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2 삼광(三光) 셰실리코프 =========================================================================
성난 불릿이 연신 씩씩대는 가운데, 삼광(三光) 셰실리코프는 죄인이라도 되는 양 두 주먹을 꿇어앉은 무릎위에 올린 뒤 얌전히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가 너무도 불쌍해 보였는지 흙덩이는 여름과 어울리는 하늘하늘한, 민소매 원피스를 살랑거리며 콧김이 치솟는 불릿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꼬옥-
“화내지마, 응? 저 사람은 나쁘지만 사랑은 나쁜 게 아니잖아.”
“…그렇지. 후우우…, 고맙다, 흙덩아.”
“쓰다듬어줘.”
애교를 부리는 흙덩이에게 불릿은 그에게 침착함을 되돌려준 보답으로 이제는 무의미해진 친밀을 위한 의식을 해주었다.
스윽스윽.
그러나 흙덩이는 이것도 부족했는지 그의 손을 잡더니 아래로 내린다.
“거기 말구, 등에다 해줘.”
“등? 하지만 거긴….”
이제는 너무도 거대해진 가슴을 고정시켜주는 속옷의 끈이 위치하고 있었기에 선뜻 손을 대기 거북했다.
하지만 흙덩이에겐 무엇 하나 안 해주고 싶은 것이 없었기에 결국 새하얀 목덜미가 인상적인 그녀의 날개를 어루만져주었다.
사라락, 틱, 사라락, 틱-
중간중간 후크가 걸렸으나 흙덩이는 그의 손길이 마냥 좋다고 싱그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제 화내지 않을 거야?”
그녀의 말에서 불릿은 이게 약간은 의도된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사랑을 위해 자존심도 내버린 셰실리코프를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삼광의 변명을 들어보도록 할게.”
“역시 불릿이 최고야!”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만든다고, 그토록 심각한 분위기가 감돌던 장소가 흙덩이의 애교한방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가 기회라 여겼는지 셰실리코프가 냅다 말을 던진다.
“백작각하! 그녀와 맺어질 수 있도록 부디, 부디 도와주시길 간절히 바라나이다!”
너무도 애달픈 간청에 이를 지켜보던 유실리아의 콧등이 시큰거리고 있었고, 크레파토스는 그를 도와주려는 것인지 말을 덧붙여주었다.
“각하. 공녀와의 혼인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줄로 아옵니다.”
“대체 무슨 이득이 있지? 본인도 연인이 생겼기에 웬만해선 죄가 있는 삼광이라 할지라도 용인해줄 의양은 있다. 그러나 그게 투툰가의 혈통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허나 5공녀라 하면 성정이 순하고 투툰 후작의 피가 섞인 것에 걸맞은 지성을 지녔다 합니다.”
“마, 맞습니다, 각하! 그녀는 전형적인 루드밀라의 여식인지라 매우 고운 마음을 지녔기에 바포 변경백에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옵니다!”
크레파토스가 거들고 셰실리코프가 외치자 슬그머니 그들의 틈에 참여하는 유실리아.
“5공녀는 상당히 유명한 인물입니다, 각하. 투툰 후작은 경계하는 것이 옳은 일이오나 투툰 후작이 그녀를 얼마나 아끼는지에 대해선 사교계의 인물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 사교계에서만 알려진 인물이라더니 자네는 어찌 아는가?”
여성들의 경우 레이디라 불리며 우대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 외에는 다른 면에서 활약할 만한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 이름이 알려진 귀족여성들은 사교장에서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는데, 기사의 길을 걷는 유실리아가 아는 것도 이상한 노릇이었다.
불릿의 물음에 그녀는 살짝 안색을 붉히더니 작게 소곤거렸다.
“조금 관심이 있어서….”
“유실리아가 드레스를 입고 사교장에 나타났다 하면 그날은 난리가 납니다. 어찌나 아름다운지 춤 신청이 줄을 잇는다지요.”
“어머, 크레파토스님…?”
예상외의 지원사격에 유실리아의 부드러운 눈매가 크게 뜨이자 크레파토스는 불릿이 볼 수 없는 각도에서 몰래 눈을 찡긋했다.
‘감사합니다, 크레파토스님….’
그녀는 속으로 크레파토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수줍은 얼굴로 불릿을 바라보았다.
“그, 그냥 옷이 예뻐서 입어보고 싶었습니다.”
“흐음, 그런가? 그래서, 투툰 후작의 공녀를 그곳에서 보기라도 했는가?”
