50이다.
자신이 먼저 눈치 채고 여러모로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밀어주려고 했었는데, 이런 중요한 시기에 불릿에게 미움털이라도 박힌 것은 아닐지 걱정이 들었던 것.
지금 불릿은 셰실리코프 때문에 날이 선 상태였으니 말이다.
“……자네가 그랬나?”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역시 그랬군, 후우.”
그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이마와 함께 꾸욱꾸욱 집게손가락으로 눌렀는데, 아무래도 유실리아가 보이지 않는 것과 연관이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어째서 그토록 청순하고 얌전하던 유실리아가 그런…후우! 아닐세, 아니야! 그냥 앞으로는 그런 짓을 시키지 말도록!”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유실리아가 실연을 겪은 것은 아닐지 걱정되는 마음에 크레파토스가 조심스레 묻자 불릿은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말을 내뱉었다.
“딱히 싫은 건 아니네만, 본인에겐 올리비아도 있고, 흙덩이도 있으니 더 이상 손을 대는 것은….”
‘기회다!’
연륜이라고 해야 할지, 크레파토스는 불릿이 유실리아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파악하고 얼른 말을 이었다.
“유실리아도 정부의 자리는 바라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저 각하의 곁에서 머물 수만 있다면 첩이나 밤시중 상대로도 만족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녀가 불쌍하지 않은가? 그리고 자네는 왜 그녀를 그토록 밀어주려는 것이지?”
불릿이라고 해서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고, 어제의 사건을 통해 유실리아가 이번 여정에 합류한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고, 크레파토스가 자꾸 그녀와 함께 있을 시간을 주려는 것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그런 불릿의 낌새를 크레파토스도 깨달은 것인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하였다.
“유실리아는 제가 딸처럼 기르는 존재입니다. 그런 그녀가 각하와 이어질 수 있다면 수고를 들이더라도 힘들지 않습니다.”
“내가 힘들단 말이다….”
이어지는 짙은 한숨, 그러나 아직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각하께서 그리 생각해주시니 유실리아나 저로선 고마울 따름이지만, 당장 다른 귀족들에게 눈을 돌리기만 하더라도 단순히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도 첩도 아닌, 한순간 불장난의 대상이 되는 여성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불릿이 가끔 찾아주기만 하더라도 첩이나 밤놀이 상대가 되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리라.
그의 성정상 찾다보면 정이 들 테니까.
거기까진 파악하지 못한 불릿은 그런가 싶었으나 떨떠름해했다.
“각하, 기회라도 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저 밀어내기만 하신다면 그녀에게도 상처만이 남을 뿐이며 각하께서도 언짢으실 것으로 예상되옵니다.”
“올리비아가 싫어할 텐데…….”
“마님도 이해하실 겁니다. 무엇보다, 말씀하신 것과는 다르게 이제 슬슬 한계가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
물음표를 띄운 불릿이 그를 바라보자 크레파토스는 저 멀리, 흙과 함께 뛰노는 흙덩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작은아씨께 아직 손을 대기 힘드시다면 유실리아에게 손을 대십쇼. 그녀는 오히려 환영할 것입니다.”
크레파토스는 흙덩이가 껴안아올 때마다 살짝 부풀려다 가라앉는 불릿의 바지춤을 보았던 것이다.
* * *
탁, 탁, 탁.
불릿은 빠르게 흔들고 있었다.
“으으음….”
얕은 신음성, 그것은 이전의 행보와 대립되는 지금의 행동에 대한 고민을 대변하는 것이리라.
이윽고 흔들림은 절정이 되어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탁!
불릿은 절정이후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있었는데, 그러다 다시금 흔들리기 시작했다.
탁, 탁, 탁-
“반드시 5공녀와 이어지고 싶은가?”
“그렇습니다, 각하!”
불릿은 그토록 냉정하고 냉철하던 셰실리코프가 안전부절 못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전날 밤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그만두라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제발….’
크레파토스와 대화를 나눈 직후 휴식을 명했던 그녀와의 첫 대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꽤나 충격적인 말이었기에 불릿은 저도 모르게 상처를 주었던 유실리아에게 죄를 지은 듯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해준 것도 없거늘, 어찌하여 본인을 사랑하는 것일까.’
눈물을 줄줄이 흘리며 비련의 여주인공마냥 바닥에 주저앉은 유실리아에게 다가간 흙덩이가 그녀를 보듬으며 불릿에게 말을 건넸었다.
‘나는 유실리아라면 괜찮아! 잔소리는 싫지만, 걱정해준다는 것이 여기로 느껴져.’
그러면서 자신의 심장이 위치한 가슴을 꾹 누르던 흙덩이.
불릿은 흙덩이가 유실리아를 보듬도록 맡기고선 그렇게 밤을 지새웠다.
그러는 와중에 자존심도 버리고 사랑을 쟁취하려는 셰실리코프가 떠올라 이전의 선택을 번복하게 되었다.
“기회를 주지. 본인을 설득할 수 있다면 5공녀와의 교제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군.”
‘음? 뭔가 이상한 것 같은 기분이….’
불릿은 지금 그가 아들의 결혼에 반대하는 아버지처럼 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 40이 넘어서 이제야 막 연애를 시작하고 있으니 그러한 점에 대해서 알 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셰실리코프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서인지 마치 전장으로 떠나는 것처럼 굳은 결의가 서리고 있었다.
