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0 흙덩이와 함께 =========================================================================
브룩 남작의 발언에 불릿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으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브룩 남작은 본인 스스로도 몬스터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며 영토를 지키는 호인이었기에 혈기왕성했다.
당연히 밤일에도 충실했고, 정력이 남달랐기에 군단장으로 유명한 뎁슨 레너드 남작과 더불어 그 방면에 통해선 유명했다.(?)
귀족에게 있어 성교가 딱히 이상하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고, 평민들도 그것 외에는 오락거리라 부를 만한 일이 적었기에 이 시대 사람들에게 있어 성(性)이란 것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물며 불릿은 젊어지기까지 한 상태, 브룩 남작도 많은 관심이 가는 중이었다.
“그야, 아직은 그녀의 순수를 지켜주고 싶어서 그렇다네.”
올리비아를 통해 처녀란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불릿이었기에 아직 자신의 육체도 잘 모르는 흙덩이를 아끼는 모습이었다.
이 의외의 말에 브룩 남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올리비아 마님과는 꽤 여러 번 합방하신 것으로 압니다만?”
불릿이 올리비아 때문에 초췌한 안색을 보인 것이 자주 목격되었기에 가신들의 구설수에도 오른 상태였다.
본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뒷이야기만큼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것도 없는 법이었으니까.
“올리비아는 소녀가 아니질 않은가?”
나이만으로 따지면 올리비아도 얼마 차이나지 않았으나 확실히 소녀라 부를 만한 나이는 지났다.
“각하께선 그리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작은아씨께서도 같은 생각이라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흙덩이가 왜?”
브룩 남작의 말에 이번엔 불릿이 의문을 가졌다. 흙덩이는 언제나 불릿이 최우선, 자신보다도 그를 먼저 생각했기에 불릿의 생각과 상반된다는 발언은 떠올려본 적도 없었다.
이에 브룩 남작은 작게 한숨을 쉬고선 그에게 조언을 주었다.
“각하, 여자들은 자신을 아껴주는 남자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안으로 감싸기만 한다 해서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 그게 무슨 개소린가?”
뜬금없는 브룩 남작의 말에 불릿은 토질검사를 위해 흙을 한줌 들어서 비벼보던 중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젊어진 육체는 간혹 그의 생각과는 별개로 행동을 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때였던 것이다.
이번에는 브룩 남작도 똑똑히 그것을 들었기에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까 잘못 들었던 것이 아니로군요. 체면을 생각하심이 좋으실 것 같습니다.”
“21년을 참았었는데 얼마나 더 참으라고.”
불릿이 살짝 투덜거리며 내뱉은 말은 올리비아도 들었던 말이었다.
그래서 불릿은 21년의 봉인(?)을 풀고 짐승이 되었었다. 꽃사슴을 잡아먹는 늑대 말이다.
지금이야 그 꽃사슴이 늑대를 잡아먹고 있었지만.
“뭐, 저도 형식상 조언을 드린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방금 말씀드리던 여자에 대해서 말입니다.”
브룩 남작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넘어가고 있었는데, 역시 그는 마수의 숲에서 영지를 지키는 인물답게 자잘한 것은 넘어가는 성미를 지니고 있었다.
“뭔가, 그것이?”
불릿도 궁금했는지 손을 탁탁 털며 귀를 기울였는데,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있던 크레파토스도 어느 샌가 다가와 고개만 돌린 채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여자는 마냥 아껴주는 것보단 함께 살을 섞으며 체취를 맡고, 입맞춤을 하며 정사를 통해 ‘아,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라고 느낍니다.”
“그것을 남자인 자네가 어찌 아는가?”
미간이 찌푸려진 불릿의 말에 브룩 남작이 웃으며 대꾸하였다.
“침대에서 들은 말입니다.”
“…….”
“…부럽군.”
“음?”
“예?”
“…….”
“……?”
갑자기 추가된 중후한 목소리에 불릿과 브룩 남작은 고개를 돌려보았으나 크레파토스는 여전히 먼 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심심해.”
파닥파닥, 그런 의태어가 어울릴 만큼 귀여운 동작을 보이고 있던 흙덩이는 침대를 구르는 것도 지겨웠는지 벌떡 일어나 입을 크게 벌렸다.
