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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정령사-136화 (136/241)

00136  사랑에 빠진 흙덩이  =========================================================================

쿵, 쿵, 쿵!

벌컥!

“안나!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불릿은 거친 발걸음을 옮기며 흙덩이의 침소로 이동했는데, 노크도 하지 않는 무례한 행동을 보이며 다짜고짜 문을 벌컥 열어재꼈다.

그리고 그의 시선에 비춰진 것은 저번엔 없었던 화장대와 그곳에 마련된 거울 앞에서 머리를 정리하고 있는 흙덩이, 그리고 올리비아를 볼 수 있었다.

“어머나, 우리 도련님이 또 무슨 일로 찾아오셨을까?”

안나는 루나와 함께 흙덩이의 손과 발을 각기 붙잡고 손질해주고 있었는데, 불릿의 방문에 안나는 총총걸음으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척을 하며 다가왔다.

불릿은 안나가 눈에 보이자 쿵쿵 걸음을 떼며 눈을 부라렸다.

“안.나! 내 분명히 비밀을 엄수하라 일렀거늘, 감히 흙덩이의 정체를 폭로해!”

눈에서 줄기줄기 한광을 흘리는 불릿이었으나, 안나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조신하게 입을 열었다.

“도련님, 거기엔 사정이 있답니다. 일단 들어보시고 이 안나의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릴지, 머리를 콩 할지 판단하셔야 하지 않으실까요?”

여전히 귀여운 척을 하며 징그러운 대사를 날리는 안나의 태도에도 불릿은 화난 모습을 풀지 않았다.

“들어는 보지, 안나. 하지만 만일, 본인을 납득할 만한 변명거리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내 분노를 받게 될 것이야.”

여태껏 불릿이 이토록 광분한 적은 올리비아가 위기에 처했을 때를 제외하곤 없었기에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안나는 겁을 먹을 만도 하건만, 하녀인 루나도 그런 티를 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당사자인 흙덩이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선 둘을 쳐다보고 있었고, 흙덩이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던 올리비아의 손도 멈춘 상태였다.

“저번에 제가 작은아씨께서 임신이 가능하다 알려드렸죠?”

“…그랬었지.”

갑자기 튀어나오는 껄끄러운 주제에 불릿의 분노는 주춤하는 기색을 보였는데, 안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선 눈웃음을 활짝 피어보였다.

“축하합니다, 도련님! 작은아씨께서 드디어 마법에 걸리셨어요!”

“마법? 설마 마탑의 지부에서 수작을 부린 것은….”

“여성들이 한 달에 한 번씩 걸리는 마법, 모르세요? 생리요, 생리.”

“푸우웁! 뭐, 뭐라?!”

불릿이 침을 뿜으며 말을 더듬자 안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그가 뿜어낸 침을 닦아냈다.

“아이 참, 도련님의 타액이 안.나.에.게. 묻었잖아요?”

“장난치지 말고! 그게 무슨 소리야! 생리라니?!”

불릿이 당황하는 모습이 재밌는지 올리비아와 루나는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고, 여전히 흙덩이는 뭐가 뭔지 잘 모르는지 고개만 갸웃하고 있었다.

“이 도련님께서 왜 이러실까? 임신이라 하면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것이 가능하다 알려주는 생리가 찾아온 것에 응당 기뻐하셔야지 이상한 반응을 보이시네에-?”

“흙덩이는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고! 그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안나보고 어떡하라구요? 이우우스님과 마주쳤을 때 딱! 하고 작은아씨께서 하체에서 피를 흘리셨는데.”

“끄으응….”

하필 걸려도 된통 걸린지라 이우우스의 날카로운 눈길을 피할 수 없었고, 결국 안나는 마침 잘됐다 싶어 불릿의 측근인 이우우스 1급 행정관에게 이실직고하게 된 것이었다.

비밀이 알려지는 것은 좋지 않으나 이우우스라면 믿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한 사정을 듣게 된 불릿은 할 말을 잃고서 연신 신음했다.

그가 괴로워하는 듯하자 흙덩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끝을 세우고선 간신히 닿는 불릿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괜찮아, 이제 아프지 않아.”

“으으음…, 그, 그래. 어떻게, 괜찮아, 흙덩아?”

정신을 차린 불릿이 흙덩이의 안부를 묻자 흙덩이는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때는 배가 엄청 아팠는데, 이젠 괜찮아. 나도 이제 피도 나고, 올리비아랑 똑같아! 올리비아가 흘리던 피랑 똑같은 냄새가 나!”