“브,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투툰 후작가의 5공녀로 할 것 같으면 현 투툰 후작의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하고 있는 인물로서, 그녀의 말이라면 죽고 못 사는 투툰 후작이기에 전쟁을 싫어하는 샤인의 영향덕분에 전쟁억지력이 형성될 수 있고, 또…!”
“그만, 그만! 그런 거 말고!”
“…또, 이걸로는 부, 부족하십니까?!”
“아니, 누가 그녀로 인해 발생되는 이익에 관해 설명하라고 했는가?”
“그럼 어떻게 설득을 해드려야 할지….”
분명 불릿은 투툰 후작에게 바포 변경백에 대한 명분을 줄 수 있기에 그의 핏줄과의 혼인을 반대한다고 했었다.
그러니 그녀로 인해 발생되는 이득과 불릿의 걱정을 잠재울 수 있는 점에 대해서 역설했던 것인데, 그걸 제하고서 대체 무슨 말을 하라고 하는 것인지 셰실리코프는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로 인한 장점은 단점에 비해 터무니없이 미미하다. 잠재적 위험성이 장점을 덮어버릴 정도로 크니 그러한 점을 부각시켜봤자 소용없다는 말이지.”
“그, 그런….”
좌절한 듯한 자세를 보이는 셰실리코프였으나 아직 불릿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자네는 그녀와 어떻게 해서 인연을 맺었는지 알려줬으면 좋겠군.”
“예? 샤인에 대해서 말입니까?”
“그래, 지금도 애칭으로 부르는 5공녀에 대해서 말이네. 본인이 생각하기론 자네가 5공녀와 만난 시기는 반역자 그랩 자작의 목을 가져왔을 때로부터 지금의 사이라고 생각되는군.”
오싹!
테이블에 손가락을 두들기며 말을 잇는 불릿의 발언에 셰실리코프는 소름이 돋는 것을 알 수 있었다.
5공녀와 자신에 대해선 아무런 얘기도 일러주지 않았는데 불릿은 단순한 대화만으로 만난 시기를 추측했던 것이다.
‘행보가 드러난 것인가?’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가정을 해봤으나 그러한 가정은 곧바로 폐기되었다.
엊그제 불릿이 보였던 반응은 분명 처음 듣는 자의 그것이었다.
그러니 이러한 추측을 떠올린 것은 3일 사이에 이루어졌다는 뜻, 게다가 이곳에선 정보를 수집하기에도 여의치 않은 타지역이었으니 더욱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기회, 그러나 위기이기도 하다.’
꿀꺽, 침을 삼킨 셰실리코프는 자신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와 만난 것은 왕실 주도의 무도회였습니다. 본래 그곳에 임무를 받는 것은 가신들의 여식들이 담당하였으나, 구울 백작의 왕실에 대한 위협이 극에 다다랐기에 위험성이 높아 제가 가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란푸스 왕국을 제외하면 바포 변경백의 일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
같은 국가라곤 하나 루드밀라는 현재 춘추전국시대에 돌입한 상태, 게다가 바포 변경백은 진입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튼튼한 수비력을 자랑했기에 외부에서 함부로 침입하기 어려웠다.
아직 불릿의 귀환을 알리는 것은 시기상조, 적어도 예전만큼 정비가 이루어져야 귀환사실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릿이라는 위험요소를 결사대로 집어넣어 흑마법사와의 결전에 강제로 이용한 주변 파벌들이 그를 위협요소로 느끼고 약해진 영토를 노리며 쳐들어올지 몰랐으니까.
“사교계라 하여 레이디만 참여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제가 가는 것에 그리 큰 의심을 받진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런 곳은 처음인 터라 레이디들이 다가오길 꺼려하더군요.”
아니다, 레이디들이 그에게 다가오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귀족가의 여식들도 무력의 중요성을 안다. 그렇다곤 하나 바포 변경백에 틀어박혀 검술만 연마하는 천생무인인 삼광(三光) 셰실리코프가 그녀들에게까지 유명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이름은 어디까지나 검사들 사이에서나 알려졌으니 말이다.
불릿에게 경고와 함께 승작까지 제한 당하자 가뜩이나 말수가 적은 셰실리코프는 우중충한 분위기까지 풍기고 있었다.
사교계가 아무리 웃는 얼굴로 비수를 숨기는 전장이라곤 하나, 그렇다고 대놓고 ‘나는 불행해’라는 포스를 물씬 풍기는 남자에게까지 관심 갖진 않을 것이다.
‘그때 그녀가 다가와 줬었지.’
긴장한 상태로 불릿에게 이야기를 이어가면서도 한줄기 미소가 어리게 만드는 존재, 바로 그녀가 투툰 후작령의 제 5공녀, 션샤인 폰 투툰이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으어어...오늘도 추천과 선작에 감사합니다..
내일(일요일)은 추천 1900기념과 선작 1100기념으로 3화가 더 연재되어 총 6화가..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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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3시간 단위로 올리려 했으나 그렇게 하면 읽는 독자분들이 번거로울 것 같아서 낮 12시에 2편, 저녁 6시에 3편, 밤 12시 10분에 1편 총 6편을 연재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