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1 삼광(三光) 셰실리코프 =========================================================================
불릿은 1주일의 시간을 두고 바스톤을 떠나게 되었다. 토질에 대한 검사도 있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브룩 남작과의 대화가 유익한 편이었기에 둘을 병행하다보니 생각보다 오래 머무르게 됐던 것이다.
“저기 있잖아,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아직 불릿의 영토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잘 모르는 흙덩이가 그의 품안에서 뒹굴며 묻자 불릿은 그녀의 볼살을 살짝 튕겨주며 답해주었다.
“바스톤에서 위로 올라가면 마찬가지로 마수의 숲과 인접한 영지를 가진 삼광 셰실리코프 준남작의 보금자리를 만날 수 있지.”
“…그 나쁜 사람?”
셰실리코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귀여운 흙덩이의 얼굴도 찌푸려지게 되었다.
삼광(三光)은 영지민들에게서도 좋은 소문을 들을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로는 박쥐처럼 이리저리 달라붙었다는 이유가 꼽히고 있었다.
“안 가는 게 좋지 않을까?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잖아.”
인간이 된 이래로 아이처럼 변한 흙덩이였으나 불릿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보인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더욱 사랑스러워 보였기에 불릿은 차마 여인으로 만들어주진 못하고 있었어도 입술만은 자주 훔쳐 주었다.
“츄웁….”
몇 초간 이어진 키스, 그가 입술을 떼어냈을 때는 ‘뽀옹….’이라는 진공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으으응, 흐응…?”
불릿이 말은 않고 키스를 하자 누워있던 상태로 머리칼을 아래로 늘어뜨려 놓았던 흙덩이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으며 수줍은 모습을 드러냈다.
“혀는 먹는 거 아닌데…, 빠는 것도 아닌데….”
자신과 키스를 할 때에는 올리비아와는 달리 자꾸만 흙덩이의 분홍빛 혀를 입술로 빨아당기며 흡입하는 불릿.
올리비아가 쫄깃하다면 흙덩이는 매우 말랑말랑했기에 불릿이 그러는 것을 몰랐던 당사자는 발갛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
그리고 둘의 애정행각을 눈알이 빠져라 뚫어지게 쳐다보던 유실리아는 가슴앓이를 겪고 있었다.
‘각하…, 흐읏….’
이번 여정을 통해 자신도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으나 도저히 틈이 보이질 않자 유실리아는 낙담한 모습을 보였다.
그럴 때마다 흙덩이가 그녀를 위로해주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장벽이 되어 불릿에게 다가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
‘작은아씨께 폐가 되고 싶지 않아…….’
주변의 누군가가 슬퍼하면 같이 슬퍼해주고, 기뻐하면 같이 기뻐해주는 흙덩이에게도 단 하나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불릿이었다.
올리비아와는 어찌어찌 공유할 수 있더라도 이곳에 와서 처음 본 유실리아에게도 그것이 될지는 미지수였다.
“자네에게는 미안하군. 시집도 안 간 처녀한테 이러한 모습만 보여줘서.”
“헛, 아, 아닙니다!”
불릿에게서 기습공격을 받자 유실리아는 화들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안색이 어두운데,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것인가? 그렇다면 미리 말해두게. 자네를 위해서 조치를 취해줄 터이니.”
보통 상사가 이런 말을 꺼내면 아랫사람에게 오는 것은 불이익이나 해고통보가 오곤 했다.
하지만 불릿은 그런 졸렬한 인간이 아니었기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자신을 생각해준다는 점에 유실리아는 감격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주군. 조금 멀미가 났나봅니다.”
“…그래? 그렇다면야…….”
“불릿, 나 쪼옥해줘, 쪼옥.”
“못 말리겠군.”
잠시 유실리아의 눈치를 보면서도 불릿은 흙덩이가 수줍어하면서도 두 팔을 벌린 채 해달라고 조르자 이 야릇한 진공키스를 이전보다 깊게, 그리고 더 오래 해주고 있었다.
“으응, 으으응…, 츄웁, 추르릅, 쭙쭙-.”