“꺄악! 기집애야, 그걸 왜 말해!”

“응? 하지만 냄새나잖아, 피?”

“꺄악! 꺄악! 하지 마, 하지 말라고!”

올리비아가 발작하듯 흙덩이의 입을 급히 가렸으나 이미 불릿은 다 듣고 말았다.

“자기야, 못들은 걸로 해! 못들은 거야, 알았지?!”

여성의 생리혈은 냄새가 그리 좋지 못했는데, 원래도 비릿한 피의 냄새가 한층 더 격해지는 것이 생리혈이었다.

“도련님, 그냥 확! 다 알리는 게 어떠세요? 작은아씨를 언제까지고 숨기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저기, 대영주님. 저도 안나 하녀장님의 말에 동의해요. 이렇게 말도 못하고 은둔해 계셔야하는 작은아씨가 너무 불쌍해요….”

안나와 루나의 말도 일리는 있었으나, 불릿은 그럴 수가 없었다.

정령이 인간이 된다, 이것은 가벼운 사항이 아니었기에 섣불리 발표할 만큼 현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대륙의 마법사와 정령사들의 수준이 낮아진 이유를 밝혀내지도 못한 가운데 이런 세기의 발견과도 같은, 있을 수 없는 현상이 벌어진 흙덩이의 육체가 그들에게 알려진다면 아마 해부를 당하거나 실험을 당할지도 몰랐다.

정령일 시절에도 마탑에서 군침을 흘리던 존재가 흙덩이었는데, 불릿은 두 눈 뜨고 그런 꼴을 지켜볼 수 없었다.

“하지만 말이지, 올리비아는 알겠지만 마탑에서 흙덩이에게 어떤 수작을 부리려고 했는지 경험한 후라서 그게 좋은 방법인지 판단이 서질 않는군.”

만일 대륙의 마법사와 정령사들이 흙덩이를 해결방법으로 꼽으며 달려들면 아무리 다른 곳보다 수준이 높은 바포 변경백의 병사들이라 할지라도 막을 수 없게 된다.

그리 되면 불릿이, 그리고 그의 부모가 지키고자 했던 영토는 황폐화될 것이고 흙덩이는 물론 올리비아도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자신의 어깨에도 닿지 않을 만큼 작고 가녀린, 가슴은 제외하고.

이 가녀린 소녀가 바깥나들이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마차에 숨어 다녀야 한다는 것은 불릿도 괴로웠다.

빠드득-.

“하지만, 하지만….”

단 하나의 공표로 인해 파멸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항에 불릿이 고심하는 사이, 올리비아가 흙덩이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꼬옥…

“올리비아?”

자신을 껴안는 올리비아를 흙덩이가 돌아보려고 했으나 이젠 예전처럼 괴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흙덩이는 익스퍼트인 올리비아의 힘을 당할 수 없었다.

올리비아는 흙덩이의 길고 부드러운 머릿결을 쓸어내리며 불릿을 쳐다보았다.

“불릿, 이들의 말대로 하는 게 좋겠어.”

“…올리비아, 이건 가벼운 사항이 아니다.”

“나도 알아. 마탑만 해도 영향력이 엄청나다는 걸.”

그리고 마탑은 대륙 각지에 뻗어 있었고, 이번 전쟁을 통해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자들이었다.

그들의 막강한 금력, 무력과 지력은 모든 국가에서 한발 양보해줄 정도였고, 단일세력인 바포 변경백이 이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풍요롭고 평화가 만연한 마법사의 탑 영역을 경험한 올리비아도 알고 있으면서 왜 저런 말을 꺼냈나 싶지만, 곧이어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불릿의 마음도 흔들렸다.

“나는 불릿이 좋아, 사랑해. 나만 불릿을 독차지하고 싶어. 하지만, 그건 흙덩이도 마찬가지잖아? 흙덩이는 말이야, 불릿이 너무 좋아서 참을 수가 없데. 언제나 불릿만 생각하고, 불릿 생각에 잠을 자다가 꿈이라도 꾸면 그날은 하루 종일 행복하데.”

“…….”