“유실리아! 아앙-.”
“에휴, 여기 있어요, 작은아씨.”
쏘옥!
“얌냠…, 이거 맛있어! 유실리아도 먹어봐!”
유실리아는 한숨을 쉬며 흙덩이가 건네주는 무언가를 받아먹었는데, 그것을 씹어 먹으면서 우울함이 서려있던 얼굴에도 미소가 깃들기 시작했다.
“우물우물, 맛있긴 하군요. 특히 이 쫀득하면서도 달콤한 식감이 상당히 괜찮네요.”
“그치? 그치? 안나가 불릿이랑 나 먹으라고 싸줬는데 많으니까 같이 먹자!”
“안나…하녀장이 말씀이십니까?”
“응. 안나가 불릿에게 먹이면 좋다고 하던데?”
‘남자에게 참 좋은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것’에 속하는 음식인 더덕으로 만든 꿀강정이었다.
아직은 입맛이 어린아이취향인 흙덩이를 배려해 안나가 다른 종류는 모두 빼버리고 달콤하거나 달달함 위주로 간식을 구성해서 싸줬던 것이다.
“그리고 불릿이 여자한테도 좋다고 그랬는데, 이거 먹으면 가슴에서 막 모유수유가 잘 된다고….”
“그, 그만하세요!”
“으븝, 읍?”
당황한 유실리아가 입을 가리자 흙덩이가 순진무구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고, 자신의 추태를 깨달은 유실리아는 얼른 손을 떼고선 자리에 부복했다.
“죄송합니다, 작은아씨!”
“유실리아가 뭘 잘못했어?”
“작은아씨가 말씀을 하시는데 감히 그것을 막은 것도 모자라 옥체에 함부로 손을 댄 것이….”
“괜찮아, 나는 유실리아도 좋아하니까!”
그러면서 다가온 흙덩이가 부복한 상태인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유실리아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었다.
“헤헤헤, 이러면 기분 좋지? 불릿이 이렇게 해줄 때마다 나는 참 좋아! 처음엔 이게 친밀을 위한 의식이라고 했는데, 불릿이 나를 좋아한다는 뜻이었던 것 같아!”
‘이토록 천사 같은 분을 상대로 나는 그분에게 관심을 받을 수 있을는지….’
그녀의 생각과는 다르게 흙덩이는 해맑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헤헷!”
* * *
그동안 바포 변경백엔 땅의 중급 정령사가 탄생한 적이 없었기에 지금처럼 흙덩이가 보여주는 정화작업을 실현한 적이 없었다.
땅의 정령사는 다른 원소들에 비해 더욱 귀한 면이 있어 많은 것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그나마 존재하는 이들도 수비적인 용도로만 기술을 사용했기에 더욱 그랬다.
‘중급…인 것인가?’
불릿은 마기에 물든 토지에 대지의 축복을 내려주는 흙덩이를 보면서 생각에 잠겼는데, 이 부분은 그로서도 애매한 부분이라 더욱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기술과 능력을 보이고 있는 흙덩이였으나, 외부에서 일으키는 기술에 비해 신체에서 발현해야하는 기술들은 전혀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중급이라고 보기에 애매했던 것이다.
저벅, 저벅.
“아름다우시군요.”
“…그렇지, 아름답지.”
토질을 점검하며 수행원에게 기록을 남기도록 명한 브룩 남작은 불릿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었고, 불릿 또한 이에 동의했다.
흙덩이의 외모는 순수 불릿의 취향에 따른 것. 소환되는 정령은 계약자의 욕망에 어느 정도 부응하기에 형태를 그것에 맞춰주기 때문이다.
그렇다곤 해도 저건 심히 아름다웠다. 지금처럼 대지의 축복을 내리면서 은은히 빛나는 정령력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힐끔힐끔 그녀를 훔쳐보고 있는 농부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저분에게서 따님을 낳으신다면 제 아들놈과 혼인시키고 싶군요.”
“푸웁!”
불릿은 고개를 돌려 침을 뿜고선 고함을 쳤다.
“그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 정도로 미모가 빼어나시다는 소리였습니다. …뭐, 정말로 그리 된다면 좋겠습니다만.”
진심 반, 농담 반인 말이었으나 불릿은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그의 말을 거절했다.