혀가 얽히면서도 부드럽게 빨아들이는 입맞춤에 흙덩이는 부끄러워하던 것도 잊고선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채 애정행각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런 둘을 보면서 유실리아는 점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 * *
“불릿 폰 바포 백작각하 진(眞)께 향하여 충!!”
“충-성-!”
“충-성-!”
푸드드드득!
짹짹짹!
…커엉, …커어엉……
온 사방이 요동칠 정도의 거대한 함성에 하늘을 노닐던 새들은 물론이거니와 마수의 숲 저 너머에서부터 위협을 느꼈다는 의미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불릿은 이들의 환대에 살짝 골이 아팠으나 그렇다고 무를 수도 없었기에 묵묵히 받아들였다.
“……성대한 환영이로군, 삼광(三光).”
“저희의 요새에 잘 오셨습니다, 각하!”
너무도 각진 자세의 경례에 불릿은 그의 몸에 나뭇잎을 대면 베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토록 무서울 정도의 환영식에 흙덩이는 유실리아의 뒤에 숨어 셰실리코프를 노려보았다.
“저 사람 나쁜 사람이야. 유실리아가 때려줘.”
흙덩이의 말에 유실리아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따로 행동을 할 수도 없었으니 그저 가만히 서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삼광, 이건 좀 지나친 것 같소만.”
불릿이 지적하지 못한 부분을 대신해서 나서주는 크레파토스.
이건 누가 보기에도 과하다 못해 안 한 것만 못한 환영식이었기에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각하?”
“자네답지 않군.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삼광 셰실리코프는 전형적인 무인의 기질을 지녔기에 불릿의 앞에서 용서를 빌면서도 주눅든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불릿이나 크레파토스나, 하다못해 어린 여기사인 유실리아조차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셰실리코프도 그들의 반응을 보았기에 자신이 생각한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깨닫고선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실은 전령을 통해 바스톤에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었을 터인데….”
흙덩이와의 스킨십이 격렬(?)해졌다는 것 외에는 불릿이 생각하기엔 딱히 특이한 것도 없었던 바스톤에서의 생활이었다.
대지의 축복이야 땅의 정령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던 것이고, 어차피 자신의 영토이니 마기의 정화에 대해서도 불릿과 흙덩이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런데 대체 무엇 때문에 이리도 요란법석을 떠는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 의문은 당사자가 스스로 풀어주었다.
“백작각하, 아니. 주군이시여.”
털썩.
“자네 왜 이러는가?”
“어허, 물러서도록.”
“…예, 각하.”
크레파토스가 땅바닥에 무릎을 꿇는 셰실리코프에게 다가가려하자 불릿이 그를 제지했고, 크레파토스는 의문을 품은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삼광의 말에 주변의 모두가 벙 찌게 되었다.
“저도 결혼하고 싶어요….”
춘풍은 이미 지난 지 오래인데, 현재 불릿의 영토에서 가장 뛰어난 실력과 재능을 지녔다는 냉철한 영주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딸칵-.
“각하께오서 즐기신다던 설탕 두 스푼과 우유를 넣은 홍차입니다.”
하녀가 있음에도 셰실리코프는 본인 스스로가 손수 홍차를 타서는 불릿에게 건네주었다.
“나도, 나도 줘!”
“미리 준비해뒀습니다. 여기….”
딸칵-.
“불릿이랑 같은 거다, 헤헤.”
호로록-
흙덩이는 불릿과 같은 음식을 먹게 된다는 것이 기뻤는지 그토록 싫어하던 나쁜 사람이 건네주는 홍차를 잘도 마셨는데, 불릿은 그녀의 보드라운 혓바닥이 자칫 데일까봐 불어주었다.
“후우, 후우. 식혀서 먹어야지? 여기 있네.”
“괜찮은데…, 헤헤. 잘 마실게!”
호록, 호록.
흙덩이가 맛있게 홍차를 마시자 불릿도 한 모금 물고선 입을 열었다.
“그래, 혼인이 하고 싶다고?”
불릿이 찻잔과 받침그릇을 들고서 이야기를 떼자 기다렸다는 듯 셰실리코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럽지만 그렇사옵니다.”
너무도 당당한 그의 말에 불릿의 눈썹이 살짝 휘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러는 거지? 혹, 세력확장을 노리는 건 아니겠지?”