그러나 이러한 지원사격에도 불릿은 투툰 후작의 공녀에게만 관심이 쏠려 있었기에 유실리아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에게는 관심이 없으신가 보구나.’
실망감도 들었으나 지금도 귀엽고 사랑스런 흙덩이가 가슴이 짓눌리는 것도 모르고 불릿에게 안겨있었으니 그녀에게 관심이 안 갈 만도 했다.
“하아…, 네. 왕실주최의 무도회에서 한번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힘이 없는 왕실에선 정치적으로라도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그 기획 중 하나가 바로 중립지역으로 알려진 왕실 영토에서 펼쳐지는 무도회였던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영향력 있는 인물들은 대부분 참가하지 않았고, 어느 샌가부터 여자들의 사교모임으로 변질되었었다.
그나마 왕국 제일이라 일컬어지는 투툰 후작령의 5공녀가 참가하지 않았더라면 폐쇄됐으리라는 얘기도 감돌았다.
“유실리아가 저희 영토의 일부 여식들과 함께 무도회에 참가함으로써 외부로의 정보를 습득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크레파토스가 이렇나 말을 꺼낸 데에는 유실리아를 변호해주려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놀러 다녔다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이유가 있었음을 알림으로써 불릿에게 호감을 심으려는 것이다.
“어땠나, 자네가 본 5공녀는?”
“션샤인 폰 투툰 공녀께선 루드밀라에 찾아온 혼세에 굉장히 슬퍼하셨습니다. 그분과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가족애가 강하다는 것과 그러면서도 루드밀라의 성향은 그대로 이어받아 선하면서도 분쟁을 싫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분쟁을 싫어한다라…, 이유는?”
“자신의 아버님에게 부탁해 영토전쟁을 멈추게 만든 공로가 있으십니다.”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나?”
“5공녀가 유명한 이유로는 투툰 후작의 행보를 막은 것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힙니다. 그가 영토싸움을 하지 않고 언제나 수비적인 성향을 보인 데에는 5공녀의 간절한 부탁이 있어서 그랬습니다.”
“왜 본인은 그러한 사실을 몰랐지?”
매우 중요한 정보였기에 바포 변경백의 지배자인 불릿이 지나쳐선 안 될 사항이었는데, 군주가 모르는 일을 한낱 평민출신의 여기사가 알고 있었으니 의심이 갔다.
“그것은….”
불릿의 물음에 줄줄 이야기를 내뱉던 유실리아가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불릿이 재차 되물으려하자 무릎 꿇고 있던 셰실리코프가 일어서서 허리를 깊게 숙였다.
“죄송합니다, 각하. 소신이 그러한 사실이 퍼지지 않도록 손을 썼사옵니다.”
“흠, 유명한 일화라더니 정보조작도 가능한가?”
“게슐린 그랩 자작을 억제하기 위해 투툰 후작이 영토확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숨기고 싶었습니다.”
적어도 루드밀라에서 가장 외진, 그러면서도 바포 변경백의 최전선에 위치해 있어 언제나 정보가 한발 느린 게슐린 그랩 자작에게만은 이를 숨기려 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죄가 아니라 상을 주어야 했으나 이것만으로는 불릿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너와 5공녀가 이어지는 것만으로도 바포 변경백은 그들이 무혈입성할 수 있는 핑계거리가 된다. 어떤 이유에서건 나는 그대를 포기할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5공녀와 맺어줄 생각도 없다.”
이 말은 5공녀와 이루어짐으로써 생기는 이득보다 기존의 안전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으로, 그녀와 삼광의 만남에도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하물며 너는 아직까지도 본인에게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릴 시간이 있으면 수련에 힘쓰고 영지의 안정에나 노력해보도록.”
그러면서 불릿은 ‘어흠’하는 기침소리와 함께 흙덩이를 데리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불릿을 호위하기 위해 동행했던 유실리아와 크레파토스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를 따라 방에서 나섰다.
달칵.
문이 닫힌 후 이곳에 남은 이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삼광 셰실리코프만이 홀로 외로이 고독을 씹고 있었다.
“햇살이….”
나직이 읊조리는 독백.
“…필요해…….”
그것은 불릿에게 닿지 않았다.
저벅, 저벅.
불릿은 흙덩이와 함께 복도를 거닐고 있었는데, 뒤에서 쫓아 따라온 크레파토스에게 입을 떼었다.