“설사 흙덩이가 딸을 낳더라도 자식들의 의사도 묻지 않고서 혼인시키지 않을 것이네.”
그러면서 상상되는 흙덩이가 임신하는 모습. 살짝 배가 부푼 상태로 ‘여보.’라고 말하는 흙덩이가 떠올랐으나 뭔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저 순수한 아이에게 손을 대도 괜찮을지 모르겠군.’
이미 사랑하기로 결심했으면서도 선을 넘기가 도저히 힘들었다.
올리비아처럼 정열적이면 모를까, 흙덩이는 인간이 되면서 더욱 여린 구석이 생겨났기에 그럴지도 몰랐다.
“…그것은 지난 세월동안 여자를 멀리하던 것과 관련된 것입니까?”
꽤나 날카로운 지적이었으나 불릿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옛날 일이 되었군. 맞네, 그게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
“저분을 사랑하신다면 한번 물어보시지요. 자식을 갖고 싶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흐음…. 여자는 약해도 어미는 강하다, 그걸 말하는 것인가?”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자식을 가지면 더욱 사랑받는다는 기분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유부남의 조언이었기에 불릿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살짝 미간이 찡그러졌다.
“자네는 흙덩이가 불룩 튀어나온 배를 매만지는 것이 상상이 되는가?”
불릿이 손가락으로 농토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춤을 추듯, 대지의 축복을 내리는 흙덩이를 가리키자 브룩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상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든지 지르고 보면 결과는 알아서 뒤따라오는 법입니다.”
그의 말은 이곳에 머무는 내내 결합을 주장하는 뜻이었기에 불릿은 떨떠름했다.
“인간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 많네. 함부로 손을 대어 상처주고 싶지 않군.”
원래 새하얀 백색의 도화지엔 선뜻 붓을 긋기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시작이 어렵지, 지금 올리비아만 보아도 불릿만 보면 사랑을 갈구했으니 흙덩이도 그리 될지 몰랐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하여 인간이 되신 겁니까? 이전에는 모습은 인간과 흡사했으나 사람과는 다른 기운이 조금씩 흘러나왔고, 무엇보다 음성대화가 불가능하지 않으셨잖습니까?”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었기에 불릿은 어떻게 답해야할지 고민했다.
최상급 마정석, 그러니까 마의 꽃방울을 흡수해 저리 됐다는 것을 알려주면 누군가 흙덩이를 납치해 해부할지도 몰랐다.
혹시나 체내에 남아있을지 모르는 마정석을 갈취하려고 말이다.
이리저리 고민하던 불릿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편하게 입을 열었다.
“흙덩이는 애초에 특별한 존재였고, 거기에 가문의 비술을 사용했을 뿐이네. 흙덩이가 특별한 거지.”
“그렇습니까….”
돌려 말하긴 했으나 결국 ‘비밀’이란 소리에 브룩 남작은 알아서 침묵하게 되었다.
바포 변경백 최고권위자가 말하기 싫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이는 아무리 그와 가깝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설사 밴이나 안나가 묻더라도 불릿은 같은 말을 되풀이할 것이다.
‘올리비아가 실수하지 않길 바라야지.’
올리비아는 흙덩이가 변하는 순간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인물이기에 무엇이 원인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만 조심한다면 흙덩이가 변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 알려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 코와 볼에 흙을 잔뜩 묻힌 흙덩이가 살금살금 불릿의 등 뒤로 다가오더니 와락 덮쳤다.
포옥!
“하하하! 나 다했어, 불릿!”
그녀가 새하얀 원피스가 더러워지는 것도 모르고 흙밭에서 뒹굴고 오자 불릿은 자신의 몸에도 그것이 옮겨 묻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스윽, 스으윽-.
“우웅, 불릿, 어푸! 불릿 그만해, 어푸!”
“어허, 가만히 있도록. 닦기가 힘들지 않느냐!”
아주 예전에, 데빌로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문질문질 얼굴을 닦아주는 불릿의 손길에 흙덩이는 피하려했고, 불릿은 어떻게든 깨끗하게 해주고 싶어서 그녀를 잡고서 더러움을 지워나갔다.
“어푸!”
그녀의 달콤한 숨결이 불릿의 콧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