“얘는, 흙덩이는 불릿이 불러낸 거잖아? 흙덩이가 있던 곳은 자기도 모르겠데. 예전엔 말할 수 없었는데 이젠 말할 수 있다면서 알려준 게 그거야. 이 아이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지내왔는데, 그걸 불릿이 구해준 거야. 알아? 불릿, 자기가 흙덩이를 세상으로 이끌어준 거라고.”

“나는….”

두 눈을 끔뻑거리며 불릿을 쳐다보는 흙덩이에게 불릿은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나 아직 올리비아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얘가 왜 이런 모습이겠어? 어째서 인간이 됐겠어? 다 불릿을 위해서야. 오직 너만을 위해, 너하고 맺어지고 싶어서, 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방금 전까지도 흙덩이는 네 얘기만 꺼냈어. 얘의 삶에서 너를 빼면, 대체 뭐가 남는 건데? 이런 착하고 여린 아이를 홀로 내버려둘 거야?”

그러면서 올리비아는 흙덩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는데, 흙덩이는 기분이 좋은지 눈을 꼭 감고서 그녀의 손길을 마음껏 느끼고 있었다.

“나만 독차지하고 싶지만 누군가와 공유해야 한다면, 나는 흙덩이랑 그러고 싶어. 불릿, 너를 사랑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야. 나보다 더 오래 전부터 그래왔던 것은 바로 흙덩이고, 희생해왔던 것도 흙덩이야. 그것을 기억해줘.”

그 말을 끝으로 올리비아는 침묵을 지켰고, 생글생글 웃던 안나도, 간청하던 루나도 고개를 숙이고선 불릿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난….”

영토와 백성이냐, 흙덩이의 행복이냐.

불릿은 대립할 수 없는 두가지 기로에서 갈피를 못 잡았다.

그가 괴로운 선택을 이어가는 도중, 흙덩이는 올리비아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흙덩아…?”

올리비아는 자신의 손길에서 벗어난 흙덩이를 불렀으나, 흙덩이는 불릿에게로 가더니 자신이 받고 있던 머리쓰다듬기를 발끝을 세우며 더듬더듬 이어나갔다.

스윽, 스윽.

“불릿, 기억나?”

스윽, 스윽.

흙덩이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불릿이 처음에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을 때, 흙덩이는 엄청 작았잖아?”

막 소환 당했을 당시 흙덩이는 끽해야 여덟, 아홉 살 정도의 모습이었다.

키가 불릿의 허리에 닿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작았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땐 말도 안 통했는데, 이상하게 좋았어. 좋다는 말도 모르는데, 참 좋았어.”

스윽스윽.

발끝을 들고서 불릿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흙덩이는 이윽고 그의 품에 안겨선 사근사근 입을 열었다.

“불릿이랑 기술을 만들어낼 때, 엄청 신났어. 그냥 곁에 있기만 해도 좋았어. 표정을 따라하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

흙덩이, 그녀의 말에 불릿도 그동안의 추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흙덩이와 기술을 만들어내던 때, 언어를 가르쳐주던 때, 연습을 하며 끝났을 때마다 친밀을 위한 의식이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때.

“불릿이 좋아, 너무 좋아, 진짜 좋아. 그렇게 좋은데, 가끔 그곳으로 돌아가라고 할 때는 섭섭하기도 했어.”

소환을 해제하면 흙덩이는 이름 모를 그곳으로 돌아가 홀로 고독을 씹어야 했다.

아무도 없고, 오직 혼자라는 외로움이 짙게 배어있는 곳으로.

“그러다가 올리비아랑 만나고, 싫기도 했는데 이젠 좋아. 올리비아랑 놀면 재밌고, 신나. 샘도 났지만, 흙덩이 가슴이 더 커졌으니까 상관없어. 안나가 엉덩이도 빵빵하데.”

잠시 올리비아가 울컥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올리비아랑 놀아도, 안나가 가르쳐줘도, 루나가 나를 보살펴줘도 말이야.”

흙덩이는 불릿을 껴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더욱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갔다.

“나는 불릿이 아니면 안 돼, 불릿이랑 있고 싶어, 나도, 나도 불릿이랑….”

또르륵…

정령이라면, 땅의 정령에게서 도저히 보일 수 없는 눈물이란 것이 불릿의 가슴팍을 적시고 있었다.

“불릿이랑 사랑하고 싶어….”

사랑, 그것에 목말라하는 흙덩이의 흐느낌에 불릿은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사랑해, 불릿.”

============================ 작품 후기 ============================

아직...2편 남았다...

9시하고 12시 10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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