“크레파토스, 오늘은 별로 일을 진행하고 싶지가 않네. 그러니 이만 물러가도록.”
“각하, 진정 아니 되겠습니까?”
크레파토스의 물음에 불릿의 걸음이 멈췄다.
우뚝.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며 주름진 크레파토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영지의 안위가 우선인가, 아니면 자신의 과업도 잊은 채 사랑놀음을 하려는 삼광을 지지하는 것인가?”
“당연히 영지의 안위가 우선이옵니다.”
“사랑이 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고 그것에 대한 방안이 마련됐는지부터 고민한 뒤에 말하라 하시오.”
불릿은 막중한 책임감이 짓누르는 자리에 있었기에 애써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며 업무를 해왔었다.
그래도 결국 사랑이 결실을 맺긴 했으나, 그가 이러한 결실을 맺기까지 얼마나 노력했고, 또 괴로워했는지에 대해선 남모를 고민이 많았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셰실리코프는 검사라서 그런지 몰라도 평소의 영특함은 어디 갔는지 무식하게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자신이 벌이는 일에 대한 파장을 생각한다면 셰실리코프도 쉽게 이러한 간청을 올리진 못했으리라.
“또 다시 영토에 혼란을 초래했을 시엔 본인도 더 이상 그를 용서할 수 없으니 말이다.”
“…각골명심하겠습니다, 각하.”
여기서 불릿을 더 이상 붙잡았다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기에 뒤로 물러섰다.
유실리아도 한마디 하려다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에 입만 우물거릴 뿐,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아….”
그녀의 짧은 탄식은 갓 성년에 들어선 여성의 소녀의 마음과 여자의 마음이 공존해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완성되길 원했던 바람이 담겨있었다.
“이곳은 마기의 정화 후 토질검사만 마친 후 바로 출발할 것이니 그리 아시오.”
“준비해두겠습니다, 각하.”
“물러나라. 어흠.”
크레파토스는 말없이 물러나며 유실리아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작은아씨를 잘 모시도록.”
“예, 대장님.”
그는 한층 예민해진 불릿이 유실리아와 방을 잡도록 했던 흙덩이를 내버려두지 않고,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는 것을 보며 함께하지 못하는 자기대신에 유실리아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와앙! 오늘은 불릿이랑 논다아!”
푸울썩-!
불릿이 방문한다는 사실에 힘을 줬다는 티가 팍팍 나는 방에 들어선 둘, 아니 셋은 인테리어에 살짝 감탄사를 터뜨렸고, 넓고 안락한 침대에 흙덩이는 대뜸 몸을 던져선 누운 채로 방방 뛰었다.
“하하하, 불릿 이것 좀 봐! 여기 엄청 넓어!”
불릿은 흐뭇한 시선으로 어린아이처럼(겉모습과 별로 차이는 없지만) 몸의 반동을 이용해 웅크려서 뛰노는 흙덩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삼광이 신경 좀 썼군.”
“…저, 저기, 외람되오나 각하, 어쩐지 분위기가 미묘한 것 같습니다만….”
이상한 분위기가 연출된 객실에 유실리아가 들어서다 말고 주춤한 모습을 보였고, 불릿도 내심 동의하는지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바스톤에서 들었다고 하더니 이런 짓을 해놨나보다.”
“작은아씨와…합방하실 생각이십니까?”
“자네까지 왜 그러는가? 흙덩이는 아직 그런 걸 알만한 단계가 아니야.”
어떻게든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는 셰실리코프의 배려에 또 다시 그의 모습이 떠올랐으나 아직까진 불릿의 생각은 바뀌지 않고 있었다.
“언젠가는 하신다는 얘기로군요….”
“…? 그, 그렇기야 하겠지만 막상 입으로 말하려니 조금 그렇군. 크흠!”
부끄러운 기색을 보이는 불릿에게 유실리아는 마침내 결단을 내린 듯 그의 손을 잡았다.
덥석.
“무슨 일인가?”
얌전하던 유실리아가 그의 손을 붙잡자 어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 불릿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청순한 유실리아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변하자 어디 아픈가 물어보려던 불릿은 이어지는 그녀의 행동에 입을 싹 닫고 말았다.
물컹.
“저, 저랑도 해, 해주시겠어요?!”
그녀의 손길에 따라 불릿의 손이 향한 곳, 그곳에서 느껴지는 어색하면서도 익숙한 감촉은 유실리아의 가슴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밤 12시 10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