피를 흘리지 않으면서도 힘을 키우는 방법 중 하나엔 가문끼리의 결합이 있었다.
결혼을 통해 피가 이어지고, 자식이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상대방과의 연결고리가 생기게 되고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반역을 겪은 불릿은 그러한 점에 민감했는데, 셰실리코프도 그것을 알기에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닙니다. 그저 사랑하는 자가 생겼기에 염치불구하고 각하께 부탁드리고 싶었습니다.”
“…?? 자네가 사랑을 한다고…?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불릿, 저 사람 누구 좋아해? 쪽쪽해?”
“쉿, 그건 둘만 있을 때….”
“유실리아랑 있어도 했잖아?”
“…….”
“……?”
갑자기 침묵이 감돌자 흙덩이는 고개를 가로로 기울이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눈을 빛내더니 불릿에게 다가왔다.
“쪽!”
“음….”
흙덩이의 기습공격에 불릿은 슬쩍 셰실리코프의 눈치를 보았고, 이에 아랑곳 않는 흙덩이가 방실방실 웃었다.
“이건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하는 거야. 나쁜 사람은 못해.”
그 말이 가슴에 비수가 된 것인지 셰실리코프의 인상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고선 다시금 무릎을 꿇었다.
털썩.
“제발 절 도와주십시오, 주군!”
“…일어나시게. 기사는 함부로 무릎을 꿇는 게 아니야.”
불릿은 그가 탐탁지 않았으나 미래를 생각한다면 전략병기로 거듭날 수 있는 셰실리코프를 완전히 외면하기도 힘들었다.
그의 손길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선 셰실리코프는 어두운 안색으로 자리에 착석하며 입을 떼었다.
“작은아씨의 말씀대로 나쁜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눠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하지만 저는 그녀를 간절히 원합니다.”
“호오… 누가 이 냉혈한의 가슴에 불을 지핀 것이지? 본인도 궁금하군.”
“난 안 궁금해. 불릿만 있으면 되는걸?”
기특한 흙덩이의 말에 불릿은 그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이었고, 흙덩이는 고양이처럼 눈웃음을 지었다.
“일단 들어는 보겠다. 말해보도록.”
“감사합니다, 주군!”
“허락한 건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래서 누군가, 그 대상이?”
불릿의 궁금함 가득한 물음에 셰실리코프는 그의 뒤에 서있는 크레파토스와 유실리아를 바라보다 시선을 돌리며 일자로 그어진, 굳게 다문 입을 천천히 떼었다.
“그녀의 이름은 션샤인 폰 투툰, 투툰 후작가의 다섯째 공녀 되십니다.”
“미친 새끼, 때려쳐! 지금 바포 변경백을 멸망케 하려는 속셈이더냐!”
시종일관 느긋한 태도를 보이던 불릿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는데, 그의 눈에선 한기가 줄기줄기 흐르고 있었다.
“크레파토스, 유실리아! 이놈을 죽여라! 반역자다!”
“왜, 왜 그래, 불릿? 무서워….”
불릿을 전적으로 믿는 흙덩이까지 두려워하자 얼어붙은 유실리아 대신 노장 크레파토스가 앞으로 나섰다.
스윽.
“각하, 진정하시고 일단 얘기를 마저 들어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자네도 들었지 않은가! 투툰 후작가라니? 알퐁스 드미리치 폰 투툰 후작에게 약점 하나 잡혀선 아니 된단 말일세! 그는 진(眞)의 이름을 계승하는 자란 말이다!”
알퐁스 드미리치 폰 투툰 후작 진(眞). 그는 루드밀라에서 왕실도 제치고 최고로 넓은 영토와 세력, 부를 갖추고 있었고 바포 가문과는 달리 건국 이전부터 존재해온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부족한 것이 없는 투툰 후작은 딱히 남의 약점 같은 걸 잡으려고 하진 않았으나, 일단 물게 된다면 절대 놓치지 않았고, 상대가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거나 파멸하기 전까지 끝내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그가 남긴 어록 중에 ‘내가 끝났다고 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고 하는 말은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끔찍한 공포를 자아냈으니 말이다.
“절대 안 된다! 이 결혼, 나는 반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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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9시와 밤 12시 10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